고 윤내현 교수의 영결식, 민족사학장으로 거행
이찬구 대표가 이끄는 가운데 추모 말씀으로 시작
심백강 원장이 민족사학 조문객을 대표하여 분향
복기대 교수, 이덕일 교수, 김민곤 역단협 대표
안경전 증산도 종도사 순으로
고인의 업적과 역사관 기리고 추억 함께 나눠
▲서기2025.07.01. 서울 강남삼성병원 장례식장 영결식장에서 민족사학계가 고 윤내현 교수 영결식을 민족사학장으로 거행하였다. 사진: 오종홍
고 윤내현 교수에 대한 영결식이 서기 2025.07.01. 서울 강남의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내 영결식 실에서 민족사학장으로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이찬구 미사협(미래로가는바른역사협의회) 상임대표가 영결식을 인도하는 가운데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참석하여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이 상임대표는 먼저 “늘 우리 곁에 계실줄만 알았던 한뫼 윤내현 교수님께서 향년 87세의 일기로 서거하셨습니다.”라며 고인의 돌아가심을 애도하였다. 이어 연합뉴스와 세계일보가 고인의 부고를 전하였다며 언론의 반응을 알렸다.
▲이찬구 미사협 상임대표가 영결식을 이끌었다. 사진: 오종홍
이날 영결식은 분향->약력보고->강의음성경청->조사->헌화 순으로 거행되었다.
먼저 분향은 심백강 민족문화연구원장이 하였고 이어 윤창렬 대한사랑 대표가 고인의 약력을 보고하였다. 보고에 따르면 고인은 중국사를 전공하여 박사학위까지 취득하였지만 기자조선 연구를 계기로 민족사학 연구에 투신하였다. 위만조선과 한사군이 중국대륙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식민사학에 짓눌린 우리 역사의 지평을 획기적으로 넓혔다.
이 때문에 식민사학계의 미움을 사 북한학자 리지린의 연구를 인용했다는 이유로 식민사학계에게 고발돼 국가안전기획부에 불려가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고인은 이에 굴하지 않고 연구를 거듭하였고 수많은 역사복원 저서를 남겼다. 그중에 으뜸이 『고조선연구』다. 고인은 식민사관의 잔재를 걷어내고 고조선 이후의 역사를 바로 세웠다. 이를 통해 고인은 한민족의 뿌리와 미래를 밝힌 진정한 사표가 되었다.
▲ 심백강 민족문화연구원장이 조문객을 대표하여 분향을 하였다. 사진:오종홍
▲윤창렬 대한사랑 대표가 고인의 약력을 보고하였다. 사진:오종홍
이어 강의 음성 경청이 있었다. 강의는 고인의 학문이 최고조에 달한 49세 때인 1987.02. 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이 개최한 “상고사대토론회”에서 발표한 것이다.
경청이 끝나고 조사가 이어졌다. 고인의 제자인 복기대 인하대학교 융합고고학과 교수가 첫 번째 조사를 발표하였다. 복 교수는 고인과 생전에 함께 한 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갔다. 고인이 기자조선을 강의하는 것을 계기로 인연이 되었고 한 발표회에서 고인이 식민사학자 이병도의 제자 김철준에게 공격받는 것을 보고 고조선 연구에 뛰어들었다고 추억하였다.
서울대학교와 중국 북경대학교에 갈 뻔 사건을 소개하였다. 모두 고인이 복 교수가 이들 대학에 가기를 원했지만 복 교수 자신의 문제로 가지 못했다고 고백하였다.
복 교수에 따르면 고인은 민족주의가 해체되는 시기에 민족에 터 잡아 역사를 복원하여 자기 고유한 정체성을 가진 민족국가의 기초를 세웠다. 이때 이 작업이 없었더라면 지금 우리는 민족 해체의 굴레 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복 교수는 이날 노무현 정권 때 고 윤내현 교수의 힘으로 남북한 학자들의 고대사 연구 협의체가 구성되었는데 중간에 해체된 사연을 소개하였다. 남한 학자들 몇몇이 사익을 앞세우는 바람에 붕괴되었다고 하였다.
▲복기대 인하대학교 융합고고학과 교수가 조사를 발표하였다. 사진:오종홍
두 번째 조사는 이덕일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교수가 맡았다. 이 교수는 먼저 고인과는 학연, 지연, 혈연 등 아무것도 관계가 없다며 고인과의 무관련성을 내세웠다. 그런데도 식민사관 청산, 민족사학 복원이라는 시대적 사명에서는 누구보다도 강한 인연이 있었음을 피력하였다. 그는 고인에게 직접 배우지는 않았지만, 고인의 책을 이전부터 읽었고 이후 만남도 가지며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의 고문으로 모시면서 윤내현 교수를 학문의 스승으로 여기고 있다고 고백하였다.
이 교수는 고인이 다른 여타 민족사학자들과 같이 내외적으로 고통과 핍박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역사복원 투쟁을 이어온 정신을 높이 기렸다. 또 지금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아 식민사학청산, 바른역사 복원의 길은 험난하다고 강조하였다.
이어 고인이 남긴 업적으로 사료에 바탕을 둔 정통역사학을 꼽았다. 실증사학을 주장하는 식민사학이 역사학이 아니라는 것을 들어 고인의 업적을 높였다. 식민사학이 주장하는 실증사학은 사료에 바탕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자신은 고인의 제자라고 생각하고 있고 신한대학교-> 순천향대학교->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를 거치면서 박사학위 후학들을 길러내고 있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후학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며 고인의 학문을 지속, 발전시킬 것을 다짐하였다. 아울러 고인의 뜻을 잇는 구체적인 실천으로 민주당과 역사정책협약을 맺어 추진하고 있다고 전하였다. 마지막으로 고인의 역사관이 상식이 될 때 우리나라가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하였다.
▲이덕일 교수가 조사를 발표하였다. 사진: 오종홍
이어 김민곤 전국역사단체협의회(전단협)장이 세 번째로 조사에 나섰다. 그는 먼저 ‘한뫼 윤내현 선생의 이름도 들은 지 얼마 안 된 40년동안 외국어를 가르친 교사 출신으로서 역사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였다.
이어 전단협은 고인처럼 역사를 학문으로 연구하는 단체가 아니고 바른역사를 알리는 운동단체라고 하면서 학자들이 연구하여 내놓은 바른역사를 학교 등 우리 아이들이 있는 곳에 보내는 활동을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그는 서기 1945년 이후 조선총독부가 생산해 낸 역사를 아직도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우리가 아직 광복, 해방이 안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면서 한뫼 선생이 이룬 학문의 금자탑을 받들어 나가겠다고 하였다. 이는 역사를 학문에서 교육으로 이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정치권력과 연결될 수밖에 없어 역단협이 정치계와 협력하여 한뫼 선생의 뜻을 이루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김민곤 전국역사단체 대표가 조사를 발표하였다. 사진: 오종홍
마지막으로 안경전 증산도 종도사가 조사를 이었다. 그는 “점심때 뜻을 함께하는 분들과 함께 밥그릇 들면서 아직 혼과 백이 분리 안 된 윤내현 교수님께 증산도 종도사로서 ‘이제 진정한 싸움이 시작됩니다. 대한의 역사를 찾는데 함께 대장정의 길을 떠나달라’고 기도를 하였다.”며 조사를 시작하였다.
그는 고인이 쓴 고조선 연구를 중심으로 고인의 업적을 추모하였다. 단군조선을 알리는 책에서 단군조선이 한민족의 문화역사의 유전자라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며 소감을 전했다. 이어 역사는 현상계의 최종판, 종합판이라서 역사 공부할 때 역사의 “사史”에서 보이듯이 중도 의식을 갖는 것과 역사가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역사를 쓰냐가 중요하다고 하였다. 그는 고 윤내현 교수가 이 관점을 유지한 것으로 보았다.
이어 조선총독부가 저지른 온갖 만행은 인류 역사에서 볼 수 없던 극악무도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우리 역사를 왜곡 날조한 자들이 역사학계를 장악하고 있는 한 역사를 바르게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하여 이들이 모두 죽은 뒤에나 가능할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도 고인은 식민사학자들이 구축해 놓은 소한 사관을 대륙으로 확장하여 동방에 단군조선이 있었음을 밝혔고 단재 신채호 등 독립투사들의 역사관을 이은 것에 더하여 현대적 학문 논리로 확장 정립하여 후대가 읽기 편하게 하였다고 고인의 학문 업적을 높이 기렸다.
마지막으로 증산도 태상종도사 시절 고인을 비롯한 4명의 학자를 대전으로 초청하여 강의를 듣고 연구비로 그때 돈으로 2~3천만원을 지원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밝혔다. 바른 역사복원 대안도 밝혔는데 역사와 관련한 인공지능의 활용을 제시하였다.
▲안경전 증산도 종도사가 조사를 발표하였다. 사진: 오종홍
조사가 끝나고 각계각층에서 온 조문객들이 헌화하는 것으로 영결식을 마무리하였다. 당초 예정했던 시간보다 30여 분이 초과할 정도로 고인을 보내는 마음이 애절하였다.
▲이날 영결식에는 각계각층 인사들이 찾아와 고인의 소천을 애도하였다.
▲영결식에 참석한 조문 인사들. 사진: 오종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