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종성(미스바채플 목사)

​단군의 나라 군자국은 낙랑국(진국)으로 발전

최리왕은 옛진국의 영광을 회복하고자 고구려와 혼인동맹 시도

사료는 1세기 전반기 이래로 고구려의 평양경영 보여줘

제대로 된 학자라면 낙랑군평양설(BC108~AD313) 주장할 수 없어

▲평양 낙랑박물관. 북한은 2022년도 평양시 낙랑구역 통일거리에 새로 낙랑박물관을 건립하여 낙랑국의 여러 종류의 유적과 유물 등을 전시하고 있다. 북한은 해방 후 3천여기 고분들을 발굴하여 고조선유민들이 세운 낙랑국의 역사성이 고고학적으로 뒷받침된다고 발표했다.


<삼국사기>에는 한(漢)의 낙랑군과는 다른 최리의 낙랑국이 등장한다. 이 낙랑국의 기원과 관련하여 먼저 고조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삼국유사>는 기자(箕子)가 조선으로 오기 전에 '(단군이) 장당경(藏唐京)으로 천도했다'고 하면서, BC13세기경에 요동과 서북한으로 동천한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 나라를 <산해경>과 <후한서>는 선인(仙人)이 사는 이상향이라는 의미에서 군자국(君子國)으로 기록하고, <사기>는 진국(辰國)으로 소개한다. 단군(壇君)이 장단경으로 옮겨온 이후 제정(祭政)이 분리되고 큰나라로 발전하면서 국호가 진국으로 불리게 되었을 것이다. 진국은 제국(諸國)의 간(干)들이 각기 자신들의 “국(國)”을 지닌 상태에서 가장 강대한 세력의 수장을 진왕(辰王)으로 옹립하여 상위의 국가를 건립하고, 그 권위에 통속하는 형태를 취하는 봉건제적 성격을 지닌 연합국가였다.

그런데 이 진국이 성립되는 초기에 진왕을 배출한 세력이 낙랑국으로 보인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여러 사료를 통해서 확인된다. 신라는 조선유민으로서 진한을 모태로 하여 성립된 국가로서 <삼국지>에 진한이 (요동과 서북한의) 낙랑을 ‘아잔(阿殘)’ 즉 "남아있는 우리"라고 칭하고 있다.

이것은 진한이 경상도로 이주하기 이전에는 진한과 낙랑이 한 세력이였던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진한은 옛 진국이라'고 하니, 옛진국시절에 진한과 낙랑은 함께 세력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진국, 진왕, 진한이 모두 '진(辰)'자가 들어가는 것을 보면 옛 진국이 성립할 당시에는 낙랑국(진한)이 주도세력이였던 것을 능히 유추할 수 있다.

혹자는 여기서 진한은 진(秦)의 난리를 피해 온 자들이고, 낙랑은 낙랑군으로 보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에서는 분명하게 ‘난을 피하여 이주한 중국인이 진한과 더불어 섞여 사는(與辰韓雜居)' 것에 불과하며, <삼국지>에도 진한인은 '동방인(東方人)'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또한 “예(濊)”는 고조선을 구성하던 종족인데 <삼국지>는 그곳에 ‘낙랑단궁(樂浪檀弓)’이 산출된다고 기술한다. 따라서 ‘예’가 ‘낙랑’으로도 불리웠던 것이니, 예족의 나라인 고조선의 이칭이 낙랑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신라의 토착어식 왕호와 인명, 고유의 문화적 요소, 특히 1대 혁거세 '거서간(居西干)'이라는 왕칭이 간 중에 간, 즉 진왕과도 연결되고, 2대 남해 ‘차차웅(次次雄)’의 왕칭이 “사제-임금”의 의미를 지닌 ‘단군왕검’과도 그 의미가 통하는 바이니, 신라의 모태가 일정부분 한화된 위만조선유민보다는 왕검조선유민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된 국가임을 알 수 있고, 이 신라의 모태인 진한과 기원을 함께 하는 낙랑국도 왕검조선의 후신임이 분명한 것이다.

그런데 <요사>에는 진한의 원위치가 요동으로 나온다. 진국(낙랑국)이 성립할 당시에는 요동 일대에 그 중심지가 있었고, 어느 시점엔가 평양 일대로 옮겨간 것이다.

낙랑국의 위치와 관련하여 최리왕이 고구려 호동왕자를 옥저에서 만나 '그대는 북국신왕(北國神王)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우리는 낙랑국이 고구려의 남쪽에 있었다는 정보를 얻게 된다. 1세기 당시 고구려는 기존 통설대로 보자면 압록강.동가강 유역에 있었고, 신라는 대체로 지금의 강원도 일부와 경상좌도에 있었다.

신라가 진한 6국의 연합으로 세워졌고, 점차 12국으로 늘어났다는 기록에서 강원도 일부와 경북 일대에 있던 소국들이 연합하여 신라 6부로 편입된 것이다. 후대 일이긴 하지만 기림이사금 3년(300) 조를 보면 이미 신라 왕이 비열홀(比列忽)로 순행하고 있다.

일찍이 신라의 강역이 강원도 안변일대까지 진출해 있었던 것이다. 식민사관의 학맥을 계승한 학자들은 이 기록을 믿을 수 없다고 무시하나, 비열홀 지역에 있던 한 소국이 국초부터 신라 6부의 일원으로 동참했다고 이해한다면 믿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두 사람이 만난 장소도 동옥저가 아니라 요동의 원)옥저 지역에서 만나고 있다. 따라서 낙랑국은 고구려와 신라의 중간 지대에 있었고, 강원도 북부보다는 그 중심지는 평양 일대로 보아야 할 터이다. 진국의 면적이 '방4천리(方四千里)'라고 하는 기록을 고려하면 요동과 평양은 낙랑국(진국)의 중심지이고, 그 외 만주와 한반도 일대는 주변부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위만조선과 진국의 위치도(출처. 고대사TV). <위략>에는 위만조선의 ‘東之辰國(동쪽의 진국)’이 있다고 한다. <삼국지>는 ‘진한이 옛진국이라’고 하며, <후한서>는 ‘삼한이 옛진국이라’고 한다. 그리고 진왕, 진한, 진국이 모두 “辰(진)”이 들어감을 고려할 때 진국이 성립할 당시에는 진한(낙랑국)이 주도권을 쥐었고, 후기에는 마한에서 진왕을 배출하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강경구는 낙랑국이 최소 다섯 개 정도일 것으로 보았는데 요동의 최씨낙랑국, 평양의 왕씨낙랑국, 춘천의 낙랑국, 영천의 낙랑국, 경주의 사로국(낙랑국) 등이 있다고 했지만 동일한 국명을 가진 나라가 여러 곳에 있을 수 없기에, 경주의 사로국을 제외하고, 여기저기 등장하는 낙랑은 모두 낙랑국(진국)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러시아의 유 엠 부찐은 서기전 2세기 초에 고조선의 유물 영역이 평양과 요동지방에까지 뻗치고 있어서 그 당시 영역을 짐작케 한다고 하였다. 선학들의 연구에 따르면 위만조선은 분명 요서에 있었으니, 그가 언급한 고조선은 왕검조선의 후신인 낙랑국의 유물 영역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터이다.

<삼국사기> 동천왕조에 '평양은 본시 선인 왕검의 옛터'라고도 밝히고 있으니, 평양 지방에 왕검조선의 후예들이 대거 이주 정착하였기에 그들에 의해 시조 왕검의 옛터라는 전승이 내려온 것이다. 그래서 <삼국지> 예전에서는 3세기에도 그 곳을 '지금의 조선(今朝鮮)' 지방이라고 칭하고 있다.

여러 국내외 문헌을 보면 지나의 혼란을 피해 많은 유이민들이 대거 조선과 진국(낙랑국)으로 망명해 온다. 일찍이 기자 일족들이 조선으로 동래한 기록을 시작으로, 진-한 교체기에는 연(燕) 출신의 위만(衛滿)과 연.제.조 유이민의 망명이 확인된다.

위만조선의 왕실이 연(燕)출신이고, 다수의 구성원이 한인(漢人) 망명객들로 채워짐으로 하여 기원전 2세기부터 요서 일대는 한식 문화 색채가 짙어지게 된다. 이렇게 대륙의 유이민 파동은 조선에만 머물지 않고, 진국(낙랑국)으로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위만의 역성혁명으로 준왕세력은 한지(韓地)로 이주하였고, 기원전 2세기 말에는 위만조선의 우거왕과 갈등하던 조선상 역계경의 무리 2천 여호가 진국으로 망명한다. 한(漢)의 침략으로 위만조선이 붕괴되었을 때에도 그 군현지배를 피하여 많은 수의 유민들이 들어왔다.

그래서 평양 지역에 왕씨와 한씨가 유력한 세력 집단으로서 자리한다. 위만조선에도 장군 왕겹과 조선상 한음이라는 인물들이 있었다. 평양의 낙랑국 유적지에서는 왕부, 왕평, 왕의, 왕잡 등 왕씨의 인명이 많이 나타나고, 한씨를 표기한 유물도 많이 있다.

위만조선의 지배층과 낙랑국의 지배층의 성씨가 일치하는 것은 그들이 시기를 선후하여 낙랑국으로 합류했기때문이다. 일본의 <신찬성씨록> 미정잡성조(未定雜姓條)에 "필씨(筆氏)"에 관한 기록이 나오는데 '(필씨는) 연(燕) 상국(相國) 위만(衛滿) 공(公)의 후예이다. 붓을 잘 만들어서 선비들과 어울렸다. 그래서 필씨 성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위만조선의 왕족 후예가 낙랑국(진국)으로 이주해 왔고, 그 후 고구려가 망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이주민과 관련하여 정백동 1호분에서 나온 부조예군(夫租濊君)의 은도장이 주목된다. 단단대령(의무려산) 이동에 있던 부조예의 수장인 예군은 기원전 1세기경 어느 시점엔가 낙랑국(진국)으로 귀부한 것으로 여겨진다. 정백동2호분에서는 “부조장인(夫租長印)”과 “고상현사인(高常賢私印)”, “영시(永始)3년(BC14)”이 새겨진 일산(日傘)대가 수습되었다.

낙랑군 25개현 중 하나인 부조현의 장(長)이였던 고상현이 AD30년 동부도위가 폐지된 후 그도 역시 낙랑국(진국)에 내부하여 평양으로 옮겨와 살다가 묻혔던 것이다. 귀틀묘의 무덤 양식에 칠기, 장신구, 동경(銅鏡) 등 다수의 한식 유물이 부장되어 있는데다가, 세형동검과 동검집, 그리고 화분형토기(花盆形土器)와 단경호(短頸壺)의 조합관계를 보이는 토기 등 토착문화적 요소도 동반하여 나온다. 현장(縣長)의 지위로 보아 토착화된 한인(漢人) 출신일 것이다.

한(漢)에서는 태수와 현장(縣長)은 본현(本縣) 출신은 물론 본군(本郡) 출신까지도 임용에서 제한되는 회피제(回避制)가 적용되었고, 관리가 임지(任地)에서 죽더라도 고향으로 돌아가 묻히는 귀장제(歸葬制)가 준수되었음으로 현장의 무덤이 변군(邊郡)의 임지에 존재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군현책임자인 그가 평양에 묻힌 것만 보아도 낙랑군 평양설은 성립될 수 없음이 자명하다.

낙랑국(진국)은 대외 교역이 활발했다. 한적(漢籍)에는 진국이 한(漢)의 군주에게 서신을 보내고자 하였으나 위만이 교역로를 차단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차단하기 이전에는 활발히 교역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석암리9호분에서 수습 된 유물 중에는 따뜻한 술을 담는 용기인 청동 온주준(溫酒樽), 대모 장식 등 부장품 상당수가 남중국이나 월남 등에서 가져온 것이었고, 이 무덤의 대표적인 유물로 알려진 금제허리띠는 차이나에서는 발굴 사례가 없는 흉노계 유물이다. 이 당시 대륙과 해양을 넘나들며 폭넓은 교역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면 이 무덤의 피장자는 누구였을까? 피장자의 허리 부분에 귀한 금제허리 띠고리를 차고, 왼손에는 옥돈(玉豚)을 쥐고, 오른손에는 황제에게만 붙힐 수 있는 ‘永壽康寧(영수강령)’이라는 길상구가 새겨진 옥인(玉印)이 놓여 있는 등 화려한 껴묻거리가 나오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칠기쟁반에 새겨진 “거섭(居攝) 3년(8)”이라는 연대와 당시의 정세를 고려할 때 아마도 낙랑왕 최리의 선대왕의 능(陵)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이들 이주민과 관련하여 정백동 1호분에서 나온 부조예군(夫租濊君)의 은도장이 주목된다. 단단대령(의무려산) 이동에 있던 부조예의 수장인 예군은 기원전 1세기경 어느 시점엔가 낙랑국(진국)으로 귀부한 것으로 여겨진다. 정백동2호분에서는 “부조장인(夫租長印)”과 “고상현사인(高常賢私印)”, “영시(永始)3년(BC14)”이 새겨진 일산(日傘)대가 수습되었다.

낙랑군 25개현 중 하나인 부조현의 장(長)이였던 고상현이 AD30년 동부도위가 폐지된 후 그도 역시 낙랑국(진국)에 내부하여 평양으로 옮겨와 살다가 묻혔던 것이다. 귀틀묘의 무덤 양식에 칠기, 장신구, 동경(銅鏡) 등 다수의 한식 유물이 부장되어 있는데다가, 세형동검과 동검집, 그리고 화분형토기(花盆形土器)와 단경호(短頸壺)의 조합관계를 보이는 토기 등 토착문화적 요소도 동반하여 나온다. 현장(縣長)의 지위로 보아 토착화된 한인(漢人) 출신일 것이다.

한(漢)에서는 태수와 현장(縣長)은 본현(本縣) 출신은 물론 본군(本郡) 출신까지도 임용에서 제한되는 회피제(回避制)가 적용되었고, 관리가 임지(任地)에서 죽더라도 고향으로 돌아가 묻히는 귀장제(歸葬制)가 준수되었음으로 현장의 무덤이 변군(邊郡)의 임지에 존재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군현책임자인 그가 평양에 묻힌 것만 보아도 낙랑군 평양설은 성립될 수 없음이 자명하다.

낙랑국(진국)은 대외 교역이 활발했다. 한적(漢籍)에는 진국이 한(漢)의 군주에게 서신을 보내고자 하였으나 위만이 교역로를 차단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차단하기 이전에는 활발히 교역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석암리9호분에서 수습 된 유물 중에는 따뜻한 술을 담는 용기인 청동 온주준(溫酒樽), 대모 장식 등 부장품 상당수가 남중국이나 월남 등에서 가져온 것이었고, 이 무덤의 대표적인 유물로 알려진 금제허리띠는 차이나에서는 발굴 사례가 없는 흉노계 유물이다. 이 당시 대륙과 해양을 넘나들며 폭넓은 교역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면 이 무덤의 피장자는 누구였을까? 피장자의 허리 부분에 귀한 금제허리 띠고리를 차고, 왼손에는 옥돈(玉豚)을 쥐고, 오른손에는 황제에게만 붙힐 수 있는 ‘永壽康寧(영수강령)’이라는 길상구가 새겨진 옥인(玉印)이 놓여 있는 등 화려한 껴묻거리가 나오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칠기쟁반에 새겨진 “거섭(居攝) 3년(8)”이라는 연대와 당시의 정세를 고려할 때 아마도 낙랑왕 최리의 선대왕의 능(陵)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평양 석암리9호분 부장품(국립중앙박물관 선사고대관). 낙랑국 사람들이 남긴 무덤 중에 가장 화려하고 다양한 껴묻거리가 묻힌 대표적인 고분이다. 출토된 부장품들을 보면 한(漢) 뿐만 아니라 먼 남방과 북방유목민들과도 교역을 가졌던 것을 알 수 있다. 차이나의 어느 지역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니, 낙랑국(진국)이 정치.경제적으로도 매우 발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칠기쟁반에 새겨진 ‘居攝(거섭)3年(8)銘’ 연호를 고려할 때 아마도 최리왕의 선대왕(先大王)의 무덤이 아닐까 추측된다. 그런데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지금도 낙랑군의 무덤으로 소개하고 있다. 하루 속히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낙랑국은 자명고설화가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쉽게 정복할 수 있는 소국이 아니였다. 그래서 고구려는 치밀한 모략을 동원하여 점차적으로 낙랑국을 소멸시켜 나갔다. 일단 32년에 최리왕의 항복을 받아내긴 했지만 곧바로 사직을 붕괴시키지 못하고, 37년에 가서야 완전히 병합이 이루어지고 있다.

아마도 낙랑국을 부용하던 제국(諸國)들의 동의가 필요했기때문일 것이다. 진국은 제국(諸國)의 간(干)들의 공립(共立)에 의해 진왕이 옹립되는 체제였다. 이 당시 비록 진왕위는 마한에게 넘어간 상황이였지만, 낙랑국 최씨왕가는 ‘옛진국(古之辰國)’을 주도하던 명성을 지닌 왕실이였기에, 여전히 그 주변 일대 몇몇 제국(諸國)의 간(干)들은 그를 공동의 왕으로 인정하며 따르는 형편이였을 것이다.

이 “국(國)”들이 북한 학계가 언급한 안평국, 황룡국, 대방국 등이였을 터이다. 고구려는 이들을 회유하며 고구의 편으로 만드는데 5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분위기가 조성되자 마침내 37년에 낙랑국을 완전히 정복하였다. 이때 고구려왕은 옛진국의 낙랑왕이 지녔던 ‘진왕(辰王)’의 승계자를 자임하며, 어느시점엔가 ‘태왕(太王)’호를 칭했을 터이다. 훗날 신라가 고구려처럼 ‘태왕’호를 칭하고, 백제가 ‘건길지(鞬吉支)’를 칭한 것은, 바로 삼국간에 (삼한)진왕의 적통 및 정통성을 차지하려는 경쟁의 일면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낙랑국이 멸망하는 1세기 전반기 이래로 고구려의 평양지방 경영을 뒷받침하는 기사들이 나온다. 태조왕 3년(55) 조에 '가을 8월에 나라의 남쪽에 메뚜기떼의 피해가 심했다', 태조왕 10년(62) 조에도 '나라의 남쪽에 메뚜기 떼가 날아와 곡식을 해쳤다'고 한다. 여기서 "나라의 남쪽(國南)"은 지금의 서북한일대로 보아야 한다. <증보문헌비고>와 <조선왕조실록> 등에도 고려, 조선시대에 서해를 건너온 황사와 메뚜기떼의 피해가 평야가 많은 서북한일대를 휩쓸었다는 기록이 나오는 바, 태조왕대 황충의 피해를 입은 지역은 평양일대가 확실한 것이다.

그리고 태조왕 62년(114) 조의 '가을 8월 왕이 남해(南海)를 순수하고 겨울10월 남해에서 돌아왔다'는 기록도 보인다. 여기서 남해는 "발해(渤海)" 혹은 압록강 어귀의 "서조선만" 혹은 "경기만" 등 몇 곳을 상정해 볼 수 있는데, <고려사> 지리지를 보면 황해도 '해주는 본시 고구려 내미홀인데...태조가 군이 “남쪽으로 큰 바다에 임하고 있다(南臨大海)”고 하여 해주(海州)라고 명명하였다'고 한다. 해주에서 남쪽의 임한 큰바다는 경기만이니, 바로 그 곳이 고구려시대 남해일 것이다.

또한 고국천왕 16년(194)에 시행된 진대법은 고구려가 평양 지방 영유를 입증해 주는 좋은 사료가 된다. <삼국지>에는 고구려의 형편을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넓은 들은 없고...좋은 전지(田地)가 없으므로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도 식량이 충분하지 못하다'고 기록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국천왕 전후로 확보된 농업 지대로는 서북한의 재령평야의 곡창지대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이 지역을 대상으로 수취체제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기에 봄에 관곡을 빌려 주고 가을에 되갚게 하는 진대법이 시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으로서 고구려의 평양 지방 경영이 서기전 2세기 말에는 굳건하게 자리를 잡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평양 지방 경영의 실적 위에서 고구려는 반세기 후, 동천왕 21년(247)에 위(魏)의 침략으로 환도성이 불타자 급히 수도를 평양성으로 옮길 수가 있었다.

이 평양이 오늘날 북한 평양인 것은 중천왕 4년(251) 투기사건에 연루된 후궁을 곧장 평양과 인접한 서해(西海) 바다에 수장시키는 것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만약 서북한일대에 낙랑군이 위치했다면 고구려는 서조선만(西朝鮮灣)으로 가는 길이 차단되어 후궁을 서해로 끌고 갈 수 없었을 터이다. 그리고 미천왕 3년(302)에는 현도군을 공격하여 그 포로 8천을 평양으로 이치시키는 기사도 나온다.

이때 데려온 포로와 관련하여 평양역 구내 전실묘에서 “영화(永和)9年(353) 7月3日 요동.한.현도태수령.동리조(遼東韓玄菟太守領冬利造)”라는 명전(銘塼)이 나옴으로 하여 302년 고구려 미천왕이 현도군에서 포로로 잡아온 사람들 중에는 현도태수와 동리라는 전장(塼匠)도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포로민을 이치시킨 평양은 지금의 북한 평양이 분명하다.

소위 낙랑고분으로 알려진 평양고분은 고구려의 서북한 경영 내지는 지배의 직접적인 증거가 된다. 일제하에 발간된 ⌜조선고적도보⌟에는 대동강 하류의 평양일대에서 발견된 고구려 초기 적석총(積石塚)이 총 32기가 확인되었고, 대동강 이남의 사동과 그 부근의 당산동에도 몇기의 적석총이 분포되어 있다고 한다.

아즈마유기오(東潮)는 이것들을 9개의 유형으로 나누고, 그 중에서 대성산과 만달산 일대의 적석총들은 2~4세기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고, 기단 적석총은 2~3세기대, 방단 적석총은 3세기대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북한이 해방후 3천여기에 가까운 평양고분을 발굴 조사하여, 고구려 석실봉토분의 축조연대가 3세기 전반기에 해당한다고 추정하였다. 평양에 낙랑군(BC108~AD313년)이 420년동안 존속했다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음이 고고학적으로도 증명된다.

▲ 평양지역의 적석총(조선고적연구회. 古蹟調査報告-昭和十一年度 1937). 대일항전기 일제는 평양일대의 고분을 파헤쳐 고구려 초기의 적석총(돌무지무덤)을 발견하고 조선고적도보에 실어 놓았다.


또한 한식묘제로 알려진 전실묘(塼室墓 벽돌무덤 2C~3C중엽)에서는 고구려의 영향으로 벽돌과 벽돌 사이를 석회로 메꾸거나, 회반죽으로 미장을 하였던 흔적과 회벽의 일부가 나오기도 하는 등, 벽체 사이를 이어주는 재료로 석회를 사용하고 있다. 또한 전실묘 중에 이마돌과 돌천정을 한 것은 고구려 석실분의 영향이고, 관못을 사용한 관(棺)도 고구려의 영향이다.

그 외에 중단리1호분에서 나온 도끼날형 쇠화살촉을 비롯하여 시루, 버치, 목이 길고 배가 둥실한 검은색 또는 밤색의 그릇들 또한 고구려 분묘에서 출토되는 것으로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목곽분에 이어 기원전 1세기에서 3세기동안 귀틀묘와 전실묘(專室墓)에서 한식문화와 토착문화가 동반하거나 융합된 행태의 문화요소가 나온다.

이러한 묘제와 유물들은 낙랑국(진국)계 귀족과 망명한 위만조선계 호족, 포로로 잡혀 온 한군현 관인출신 그리고 고구려가 파견한 유력자들의 것이며, 특히 유물들은 교역을 통해 흘러들어온 것이 분명하다. 고구려는 낙랑국을 정복한 이후 재지세력의 기득권을 보호하며 그들에게 최대한 자치를 허여했던 것으로 보이고, 한군현 포로민들의 수장들까지도 그들이 자칭하는 관호(官號)를 그대로 용인해 주는 한편, 고구려의 관직도 하사하면서 동화, 포섭해 나갔던 것이다.

좌측, 고구려 보성리무덤(3세기 전반). 북한 평양시 락랑구역 보성리에서 나온 서기3세기경 고구려벽화무덤 전경. 덕흥리 고분벽화처럼 찰갑으로 무장한 개마무사(鎧馬武士) 행렬도가 그려져 있다고 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조 철갑기병 동원 기록이 사실임을 밝혀주고 있다. 이 무덤을 통해 AD200년대 이미 고구려에 의한 평양경영을 확실하게 확인시켜 준다. 우측, 보성리무덤에서 수집된 금관장식과 은(銀)관못. 유물들 중에는 위와 같이 금조각 장식품도 나왔으나, 방울도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끌고있다. 방울은 통상 무당이 사용하는 무구(巫具)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1세기 전반기 이래로 고구려의 평양 경영이 너무나도 자명하기에 대일항전기에 일제 식민사학자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와 같은 자는 북경 유리창가에서 한대(漢代) 낙랑유물을 고가에 사드려 조선총독부에 기증을 하였고, 우연을 가장하며 온갖 사들인 차이나 유물과 위조품들을 평안도 일대 이곳 저곳에 파묻어 두고 낙랑군 유물들을 발견했다며 위증(僞證)을 늘어 놓았다.

*낙랑군평양설을 입증한다는 효문묘동종, 점제현신사비는 SBS스페셜에서 전문가들의 과학적 분석을 통해 위조품으로 밝혀졌고, 초원4년현별호구부 목간도 명사+접미사 용법으로 꾸며진 “현별(縣別)”이라는 단어는 근대 이전 한중일 그 어떤 문헌에도 찾을 수 없는, 메이지유신 이후의 일본식 단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럼으로 더 이상 낙랑군평양설을 운운하는 자는 제대로 된 학자로 볼 수 없게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여기저기 낙랑으로 불리는 정치체의 활동상이 기록되어 있다. 최씨낙랑국이 37년에 고구려에 최종 멸망 당하자, 44년 후한 광무제가 바다를 건너와 낙랑을 치고 군현을 삼아 살수이남이 한(漢)에 속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살수가 선학들의 연구에 따르면 청천강이 아니라 요동반도에 있는 하천으로 밝혀지고 있는 고로, 후한이 요동반도 남단의 낙랑국 고지 일부를 차지하여 군현을 증설한 것이였다.

신라와 관련된 낙랑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기원전 28년과 기원후 4년에 신라를 침입해 오는 낙랑, 14년에 왜인의 침략으로 신라 내부가 혼란한 틈을 타 침입해 오는 낙랑, 36년 신라 북변을 침입한 낙랑이고, 37년에 신라에 귀순해 오는 낙랑유민이다.

이들은 평양의 낙랑국(진국)이 분명하다. 300년에 항복해 오는 낙랑-대방 양국은 지방에 남아 있던 낙랑국(진국)유민들의 정치체로 보인다. 서기40년 화려현과 불내현의 군사들이 기병으로 신라를 침공하는 사건은 북진시일대에 있던 영동예(嶺東濊)의 이주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백제가 기원전 14년과 11년, 8년에 만나는 낙랑은 낙랑태수의 사신이 등장함으로 얼핏보면 평양에 낙랑군이 있었던 것처럼 착시현상을 불러 일으킨다. 하지만 선학들의 치밀한 연구로 낙랑군은 분명히 요서에 있었고, 확장 증설된 군현이 겨우 요동반도 남단에 소재했을 뿐이다. 백제가 만나는 낙랑군은 그 방위에 있어서도 남북 방향이 아니라 동서 방향으로 나타나고 있다.

'온조왕 13년(B.C. 6) 여름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나라의 동쪽에는 낙랑(樂浪)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靺鞨)이 있어 번갈아 우리 강역을 침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분서왕 7년(304) 봄 2월에 몰래 군사를 보내 낙랑의 서쪽 현(縣)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겨울 10월에 왕이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는 이러한 기사는 백제가 분명 서쪽에 있고, 낙랑군은 동쪽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따라서 위에 기사는 한적(漢籍)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는 요서백제와 관련된 기사가 분명하다.

▲SBS드라마 ‘자명고’의 낙랑공주. ​고대사회에서 북은 하늘의 소리를 전하는 종교적 신성물이었다. 낙랑국에는 적의 침입이 있을 경우 스스로 울려 미리 방비토록 하는 신성한 북, 自鳴鼓(자명고)가 있었다. 최리왕은 고구려 호동왕자를 옥저에서 만나 그를 사위로 맞이하려고 했다. 부왕으로부터 호동왕자를 소개받은 낙랑공주는 이내 사랑에 빠진다. 고구려로 돌아간 호동은 공주에게 무기고에 있는 자명고를 부수면 예로써 맞을 것이라고 알렸다. 공주는 조국보다 사랑을 택하여 자명고를 찢어 그 울림을 잠재움으로 고구려의 급습을 받게 된다. 부왕은 공주의 소행임을 알고 그녀를 참한 후에 고구려에 항복하게 된다. 낙랑공주의 순애보(殉愛譜)는 비극으로 끝나고 만다. 공주를 꾀었던 호동왕자도 훗날 원후(元后)로부터 억울한 누명을 얻어 자결로써 생을 마감한다. 최리왕이 고구려와의 혼인동맹을 원했던 건 고구려의 힘을 빌려 상실했던 옛진국의 주도권을 회복하려고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평양일대에 있었다는 낙랑국이 한적(漢籍)에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때문인가. 대외적으로는 진국으로 알려졌기 때문이고, 마한(馬韓)이 후기진국(한국)을 주도하는 시점에는 이미 주변세력으로 밀려나 있어기에 주목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하지만 비록 낙랑국은 어느시점엔가 세가 약화되어 주변부로 밀려나 있었지만, 한때 옛진국을 주도하던 세력이였다는 자부심으로 하여 진왕위(辰王位)를 언젠가는 회복하고자 염원하였다.

최리왕이 고구려와 혼인동맹을 추진한 것은 고구려의 남하를 저지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보다 적극적으로는 고구려의 힘을 빌려 다시 옛진국의 영광을 되찾고자 하는 의지에서 이루어진 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계획이 오히려 화근이 되어 최리왕은 나라를 잃고 말았던 것이다. 옛진국의 질서를 회복하려던 그의 꿈은 수포로 돌아갔으나 이러한 그의 염원은 또다른 낙랑세력인 신라가 삼한일통을 실현함으로써 이루어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