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종성(미스바채플 목사)

​단군의 나라 군자국은 낙랑국(진국)으로 발전

최리왕은 옛진국의 영광을 회복하고자 고구려와 혼인동맹 시도

사료는 1세기 전반기 이래로 고구려의 평양경영 보여줘

제대로 된 학자라면 낙랑군평양설(BC108~AD313) 주장할 수 없어

▲평양 낙랑박물관. 북한은 2022년도 평양시 낙랑구역 통일거리에 새로 낙랑박물관을 건립하여 낙랑국의 여러 종류의 유적과 유물 등을 전시하고 있다. 북한은 해방 후 3천여기 고분들을 발굴하여 고조선유민들이 세운 낙랑국의 역사성이 고고학적으로 뒷받침된다고 발표했다.


<삼국사기>에는 한(漢)의 낙랑군과는 다른 최리의 낙랑국이 등장한다. 이 낙랑국의 기원과 관련하여 먼저 고조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삼국유사>는 기자(箕子)가 조선으로 오기 전에 '(단군이) 장당경(藏唐京)으로 천도했다'고 하면서, BC13세기경에 요동과 서북한으로 동천한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 나라를 <산해경>과 <후한서>는 선인(仙人)이 사는 이상향이라는 의미에서 군자국(君子國)으로 기록하고, <사기>는 진국(辰國)으로 소개한다. 단군(壇君)이 장단경으로 옮겨온 이후 제정(祭政)이 분리되고 큰나라로 발전하면서 국호가 진국으로 불리게 되었을 것이다. 진국은 제국(諸國)의 간(干)들이 각기 자신들의 “국(國)”을 지닌 상태에서 가장 강대한 세력의 수장을 진왕(辰王)으로 옹립하여 상위의 국가를 건립하고, 그 권위에 통속하는 형태를 취하는 봉건제적 성격을 지닌 연합국가였다.

그런데 이 진국이 성립되는 초기에 진왕을 배출한 세력이 낙랑국으로 보인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여러 사료를 통해서 확인된다. 신라는 조선유민으로서 진한을 모태로 하여 성립된 국가로서 <삼국지>에 진한이 (요동과 서북한의) 낙랑을 ‘아잔(阿殘)’ 즉 "남아있는 우리"라고 칭하고 있다.

이것은 진한이 경상도로 이주하기 이전에는 진한과 낙랑이 한 세력이였던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진한은 옛 진국이라'고 하니, 옛진국시절에 진한과 낙랑은 함께 세력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진국, 진왕, 진한이 모두 '진(辰)'자가 들어가는 것을 보면 옛 진국이 성립할 당시에는 낙랑국(진한)이 주도세력이였던 것을 능히 유추할 수 있다.

혹자는 여기서 진한은 진(秦)의 난리를 피해 온 자들이고, 낙랑은 낙랑군으로 보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에서는 분명하게 ‘난을 피하여 이주한 중국인이 진한과 더불어 섞여 사는(與辰韓雜居)' 것에 불과하며, <삼국지>에도 진한인은 '동방인(東方人)'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또한 “예(濊)”는 고조선을 구성하던 종족인데 <삼국지>는 그곳에 ‘낙랑단궁(樂浪檀弓)’이 산출된다고 기술한다. 따라서 ‘예’가 ‘낙랑’으로도 불리웠던 것이니, 예족의 나라인 고조선의 이칭이 낙랑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신라의 토착어식 왕호와 인명, 고유의 문화적 요소, 특히 1대 혁거세 '거서간(居西干)'이라는 왕칭이 간 중에 간, 즉 진왕과도 연결되고, 2대 남해 ‘차차웅(次次雄)’의 왕칭이 “사제-임금”의 의미를 지닌 ‘단군왕검’과도 그 의미가 통하는 바이니, 신라의 모태가 일정부분 한화된 위만조선유민보다는 왕검조선유민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된 국가임을 알 수 있고, 이 신라의 모태인 진한과 기원을 함께 하는 낙랑국도 왕검조선의 후신임이 분명한 것이다.

그런데 <요사>에는 진한의 원위치가 요동으로 나온다. 진국(낙랑국)이 성립할 당시에는 요동 일대에 그 중심지가 있었고, 어느 시점엔가 평양 일대로 옮겨간 것이다.

낙랑국의 위치와 관련하여 최리왕이 고구려 호동왕자를 옥저에서 만나 '그대는 북국신왕(北國神王)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우리는 낙랑국이 고구려의 남쪽에 있었다는 정보를 얻게 된다. 1세기 당시 고구려는 기존 통설대로 보자면 압록강.동가강 유역에 있었고, 신라는 대체로 지금의 강원도 일부와 경상좌도에 있었다.

신라가 진한 6국의 연합으로 세워졌고, 점차 12국으로 늘어났다는 기록에서 강원도 일부와 경북 일대에 있던 소국들이 연합하여 신라 6부로 편입된 것이다. 후대 일이긴 하지만 기림이사금 3년(300) 조를 보면 이미 신라 왕이 비열홀(比列忽)로 순행하고 있다.

일찍이 신라의 강역이 강원도 안변일대까지 진출해 있었던 것이다. 식민사관의 학맥을 계승한 학자들은 이 기록을 믿을 수 없다고 무시하나, 비열홀 지역에 있던 한 소국이 국초부터 신라 6부의 일원으로 동참했다고 이해한다면 믿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두 사람이 만난 장소도 동옥저가 아니라 요동의 원)옥저 지역에서 만나고 있다. 따라서 낙랑국은 고구려와 신라의 중간 지대에 있었고, 강원도 북부보다는 그 중심지는 평양 일대로 보아야 할 터이다. 진국의 면적이 '방4천리(方四千里)'라고 하는 기록을 고려하면 요동과 평양은 낙랑국(진국)의 중심지이고, 그 외 만주와 한반도 일대는 주변부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위만조선과 진국의 위치도(출처. 고대사TV). <위략>에는 위만조선의 ‘東之辰國(동쪽의 진국)’이 있다고 한다. <삼국지>는 ‘진한이 옛진국이라’고 하며, <후한서>는 ‘삼한이 옛진국이라’고 한다. 그리고 진왕, 진한, 진국이 모두 “辰(진)”이 들어감을 고려할 때 진국이 성립할 당시에는 진한(낙랑국)이 주도권을 쥐었고, 후기에는 마한에서 진왕을 배출하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강경구는 낙랑국이 최소 다섯 개 정도일 것으로 보았는데 요동의 최씨낙랑국, 평양의 왕씨낙랑국, 춘천의 낙랑국, 영천의 낙랑국, 경주의 사로국(낙랑국) 등이 있다고 했지만 동일한 국명을 가진 나라가 여러 곳에 있을 수 없기에, 경주의 사로국을 제외하고, 여기저기 등장하는 낙랑은 모두 낙랑국(진국)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러시아의 유 엠 부찐은 서기전 2세기 초에 고조선의 유물 영역이 평양과 요동지방에까지 뻗치고 있어서 그 당시 영역을 짐작케 한다고 하였다. 선학들의 연구에 따르면 위만조선은 분명 요서에 있었으니, 그가 언급한 고조선은 왕검조선의 후신인 낙랑국의 유물 영역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터이다.

<삼국사기> 동천왕조에 '평양은 본시 선인 왕검의 옛터'라고도 밝히고 있으니, 평양 지방에 왕검조선의 후예들이 대거 이주 정착하였기에 그들에 의해 시조 왕검의 옛터라는 전승이 내려온 것이다. 그래서 <삼국지> 예전에서는 3세기에도 그 곳을 '지금의 조선(今朝鮮)' 지방이라고 칭하고 있다.

여러 국내외 문헌을 보면 지나의 혼란을 피해 많은 유이민들이 대거 조선과 진국(낙랑국)으로 망명해 온다. 일찍이 기자 일족들이 조선으로 동래한 기록을 시작으로, 진-한 교체기에는 연(燕) 출신의 위만(衛滿)과 연.제.조 유이민의 망명이 확인된다.

위만조선의 왕실이 연(燕)출신이고, 다수의 구성원이 한인(漢人) 망명객들로 채워짐으로 하여 기원전 2세기부터 요서 일대는 한식 문화 색채가 짙어지게 된다. 이렇게 대륙의 유이민 파동은 조선에만 머물지 않고, 진국(낙랑국)으로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위만의 역성혁명으로 준왕세력은 한지(韓地)로 이주하였고, 기원전 2세기 말에는 위만조선의 우거왕과 갈등하던 조선상 역계경의 무리 2천 여호가 진국으로 망명한다. 한(漢)의 침략으로 위만조선이 붕괴되었을 때에도 그 군현지배를 피하여 많은 수의 유민들이 들어왔다.

그래서 평양 지역에 왕씨와 한씨가 유력한 세력 집단으로서 자리한다. 위만조선에도 장군 왕겹과 조선상 한음이라는 인물들이 있었다. 평양의 낙랑국 유적지에서는 왕부, 왕평, 왕의, 왕잡 등 왕씨의 인명이 많이 나타나고, 한씨를 표기한 유물도 많이 있다.

위만조선의 지배층과 낙랑국의 지배층의 성씨가 일치하는 것은 그들이 시기를 선후하여 낙랑국으로 합류했기때문이다. 일본의 <신찬성씨록> 미정잡성조(未定雜姓條)에 "필씨(筆氏)"에 관한 기록이 나오는데 '(필씨는) 연(燕) 상국(相國) 위만(衛滿) 공(公)의 후예이다. 붓을 잘 만들어서 선비들과 어울렸다. 그래서 필씨 성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위만조선의 왕족 후예가 낙랑국(진국)으로 이주해 왔고, 그 후 고구려가 망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이주민과 관련하여 정백동 1호분에서 나온 부조예군(夫租濊君)의 은도장이 주목된다. 단단대령(의무려산) 이동에 있던 부조예의 수장인 예군은 기원전 1세기경 어느 시점엔가 낙랑국(진국)으로 귀부한 것으로 여겨진다. 정백동2호분에서는 “부조장인(夫租長印)”과 “고상현사인(高常賢私印)”, “영시(永始)3년(BC14)”이 새겨진 일산(日傘)대가 수습되었다.

낙랑군 25개현 중 하나인 부조현의 장(長)이였던 고상현이 AD30년 동부도위가 폐지된 후 그도 역시 낙랑국(진국)에 내부하여 평양으로 옮겨와 살다가 묻혔던 것이다. 귀틀묘의 무덤 양식에 칠기, 장신구, 동경(銅鏡) 등 다수의 한식 유물이 부장되어 있는데다가, 세형동검과 동검집, 그리고 화분형토기(花盆形土器)와 단경호(短頸壺)의 조합관계를 보이는 토기 등 토착문화적 요소도 동반하여 나온다. 현장(縣長)의 지위로 보아 토착화된 한인(漢人) 출신일 것이다.

한(漢)에서는 태수와 현장(縣長)은 본현(本縣) 출신은 물론 본군(本郡) 출신까지도 임용에서 제한되는 회피제(回避制)가 적용되었고, 관리가 임지(任地)에서 죽더라도 고향으로 돌아가 묻히는 귀장제(歸葬制)가 준수되었음으로 현장의 무덤이 변군(邊郡)의 임지에 존재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군현책임자인 그가 평양에 묻힌 것만 보아도 낙랑군 평양설은 성립될 수 없음이 자명하다.

낙랑국(진국)은 대외 교역이 활발했다. 한적(漢籍)에는 진국이 한(漢)의 군주에게 서신을 보내고자 하였으나 위만이 교역로를 차단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차단하기 이전에는 활발히 교역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석암리9호분에서 수습 된 유물 중에는 따뜻한 술을 담는 용기인 청동 온주준(溫酒樽), 대모 장식 등 부장품 상당수가 남중국이나 월남 등에서 가져온 것이었고, 이 무덤의 대표적인 유물로 알려진 금제허리띠는 차이나에서는 발굴 사례가 없는 흉노계 유물이다. 이 당시 대륙과 해양을 넘나들며 폭넓은 교역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면 이 무덤의 피장자는 누구였을까? 피장자의 허리 부분에 귀한 금제허리 띠고리를 차고, 왼손에는 옥돈(玉豚)을 쥐고, 오른손에는 황제에게만 붙힐 수 있는 ‘永壽康寧(영수강령)’이라는 길상구가 새겨진 옥인(玉印)이 놓여 있는 등 화려한 껴묻거리가 나오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칠기쟁반에 새겨진 “거섭(居攝) 3년(8)”이라는 연대와 당시의 정세를 고려할 때 아마도 낙랑왕 최리의 선대왕의 능(陵)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