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석현장(역사연구가, 스님)
이괄 난으로 피난처 필요성 느껴 남한산성 축조
전국 승려 동원 산성 쌓고 군 기지화, 수비 맡겨
해발 5백미터 이상 고지에 무거운 돌 운반해 쌓아
산성 공역 임금 대신 승려 자격 인정하는 도첩 줘
일제 남한산성 내 사찰과 군사시설 모두 불태워
김훈의 역사소설 "남한산성"이 60만부 이상 팔리고 영화관객은 350만명이 넘어섰다.
임금 한푼 받지않고 개고생하면서 남한산성을 쌓은 조선의 스님들은 어떤 대접을 받았을까?
남한산성의 270년역사는 수도경비사령부 역할을 맡았던 조선승군의 역사이다.
- 남한산성과 벽암각성대사 이야기 -
남한산성을 그린 옛 지도이다. 8킬로미터가 넘는 성벽 안에 행궁이 있고 아홉개의 사원이 표시되어 있다.
인조반정을 통하여 광해군을 내쫓고 왕위에 오른 인조는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궁궐에서 도망치는 치욕을 당하였다.
한양 인근에 확실한 피난처가 필요했다. 임진왜란을 겪고 청나라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서 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행궁을 건립하였다. 인조 4년의 일이다.
당시 축성한 행궁의 둘레만도 8킬로미터가 넘는다. 해발 500미터 이상의 고지에 무거운 돌을 옮겨서 아름답고 튼튼한 성을 쌓은 주인공들은 누구였을까?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며 국고가 텅 비고 백성이 궁핍한 가운데 경제적 뒷받침과 노동력을 동원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어렵고 힘든 일을 조선 팔도의 승려들이 동원되었다.
조정에서는 임금도 지불하지 않고 각자 사찰에서 양식을 가져와서 뛰어난 석축기술과 건축기술을 발휘하여 산성을 수축하였다.
그리고 동서남북 네 봉우리에 장대를 설치하여 지휘본부를 만들어 내었다. 산성을 쌓고 나니 유지관리가 문제였다.
군량미를 저장하고 무기와 화약을 보관하고 산성을 수비할 임무도 승려들에게 주어졌다. 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하여 남한 산성내에 9개의 사찰이 건립되었다.
조선팔도 각도의 승려들이 머물수 있는 8개의 사찰과 전체를 지휘할수 있는 총사령부 역할을 하는 개원사가 건립되었다. 현재는 망월사 개원사, 장경사, 국청사 네 곳만 남아 있다.
당시 조선 승려들은 한양도성에 발을 들이면 죽임을 당하는 신분이었다. 승려의 자격을 주는 도첩도 폐지했다. 그러나 산성 공역에 동원되면 임금 대신 도첩을 발급해 주었다.
조선불교와 그 당시 활동했던 고승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니 법정 스님 말씀이 떠오른다. 조선 불교사를 잘 정리해 놓으면 그대로 불교 성전이 될 것이다.
불일암에서 나에게 해 주신 말씀이다. 신라, 고려때는 불교가 국교역할을 하면서 승려가 귀족화되고 존경받는 사회였지만 조선시대에는 가장 천민으로 천시받으면서 온갖 공역에 불려 다니면서도 불법을 수행하고 국가와 백성을 구제하는 일에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인조의 요청을 받아 남한산성의 축성을 책임지고 2년만에 완성한 인물이 벽암각성 대사이다. 자료: 석현장
인조의 요청을 받아 남한산성의 축성을 책임지고 2년만에 완성한 인물이 벽암각성 대사이다.
그는 서산, 사명에 이어 8도 도총섭이라는 국가 직책을 받아 전국의 의승군을 통솔하여 산성을 완성했다. 1624년 남한산성이 완성되고 1894년 갑오경장으로 승번제가 폐지되었다.
일제는 1907년 8월 산성의 모든 군수물자를 사찰에 모은 후에 불을 질렀다. 남한산성을 지켰던 9개의 사찰은 불길에 휩싸였고 승군은 해체되었다.
유교를 받들고 불교를 천시했던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을 겪으면서 수도권 방위와 왕실 수호를 승군들에게 의탁했다. 남한산성의 270년 역사는 수도경비사령부 역할을 해왔던 조선 승군의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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