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헌동(김해근대역사위원회 위원장)
문은 옛 가야말로 도, 일본도 문을 도라고 해
고구려, 신라 한자 어순은 주어 목적어 술어
가야 비석에 한자 어순도 주어 목적어 술어
일본어 조상은 고구려 야요이 인이 가져온 것
▲일본 사이마타현 히다카시에 있는 고려신사. 고구려 이주민 약광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일본열도에는 고구려인의 흔적이 상당히 남아 았다(편집인 주)자료: 위키백과
가야 사람들의 말과 글
가야 사람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사람들과 접촉을 하면서 언어 분야에서도 공통성을 가졌다. 특히 신라와 지리적으로 가까워서 관계가 잦았다.
가야 건국 초기 아도간(한), 여도간(한), 피도간(한) 등의 9간(한)이 있었다. 간(한)이란 크다는 뜻과 지도자라는 뜻이 있다.
신라에도 거서간(한), 마립간(한) 등 크다는 뜻을 지닌 지도자가 있었다. 가야와 신라가 같은 말을 사용하였음을 알수 있다.
가야는 건국 초기부터 표의문자인 한자를 사용하였다고 추정된다. 김수로왕 건국 전 BC 1세기 유적인 창원 다호리 고분의 지도자급 묘인 1호분에서 붓 5자루와 손칼이 출토되었는데, 이 붓과 손칼은 연필과 지우개 같은 문방구 역할을 한 것으로 교역할 때 영수증 작성에 사용되었다.
이것은 교류와 교역이 가장 활발했던 가야에서도 일찍부터 글을 쓰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삼국사기> '사다함전'에 가야에서는 '문을 도(돌)'라고 하는 주석을 달았다. 이것은 삼국사기 편찬자가 가야사람들에게 고유하게 쓰이는 방언이 있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양(粱)은 도라는 뜻을 나타내는 이두식 한자표기다. 가야 시대는 받침이 없었기 때문에 돌은 곧 도로 발음되었다.
일본에서 문을 도라고 한 것은 바로 가야 사람들의 일본열도 진출 결과 가야 말이 전해져서 굳어진 것이라고 한다.
가야 사람들은 비석에도 글을 새겼다. 1989년 고령 대가야의 영역이었던 합천군 가야면 매안리의 산기슭에서 글자가 새겨진 비석이 발견되었다.
이 비석은 높이 260cm 너비 55cm 화강암으로 되어있다. 판독되는 글의 내용은 40명의 한지(우두머리)가 한 곳에 모인 회합에서 맹세를 다진 것으로 보인다.
이 글자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와 마찬가지로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쓰는 이두였다.
가야에서의 이러한 말과 글의 사용은 가야의 발전된 문화 수준을 반영한 것이다. 말과 글의 발전, 서사 체계의 정립은 필연적으로 역사기록과 문학발전을 풍부화시켰다.
<가락국기>는 역사기록이자 하나의 구전문학 도서라고 하겠다. 김수로왕의 천손 강림 설화는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있는 동명왕 편을 방불케 하는 우수한 구전문학이다.
<가락국기>에는 '거북이 노래', '홀아비 노래'와 같이 시가 문학에 속하는 몇 편의 시가도 있다.
이것은 가야에서도 사람들의 감정 세계를 노래한 서정적인 시가 문학이 발전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위의 글은 <북한학계의 가야사 연구> 책에 있는 것을 발췌하여 정리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가야사 학계에서도 이런 연구가 많이 나오면 좋겠다.
<삼국사기> '파사이사금조'에 김수로왕의 실존이 나오는 것을 보면,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당시에는 <가락국기>뿐만 아니라 가야에 관련된 역사서도 있었을 것이다.
같은 언어로 출발해도 말은 생명이 있어서 시간에 따라 변한다고 한다. 김영욱 교수는 비석에서 고대 한국어를 추적 연구하였다.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와 백제 무령왕 비석, 신라의 임신서기석 비문을 보니 모두 우리말 어순인 주어 목적어 서술어 순으로 쓰인 한문이 있었다.
삼국어는 말의 뼈대는 같았다고 한다. 합천군 가야면 매안리의 산기슭에서 발견된 가야 시대 비석의 글도 그러하다.
삼국통일 후 약 80년 뒤 경덕왕은 지명을 통일하였다. 그전에 사용했던 지명도 삼국사기 지리지에 나온다.
이것을 연구한 송기중 교수는 700년 동안 다른 나라로 존속한 삼국은 어휘에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김동소 교수는 뿌리가 같은 의사소통이 가능한 방언적 차이라고 한다.
정광 교수는 고구려 말에서 수를 세는 수사를 몇 개 찾았다. 그 수사의 발음이 지금 일본에서 사용하는 수사와 거의 같다는 것을 알아냈다.
홋카이도 대학 마크 허드슨 교수는 일본어의 어원은 한국에서 온 야요이인이 가져온 문화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일본어의 기원은 고구려어라고 본다. 고구려 멸망 무렵 일본에 정착한 약광의 후손들은 고려 신사를 지키면서 지금도 그 족보를 이어가고 있다. 뿌리가 같아도 단절이 되면 말은 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