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정 피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톡까지 도망간 백성

홍기포에는 조선 백성 외에 청나라 백성도 살아

청 정부, 조세 거부 백성 토벌, 조선 정부도 가세

조선 정부, 홍기포 정탐 후 도망간 백성 체포 계획

▲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조선 정부는 폭정을 피해 달아난 백성을 블라디보스톡까지 추격하여 잡아들였다. 지도 좌측 상단의 목단강시는 본 기사에 나오는 영고탑이 있던 곳이다.
▲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조선 정부는 폭정을 피해 달아난 백성을 블라디보스톡까지 추격하여 잡아들였다. 지도 중앙 상단의 무단장시(목단강시)는 본 기사에 나오는 영고탑이 있던 곳이다.

서기 1746년쯤에도 조선 백성들이 나라를 버리고 러시아 땅인 블라디보스톡까지 들어가 산 것으로 나타난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 경흥부 장교 김만빈이라는 사람이 쓴 ‘홍기포정탐기’라는 책에 실려 있다.

이 책은 당시 조선 백성들이 조선의 조세권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도망가서 산 사실을 전한다. 자세한 내용은 전하지 않지만, 최소한 30명 이상이 도망하여 산 것으로 나타난다. 조선 백성이 도망가서 산 홍기포紅旗浦는 현재 블라디보스톡으로 알려져 있다.

유득공이 고운당필기에 이 책 내용을 대강 적어 놓았는데 다음과 같다.

홍기포에는 영고탑 등지의 군민과 객지에서 떠도는 중국 한족들이 섬 안에 숨어들어 삼을 캐고 담비를 잡아 살아가고 있었는데 조선 북방의 백성들도 이 섬에 숨어들어 살았다. 홍기포에는 청나라 사람과 조선 백성들이 섞여 살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정부의 지배를 받지 않아 물산이 풍부해져서 나중에 사람이 불어나 1만 명이나 되었다. 청나라 정부에서 이들이 세금을 내지 않자 군사를 보내 수색하여 토벌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이미 홍기포에 자국민이 이주하여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조선에서는 군사력까지 동원할 정도로 거주 백성이 많지 않았는지 단지 첩자를 보내서 상황을 정탐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다가 청나라의 적극적인 징세 조치와 거부에 따른 토벌정책에 힘입어 조선 정부도 도망친 백성들을 포박하여 본국으로 송환할 의지를 보였다. 이를 위해 홍기포로 직접 정탐부대를 편성하여 영조 22년(서기 1746년 ), 6월 11일에 출발하였다.

정탐부대는 장교 김만빈, 박형만, 남제국, 한시휘, 김영중으로 편성되었고, 여기에 역관 심세강, 이제익과 뱃사공으로 사노비 우랑과 내거 노비 김파 등을 붙였다. 나중에 서수라에서 어사 군관(御史軍官), 병영 비장, 경흥 부사(慶興府使)를 만나기로 하였다.

이때 청나라 영고탑의 우록장경도 병사와 함께 식량을 가지고 홍기포로 가고 있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경계의 눈초리로 여러 가지를 자꾸 물었다. 그래서 “우리도 조선 백성 30여 명이 달아나 홍기포로 들어가 상황 파악을 위해 정탐하러 간다.”라고 하였다.

이후 이들에게 종이, 붓, 먹, 부채, 벼룻집, 놋숟가락, 백미(白米), 염장(鹽漿) 등의 물건을 나누어 주었다. 그랬더니 답례품으로 사슴 가죽과 베로 만든 장막을 우리에게 주었다. 이렇게 경계의 벽을 허물고 공동의 목표를 갖는 우의가 형성되었다.

청나라 정부는 홍기포에서 토벌 작전을 벌였는데 촌락을 불태워 버렸고 도망친 백성 1만여 명 중 자수한 사람이 반이 넘었고 사로잡은 백성은 4백여 명이 되었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깊은 산으로 도망가 숨었다고 하였다. 조선 정탐부대는 도망친 조선 백성들도 사로잡게 되면 조선 국경 지역인 후춘으로 포박하여 보내달라고 청하였다.

7월 13일 두만강 입구로 돌아왔다. 6월 11일 홍기포로 정탐하러 떠난 지 1달하고 2일 만이었다. 돌아왔다는 신호로 횃불을 들고 포를 쏘았고 앞서 만나기로 약속한 대로 서수라 진장이 역시 횃불을 들고 응사하여 정탐 완료를 전하였다.

이 정탐과정에는 6월 12일 두만강을 지나면서 밥을 지어 신에게 기도하였다는 대목도 있다. 이성계 조선은 합리와 이성이 지배하는 성리학의 나라다. 조선의 관리들이 성리학에 의지하지 않고 정탐 여정 상의 안전보장을 우리 토속 신앙인 신에게 의지하였다는 것이 흥미롭다. 여기서 신은 강의 신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