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오세훈(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우르과이 전 대통령, 호세 무히카 별세
독재정권 맞서 투옥 고문 견디며 투쟁
어머니의 “저항하라” 에 영감 얻어 승리
대통령 당선 뒤 청빈, 자연에 따라 정치
집권기간, 가장 안정적이고 포용적 성장
▲호세 무히카 전 우루과이 대통령이 지난 5월 13일 별세했다.
남미가 낳은 인류의 큰 스승
우리의 스승의 날(5월 15일) 이틀 앞두고 인류의 큰 스승 한 분이 이 위태로운 세상을 떠났다. 마음속으로 늘 존경하며 특히 이 나라 정치인들이 그의 반의 반만이라도 본받는다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나라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했던 어른이었다.
그는 인구 340만 명쯤 되는 작은 나라의 정치인으로, 당대 이 세상에서 가장 탁월하고 특별하고 감동적인 인물로 칭송받았다. 모두가 만나고 싶어하는 지도자였다. 그의 정치에는 그의 특별한 인생이 고스란히 투여되었다.
저 멀리 라틴 아메리카 우루과이의 대통령을 역임(2010-2015)한 호세 무히카 선생이다. 1935년생, 돼지띠다. 7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도우며 남달리 일찍이 세상을 배우기 시작했다.
수도 몬테비데오 변두리에서 닭과 토끼를 키우고, 꽃과 채소를 팔아서 먹고 살았다. 그 어린 나이에 생계를 꾸려가면서 틈날 때마다 식물학, 원예, 문학, 역사 서적들을 탐독했다. 훗날,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놀랄만큼 큰 지성을 이루었다.
그는 20살도 되기 전에 무정부주의 운동에 참여하고, 호머의 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 깊이 빠져들었다. 당연히 큰 영향을 받았다. 평생 옆에 놓고 읽으며 인생의 바이블로 삼았다.
이 걸작들을 읽으며 소년기에 이미 인간의 본질, 자유의 가치, 정의와 삶의 의미를 깊이 파고들었다. 2700년 전 고대 그리스 시인과 400년 전 스페인 작가가 호세 무히카의 100년 인생에 동행하며 그의 삶을 고품격 예술작품으로 빚어냈다.
그는 심지어 여섯 발의 총격을 받고도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한 세기를 풍미할 풍운아의 운명이었다. 몬테비데오의 한 맥주집에서 동료와 한 잔 하다가 경찰과 총격전을 벌인 날이었다. 체포되어 수감된 후에는 외부에서 감옥까지 파고들어온 땅굴을 통로삼아 탈옥하고, 다시 잡히면 또다시 탈옥하면서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도시 게릴라의 왕초노릇을 듬직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저항하라"는 어머니의 가르침
1973년, 우루과이에 군사구테타가 일어났다. 지하운동의 동지였던 호세 무히카와 루시아 토폴란스키는 결혼했는데, 독재정권은 무히카와 그의 무장투쟁 조직 ‘투파마로스’의 핵심인사들을 체포하여 지상최악으로 극악한 감옥에 수감시켰다.
군부대 안에 있는 지하공간의 고문실이었다. 군부는 그 부부와 동지들을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였다. 무히카 부부는 12년 넘게 살인적인 고문과 극단적인 고립, 비인간적 처우를 받았다. 잔혹하고 야만적이었다. 그로써 자포자기에 빠져들며 죽어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 어머니가 면회 와서 말했다. “저항하라. 저항해야만 저놈들이 너를 죽이지 못한다.” 그날부터 바로 저항했다. 대우가 달라졌다. 놀라웠다. 때로 어머니는 이렇게 극한상황에 처하여 사경을 헤매는 자식에게 신이고 예언자다.
영화 ‘12년의 밤’은 박정희 전두환 시절, 이 땅에서 이루어졌던 허다한 ‘지옥의 고문실’을 상기시키며 두 시간 내내 몰입하게 하는 탁월한 정치영화다. 극적인 과장기술을 보탤 필요도 없이, 현실이 호세 무히카가 겪은 무간지옥(無間地獄) 그 자체였다.
1985년, 부부는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그후 둘이 일해서 번 돈으로 변두리에 텃밭이 딸린 작은 집을 사서 농부로 살았다. 4년 뒤, 젊어서 대장 노릇했던 조직 투파마로스가 또 다른 좌파조직과 함께 민중참여운동(MPP)을 구성, 연합하여 정당(광역전선)이 되었다.
▲1985년 3월 석방되던 날의 무히카 전 대통령(왼쪽)
우루구아이 대통령 이상의 대통령
1994년, 무히카는 MPP의 대표로 출마하여 하원의원에 당선되고, 1999년에 같은 정당 소속으로 상원에 진출한다. 재선이 되었을 때, 우루과이에서 처음으로 타바레 바스케스의 좌파정권이 탄생했다.
무히카는 농림부 장관을 맡았다. 2009년 6월, 무히카는 광역전선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으며, 그 해 11월 52%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010년 3월 1일, 우루과이 제 40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여기까지가 그의 약사(略史)다.
얼핏 보기에 그는 우리가 익히 아는 20세기 동서양의 혁명가들처럼 무모하고 낭만적이며, 자신의 신념과 그 가치에 목숨을 걸었던 투사들 가운데 하나인 것 같다. 실제로 그렇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달라도 크게 달랐다. 그의 특별한 정치, 즉 그의 인생을 다룬 대표적인 저서들-‘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무히카’와 ‘호세 무히카:조용한 혁명’-을 읽고 그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볼 때마다, 우리가 지도자 한 사람을 제대로 뽑으면 그리 길지 않은 시간 안에 우리의 삶이 현저하게 달라진다는 것을 확인하고 아울러 확신케 된다.
우루과이는 그의 5년 임기 동안 남미에서 가장 안정적이고 포용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빈곤과 불평등 지수가 최저치로 낮아졌으며, 실업률 역시 최저치를 실현했다.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정책이 총체적 성장과 균형을 이루었다. 그로써 우루과이는 모든 나라의, 호세 무히카는 이 세상 모든 정치인의 스승이 되었다. 그는 고교졸업장도 없는 무학의 지도자였다.
평전의 저자와 대화에서 혁명가의 삶을 이렇게 말했다. “혁명가들도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두려움을 느낀다. 욕망은 더 간절한데 그 이유는 1분 뒤에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혁명가들은 사랑에 쉽게 빠진다. 그 힘으로 위험과 불안에 맞설 용기를 얻는다. 여러 명의 연인이 있었지만, 자식은 없다. 그 불확실성 때문이다. 혁명가는 늘 고독하다. 그래서 슬프다. 인생이란 슬픔을 한올한올 짜내려가는 천이다.”
어쩌면 7살 어린 소년이었을 때부터 70살이 넘어서 대통령이 된 그 기나긴 시간 동안 그는 혁명가로 살아오면서 마침내 이 시대, 이 세상에 없는 사상가로 자신을 진화시켰다. 그는 지난날 자신을 죽이려 했던 세력에 대하여 일관된 현실주의와 실용주의 정치철학을 바탕으로, “억압과 복수로는 사회에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없다”는 신념을 실천했다. 이는 단순히 다정하고 따뜻한 자비와 관용이 아니었다. 얼마든지 합법적으로 단죄를 할 수 있었지만, 본질은 복수라고 판단한 것이다. 진정으로 큰 지도자는 이 상황에서 그 기회를 더 큰 가치를 위한 재료로 쓴다. 그 큰 정치야말로 최상급의 복수다.
수많은 치적들이 있지만, 카톨릭 전통이 강한 나라에서 동성혼 합법화, 여성의 주도적 판단으로 낙태할 수 있는 권리의 합법화, 마리화나 합법화 등은 특별한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마리화나의 합법화를 통하여 그 범죄카르텔과의 전쟁 대신 국가가 관리하는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사회적 비용도 줄였으며, 범죄억제에도 성공했다. 그는 민주주의의 기초는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는 것'이라는 신념으로 자신의 정적을 부통령에 임명하여 통합의 정치를 실현했다.
▲애견 마누엘라와 자신의 작은 농장에서 포즈를 취한 무히카 전 대통령.
노자는 2500년 전, 법률, 도덕과 예의, 문화 등 인위적인 것에 얽매이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최선의 인생임을 가르쳤다. 무위자연(無爲自然)사상이다. 권력, 명예, 부와 같은 가치들 대신 인간의 본질적 가치와 내면의 평화를 중시했다.
호세 무히카 역시 권력의 상징인 사치와 특권을 멀리하고 월급의 대부분을 기부하며 국민들과의 거리감이 없는 지도력으로 검소하고 소박한 삶을 실천하고 소비주의와 물질만능주의를 비판했다.
전직 대통령인 그는 교외의 변두리 낡은 집에서 살고 농사를 지으며 소출을 내다 팔기도 하며 살았다. 퇴임식 날에는 30년된 폭스바겐을 손수 몰고 귀가했다. 다리 하나가 없는 강아지와 22년을 함께 살았다. 이름은 마누엘라. 2018년 세상을 떠난 그 특별한 생명은 영락없이 세상의 가난하고 힘든 민초들의 상징이었다. 호세와 루시아 부부에게는 소중한 반려였다. 호세 무히카는 농장의 세콰이아 나무 밑에 묻힌 마누엘라 옆에 묻혔다. 노자와 호세 무히카는 사제관계였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의 삶과 정치가 이 세상의 크고 작은 리더들에게 오래도록 큰 귀감 되기를 하늘에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