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송서>에 나오는 왜왕 무는 백제 무령왕인 사마
무령왕, ‘사마’는 일본어 ‘시마’인 섬, 각라도서 태어나
일왕의 만세일계 위해 왜왕 무를 유라꾸 천황으로 둔갑
왜왕 무와 무령왕은 출생과 몰년, 그리고 휘호가 동일
▲지금 일본열도에는 백제관련 지명이 널려 있다. 역 이름이 곰이다. 곰은 백제의 도읍을 말한다. 옥명은 다마나로써 백제 22담로의 이름이기도 하다. 자료: 잊혀진 땅, 백제 22담로의 비밀 (KBS_1996.09.15.방송) 갈무리
왜왕 무(武)는 백제 25대 무령왕이 맞는가
김주인 박사께서 2025년 ‘바른역사학술원 봄 정기학술대회’에서 발표한 <고대한일관계에 숨겨진 역사왜곡의 실상 - 광개토대왕 비문과 왜5왕에 관한 송서의 기록을 중심으로> 논문을 읽고 ‘왜왕 무(武)는 백제 25대 무령왕과 동일인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는 관점에 따라 해석이 다른데 한국인의 정체성으로 역사주권을 확립하고자 하는 관점에서 김주인 박사의 주장이 타당하다는 판단이 들어서 관련된 글을 발췌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김 박사는 박사학위논문 <왜5왕과 왜왕제도에 관한 연구(2024. 8), 순천향대>를 통하여 과거 일본 역사학자들과 우리나라 강단사학자들이 왜5왕을 일본 천황의 다른 이름으로 보고 여러 갈래로 꿰맞추는 방식에서 탈피하여 <송서> 상표문 분석을 통하여 왜5왕의 실체를 규명한 바 있다.
그 결과 왜왕의 성격은 백제왕의 지휘, 감독을 받아 야마토 왜를 포함한 일본을 여섯 개의 권역으로 나누어 통치한 후왕 또는 총독으로 볼 수 있고, 왜왕 계와 백제왕계 사이에는 밀접한 연계 사실이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 461년 개로왕은 동생 곤지를 불러 왜왕 자리를 물려줄테니 만삭의 왕후를 데리고 열도로 가서 후사를 대비하도록 부탁했고 그 결과 곤지는 일본으로 돌아가 왜왕 흥(興 : 461~477)이 되었다. 왜왕 흥은 475년 형인 개로왕이 고구려의 침공으로 한성이 함락되고 참수를 당하자 후임인 문주왕을 돕기 위해 귀국하였으나 권력 투쟁에 패하여 문주왕과 함께 477년 정적 해구에 의해 살해당했다.
왜왕 흥의 뒤를 이은 왜왕 무는 각라도에서 출생한 후 곤지에 의해서 양육된 개로왕의 아들 사마다. 왜왕 무가 478년에 송황제에게 보낸 상표문이 왜왕의 실체를 밝히는 중요한 사료다. 왜왕 무가 상표문에서 신망고제(臣亡考濟)라 하여 왜왕 제가 상표문을 쓴 왜왕 무 자신의 아버지임을 명백히 밝혔다.
일본의 통설은 왜왕 무를 근거도 없이 유라꾸 천왕으로 비정하지만 양자는 연대가 전혀 맞지 않는다. 유라꾸는 재위기간이 456년~479년이고 왜왕 무는 477년~501년으로 20년 이상 차이가 나서 동일인일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왕 무를 유라꾸와 동일인으로 비정하는 이유는 왜왕 무가 귀국해서 백제의 무령왕으로 등극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만세일계라는 천황체계가 무너지고 백제가 일본을 지배했다는 고대 한일관계가 밝혀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왜왕 무와 무령왕의 연결고리를 차단하기 위하여 일본서기는 왜왕 무가 된 사마의 출생과정에서부터 혼란을 일으키기 위하여 각라도에서 출생한 개로왕의 왕자는 즉시 본국으로 보냈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1971년 부여에서 발굴된 무령왕의 지석으로 모든 것이 파탄이 났다. 지석에 명문으로 백제 무령왕의 죽음을 ‘붕(崩)’으로 표기함으로써 일본서기에서 ‘훙(薨)’으로 표기한 것이 거짓임이 밝혀졌을 뿐만 아니라 상표문 상의 문언으로 백제왕이 일왕보다 상위에 있음이 드러났다.
따라서 일본서기가 백제왕실이 일본왕실에 조공과 인질 여자를 제공하며 깍듯이 모시고 있었다는 듯이 기술한 것이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이처럼 무령왕 지석은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밝혔으므로 무령왕 지석(誌石)을 소개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왜왕 무와 무령왕은 출생과 몰년, 그리고 휘호가 동일하다. 이는 무령왕이 사망한 523년에서 나이인 62년을 빼면 461년이 되며 이는 바로 사마가 각라도에서 출생한 해와 같고 무령왕의 휘호인 사마는 섬에서 났다는 의미에서 시마 또는 사마로 불린 왜왕 무와 동일인임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아들 성왕이 지었다고 생각되는 무령왕이라는 시호도 ‘무(武)’자는 왜왕 무에서 따오고 ‘령(寜)’자는 영동(寜東)대장군이라는 작호에서 따왔다고 볼 수 있다. ]
따라서 왜왕 무는 백제 25대 무령왕과 동일인이며 열도를 지배한 총독이었다는 김주인 박사의 학설에 의하면 무령왕은 백제 본국의 왕이 되기 전에 백제 왕자나 왕족이라야 가능한 담로로 왜 무왕으로 있었던 것이다.
501년까지 왜왕 무(武)는 일본열도에서 백제 담로로 있다가 본국 백제왕으로 501년에 취임하는 것을 보면 알수 있다. 무령왕 시절에는 백제 왕자나 왕족이 지도자로 있었던 담로가 22개였다. 백제(百濟)는 백가제해(百家濟海)의 나라로 일본을 다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