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헌동(김해근대역사위원회 위원장)

일제 19세기 임나일본부설에 따른 정한론 만들어

광개토태왕비 신묘년조 조작하여 조선침략 정당화

비문에 나오는 왜는 야마토왜 아닌 큐슈지역 왜

이형우, 조선총독부의 야마토왜 중시사관 추종

▲ 일제가 조작한 광개토태왕 비문을 새롭게 해석한 책, 비문전쟁. 자료: 북랩


고고학으로 본 광개토태왕비문의 왜

1871년 일제가 천황의 비호 아래 군사뿐 아니라 학문까지도 통제하는 육군 참모본부를 창설하였고 임나일본부가 조선의 가야에 있었다는 임나일본부설에 터 잡은 정한론을 만들어 냈다.

정한론의 이론적 토대를 세우려고 했던 인물이 요코이 다다나오(橫井忠直)다.

그가 임나일본부가 조선에 있었다는 근거로 사용한 것이 밀정 사카와의 쌍구가묵본에 있는 광개토태왕릉비 '신묘년조'의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과 '경자년조'의 "任那加羅 從拔城"이었다.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격파하여 신하의 백성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역사사실이 아님은 신묘년에 왜가 백제와 신라를 격파했다는 역사 기록이 없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백제와 신라, 야마토왜의 국력을 비교하면 가능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자년조는 고구려가 왜를 격파하여 임나가라 종발성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김해 금관가야의 역사 기록인 <가락국기>에 고구려의 침략이 있었다면 기록이 나타날 것인데 없다.

그래서 요코이 다다나오(橫井忠直)의 광개토태왕릉비문 해석은 임나일본부설을 만들기 위해 조작되었다고 본다. 밀정 사카와가 탁본을 가져와서 발표하는데 5년이 소요되었고, 이것을 발표한 사람이 요코이 다다나오 인것을 보면 조작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도명스님은 2025년 2월 발간한 <비문전쟁(碑文戰爭)> 책에서 渡海破百殘의 '渡海'가 '渡二' 인데 '二'를 '海'로 조작한 흔적이 있다고 한다. "백잔과 신라는 옛날 우리의 속민이었고, 전부터 조공을 왔다. 왜는 신묘년부터 물을 건너 (조공을) 왔다. 두 쳐부술 백잔과 왜가 신라를 침공해 신민으로 삼으려 했다. 이에 영락 6년 병신년 대왕께서 몸소 수군을 이끌고 왜와 백잔을 토벌했다."고 한다. 당시의 상황에 적합한 해석이다.

<인류문명의 기원과 한>, <부도지 역법과 인류세> 등 많은 저서를 남긴 김상일 한신대 명예교수는 "도명스님의 이 책 속에 다른 어떤 역사서에서도 볼 수 없는 클로징멘트 마무리발언와 역사를 다루는 인문학적 지식과 함께 융합적인 글쓰기 방법론은 그 어느 서가에서도 발견이 쉽지 않는데, 필시 독자를 독서 삼매경에 빠져들게 할 것이다. 향후 태왕의 비가 이 책을 통해 우리 역사의 비운을 시운으로 바꾸는데 공헌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추천한다.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의 북큐슈 이토시마지역에는 일본열도에서 제일 선참으로 선진적 묘제와 새로운 농구, 공구, 무기무장, 마구류, 도질토기 등이 출현하였다.

이토시마평야의 수끼사끼고분은 철제단갑 등 가야계 특유의 유물이 드러난 가야계통 무덤으로서 돌칸구조와 껴묻거리로 보아 축조 년대는 5세기 초엽으로 추정된다.

수끼사끼고분과 후쿠오카시에 있는 로오지 고분들에서 나온 가야식 갑옷과 칼, 쇠낫, 주조식 도끼 등은 4세기에는 일본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유물들로 이 무덤에 묻힌 사람들이 광개토대왕비문에 나오는 전쟁에 참가한 왜의 우두머리일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북한학계의 가야사 연구> 참고)

부산대 박물관 특별학예연구원인 히로세 유이치(廣瀨 雄一) 고고학 박사도 "큐슈 이토국 주변은 고고유물에서 가야와 관련이 깊은 곳이다. 고고유물로 볼 때, 이토국 주변에는 가야의 흔적이 강하게 나타난다.

가야산과 같은 가야의 지명도 남아있고 가야의 철과 관련된 유물도 지배자층 고분 출토품 중 가야의 유물도 많이 발견된다. 그런 점에서 가야와 왜와의 관계를 입증하는 좋은 예가 된다."고 한다.

<김해시사> 가야사 토론자 이형우도 "고고학으로 보면 서기 400년대 큐슈지역에서 나오는 유물과 유적이 광개토대왕비문에 나오는 왜라고 한다는 건 엄연한 사실이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게 큐슈만의 출병은 아니라는 것이다. 야마도 왜가 지휘부라고 본다. 그래서 상상이지만 축자왜에서 가장 많이, 길비왜서 그보다 적게, 출운왜에서 다시 그보다 적게, 야마도왜에서는 지휘관급 정예부대라고 하는 거다."라고 한다.

당시 통합된 국가로서의 왜가 없었음에도 이형우가 상상으로 야마토왜를 중시한 것은 조선총독부 시절의 야마토왜 중시 교육을 연상하게 한다. 야마토왜를 중시한 황국사관으로 왜곡하고 조작한 <일본서기>에도 광개토태왕비문과 관련된 기록은 없다.

히로세 박사는 "문헌자료는 작성자의 의도에 따라 왜곡되거나 지워지기도 하지만, 고고유물의 경우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하였다. 이 관점에서 고고학으로 본 광개토태왕비문의 왜는 야마토왜가 아니라 큐슈에 있었던 왜였다.

일제가 광개토태왕비문에 나오는 왜를 야마토왜라고 한 것을 극복하는 심도있는 연구가 많이 나오는 가야사학계가 되기를 바라면서 쓰는 글이다.

일본에서 고대 가야는 일본의 식민지로 <일본서기> 임나관련 지명을 가야와 연결시켜 교육하는 것을 시정하도록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ㅡ고대한일관계를 제대로 연구한 학자들은 일본열도는 우리 땅에서 이주해간 사람들 역사라고 한다. 미국인 코벨, 북한학자 김석형과 조희승, 한국 최재석, 일본학자 에가미 등이 있다.

존 카터 코벨(John Carter Covell·1910∼1996)은 미국인으로서 일본 미술사를 전공했다. 처음에는 일본에 심취하여 일본 역사와 문화를 연구했다. 그러다가 원류가 한국임을 깨닫고 한국역사문화 연구로 여생을 마친다. 그녀는 "한국은 일본의 부모이고 일본은 부모를 버린 불효자"라고 일갈했다. 대표저서로는 <기마민족과 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