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헌동(김해근대역사연구회 위원장)
중국 요령성 금서시 옛성터에서 임군태수장 봉니 발굴
전국시대 요령성 금서시 대니 유적 고조선 유물 나와
전한 초기에는 고조선 유물과 중국 유물 섞여서 출토
후한 시기에는 고조선 특징 약화, 중국 색 유물 강화
한반도와 만주는 중국 유물 부존재, 고조선 후국들 땅
▲ 서기1997. 중국 요녕성 금서시에서 나온 한사군 중 하나인 임둔군 태수장 봉니(편집인 주).
임둔군은 어디에 있었을까
중국 요서지역인 요령성 금서시 옛성터에서 임둔태수장 봉니(臨屯太守章 封泥)가 발굴되었다. 봉니(封泥)란 고대 중국에서 공문서나 서신 등을 죽간이나 목간에 기록하고 묶으면서 그 연결부에 진흙덩이로 봉하고 인장을 찍어 위변조를 막아 놓은 것이다.
중국 길림대에서 고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복기대 교수는 <임둔태수장 봉니를 통해 본 한사군의 위치>라는 논문에서 한사군은 지금의 요서지역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 가운데 금서지역이 임둔군이었다고 한다.
이 연구가 중요한 이유는 '임둔태수장 봉니'가 나온 금서시 소황지 유적 유물 하나만 분석한 것이 아니라 금서시 서쪽의 대니와 북쪽의 패묘 유적과 유물의 성격을 동시에 밝혀 한사군에 대한 종합적 이해를 돕기 때문이다. 금서시에서 발굴된 세 유적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해준다.
첫째는 전국시대에 속하는 대니 유적에서는 고조선의 특징을 보여주는 유물이 주로 수습되었다. 이는 이 시기 이 지역에 고조선 사람들이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둘째는 두 지역의 패묘에서는 전국시대 말기와 전한 초기에 이르는 기간에는 고조선의 특징을 보여주는 유물과 중국의 특징을 보여주는 유물이 섞여서 수습되었다. 이는 이 시기에 중국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했음을 알게 해 준다.
셋째는 전한 중기부터 후한 시기에 이르면 유물에서 고조선의 특징은 약해지고 거의 중국의 특징을 가진 유물이 주를 이룬다.
이는 이 시기에 이 지역이 중국의 통치권 안에 속하게 되었음을 알게 해준다. 이 해석은 고대 중국과 고조선의 역사적 상황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중국 전국시대에 고조선 유물들만 발굴되는 것은 현재의 요녕성 금서시 지역이 고조선의 강역이었음을 말해준다.
전국 말기에서 전한 초기에 고조선 유물과 중국 유물이 섞여서 출토되는 것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의 역사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뒤 고조선 임금의 자손이 점점 교만해지자 연나라는 장군 진개를 파견하여 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고 2천여 리의 땅을 빼앗아 만번한에 이르는 지역을 경계로 삼았다."
2천여 리의 땅을 빼앗기고도 만번한을 경계로 연과 대립하는 고조선을 "대동강 유역의 작은 소국"이라는 이병도와 이기백, 송호정과 주류 고대사학계의 소고조선론이 어불성설임을 알수 있다.
임둔태수장 봉니가 나온 금서시 소황지와 그 근처 조양시 등의 여러 유적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복기대 교수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한사군은 지금의 요서 지역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지금의 금서지역이 임둔군 이었다.
이러한 고고학 자료에 의한 고증 결과는 그간 논란을 빚어 온 한사군에 관한 문헌 기록들의 해석을 재검토하도록 만들 뿐만 아니라, 지난날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 북부와 지금의 요동 지역으로 본 통설을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이는 한국 고대사의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문헌 사료뿐만 아니라 유적과 유물을 통해서도 한사군이 현재의 요서 지역에 있었음이 명백하게 확인되었다.
한나라는 전쟁에 이겼지만 고조선의 서쪽 강역 일부만을 차지한 뒤 그 강역(요서지역)에 한사군을 설치했던 것이다. 나머지 고조선 강역에서는 고조선의 제후국들이 그대로 존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