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지승룡(목사, 전 민들레영토 대표)

 

미군 625전쟁 초기부터 북한 지역 초토화 작전에 나서

네이팜탄 등 반인륜적 폭탄 등 가리지 않고 북한 폭격

북한 78개 도시는 물론 시골 작은 마을까지 잿더미

휴전협정 중단되자 압력 가하려고 모든 민간에게 폭격

농사에 필요한 저수지 등 수리시설, 수력발전소도 파괴

폭탄에 페스트, 콜레라, 장티푸스 등 세균 담아 터뜨려

북한 폭격에 퍼부은 폭탄, 태평양전쟁에 쓴 양보다 많아

북 주민 대거 월남한 이유, 북폭으로 살 수 없었기 때문

커밍스, “북폭, 미국이 타민족에 가한 가장 극단적 폭력”

 

▲ 북한을 무차별 폭격 중인 미 공군 b-29 폭격기(편집인 주). 자료출처: 누리망.
▲ 북한을 무차별 폭격 중인 미 공군 b-29 폭격기(편집인 주). 자료출처: 누리망.

"사람이 살 수 있는 모든 곳을 파괴하라!"

1950년 6월 27일 동경에 있던 맥아더는 5공군 사령관에게 명령한다.

"폭격기를 한반도로 출동시켜 36시간 동안 모든 폭탄을 북군에게 쏟아 부어라." 5공군 사령관이 답한다. “각하, 지형도 모르고 한국군과의 교신이 안 돼 적군과 아군을 구분할 수 없습니다." 맥아더는 퉁명하게 "어쨌든 38선과 전선 사이에서 움직이는 건 다 폭격해.”

1950년 7월 13일 B-29 폭격기 56대가 참가한 원산폭격은 주민들이 사는 주택가에 폭탄이 떨어져 1,249명이 희생되었다. 이 중 195명이 여성, 125명이 어린이, 122명이 노인이었다.

맥아더는 1950년 11월 5일 중대한 명령을 또 내렸다. "北의 모든 도시와 마을들을 군사 목표로 삼아 완전히 초토화해라." 이때 등장한 폭탄이 네이팜탄과 소이탄이다. 휘발유가 섞인 이 폭탄들은 터지면 지름 약 45미터의 둥근 지역을 모조리 태웠다.

2차 대전은 대도시에 피해가 집중되었는데 맥아더 명령으로 작은 시골 마을까지 모두 불살라졌다. 폭격의 패턴은 먼저 중폭격기가 잿더미로 만들면, 이어 전폭기가 나타나 화재 진화를 못 하도록 기총소사하고 시한폭탄을 뿌렸다.

1952년 여름 미국은 北의 78개 도시와 읍, 주요 군사시설을 ‘지도위에서 영원히 지워버리기 위한’ 작전을 세웠다. 이렇게 진행된 ‘프레스 펌프 작전’ 첫날 무려 1,254회의 폭격과 2만3천 갤런의 네이팜탄을 평양을 비롯한 밀집 지역에 퍼부었다.

1952년 7월 11일과 12일 가공할만한 평양 폭격이 가해졌는데 폭격의 목표물은 ‘살아 있는 것들’이었다. 1만여 통의 네이팜탄과 6만2천 발의 탄약, 697톤의 폭탄이 북한 주민들의 머리 위에 쏟아졌고, 하루에만 평양시민 7,000여 명이 사망하였다.

8월 29일은 전쟁 기간 중 최대의 폭격이 이뤄졌는데 그날 하루 동안 평양은 1,403회의 폭격과 700톤의 폭탄 세례를 받아야 했다.

미 공군은 보급을 끊기 위해 북 전역을 연결하는 철도망을 파괴했다. 또 포로송환 문제로 휴전 협상이 중단되자 압력을 가하기 위해 모든 민간인에게 무차별적인 폭격을 가했다.

심지어 폭격 대상에서 제외했던 수력발전소와 논농사에 필수적인 저수지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곡창지대인 해주의 경우 저수지 20곳에 폭탄이 떨어지면서 둑이 파괴돼 마을이 물에 잠기고 벼농사가 중단되었다.

▲ 시골 마을에 반인륜적인 네이팜 탄을 퍼부은 미 공군(편집인 주). 자료출처: 누리망
▲ 시골 마을에 반인륜적인 네이팜 탄을 퍼부은 미 공군(편집인 주). 자료출처: 누리망

<세균전으로도 北을 공격했다>

美軍에 의해 조선 반도에서 52년 1월 28일부터 세균전이 시작했다. 미 합동참모본부의 지시와 극동군 사령부 명령에 따라 이루어졌다. 폭탄이 투하되어 터지면 폭탄 뚜껑이 열리면 페스트, 콜레라, 장티푸스 각종 전염병 균을 보균한 파리, 거미, 빈대 등 곤충들이 나와 많은 감염시켜 이유도 모르고 죽게 된다.

브루스 커밍스(1943년생)는 시카고대 석좌교수로 한국전쟁에 대한 권위 있는 역사학자인데 그는 北에 대한 공습은 미국이 타민족에게 가한 가장 극단적인 폭력이라고 말했다. 코리아 전쟁 당시 북 인구가 970만 명인데 최소 150만 명이 사망했다.

세균전을 실행에 옮겼던 미군 포로의 증언과 북을 방문한 일본의 ‘한국전쟁 미군 세균전 사실 조사단’ 회원들의 전언 등 수백 개의 증거자료로 있다. 또 국제과학위원회 조사단이 1952년 북 지역 세균전 방문 조사를 통해서 미군이 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1952년 1월부터 3월 사이 北, 169개 지역에 804차례나 세균탄 또는 살인용 미생물이 든 각종 물체를 투하했다.

▲ 미 공군의 폭격으로 삶의 터전을 잃고 절규하는 모자(편집인 주). 자료출처: 지승룡 얼굴책.
▲ 미 공군의 폭격으로 삶의 터전을 잃고 절규하는 모자(편집인 주). 자료출처: 지승룡 얼굴책.

<북 주민 가슴에는 미국에 대한 증오만 남았다>

피난 내려온 북 주민들에게 왜 북의 고향을 두고 월남했는지 물었을 때 대부분 그들이 한 말이다. ‘무시무시한 폭격으로 다 폐허가 되었기에 살기 위해서 내려왔지’ 였다. 폐허 속에 남아있던 북 주민들은 배고픔과 함께 가슴 속에 원한이 자리 잡았다. 北에서 심한 욕이 '미제 승냥이 놈'이다.

노근리 사건은 미군의 범죄행위 가운데 작은 부분에 불과하지만, 이 사건이 드러남으로 미군의 민간인 학살 행위가 전 세계에 공식적으로 폭로되었다.

북의 인구 가운데 15% 이상이 전쟁 중에 사망했고 5천여 학교, 1천여 개의 병원, 2천8백만 제곱미터의 주택 등 파괴되었고, 25만 마리의 소, 38만 마리의 돼지, 37만 정보의 농지 손해를 입었으며, 8천7백여 동의 공장과 생산설비가 파괴되었다.

미 극동 공군 폭격 사령관을 역임했던 오도넬은 전쟁 초기 6개월 동안 우리는 북의 모든 것을 파괴했다. 그래서 더 이상 목표물이 없었다고 말했다.

미군이 전쟁 3년 동안 쓴 폭탄의 양은 63만5천t인데, 태평양전쟁 때 쓴 50만3천t보다 많다. 태평양전쟁이 치러진 지역이 한반도 수십 배였기 때문에, 한반도에 투하된 폭탄으로 초토화 그 자체였다.

커티스 미 공군 전략공군 사령관은 폭격으로 北의 인구 20%를 죽였다고 말할 정도였다. 미 극동 공군은 집중적이고 대대적으로 북 주요 도시를 폭격했고, “이 지역이 사막으로 변했다”라고 맥아더가 말할 정도로 도시들은 잿더미가 됐다.

▲ 초토화 된 평양(편집인 주). 자료출처: 지승룡 얼굴책.
▲ 초토화 된 평양(편집인 주). 자료출처: 지승룡 얼굴책.

<1947년 여름 미군정청 체포 명령이 떨어지다>

사상과 집회의 자유가 있는 보편적 가치와 헌법을 어기고 미군정청은 한국 내 좌익 활동하는 자들을 체포하는 것을 넘어서 47년 8월 15일부터는 좌익 활동하지 않아도 당시 남한 주민 77%가 갖고 있던 사회주의 생각하고 있으니 한국인 다수를 사상 범죄라고 본 것이다.

즉 모든 사람이 체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신적 자유를 지향하면서 일제 치하 독립운동을 같이했던 사회주의자들에 대하여 온건한 사람들도 잡혀가는 세상이 되니 이들이 그때 월북했고 그 인물들 가운데 지난번 글에 언급한 임화, 지하련, 김순남 등이 월북하게 된 것이다. 북으로 간 이유와 남으로 내려온 이들의 상황이 무엇인지 이해하는데 이 글이 다리가 되길 바란다.

미국에 대하여 갖는 북의 주민감정이 어떤 것인지 또 이런 미군에 대한 공포 속에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권력을 가족 세습으로 하는 이유, 저들의 자위 국방을 담보하기 위해 미국이 북을 공격하면 ‘다 죽는다’라는 마지막 담보로 핵보유국이 된 것을 이해할 수 있으면. 또 남북 간에 북미 간에 평화협정이 있어야 함을 다시 기억하며 글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