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지승룡(전 민들레영토 대표, 목사)
조선의 병역의무 기간은 16세부터 60세까지
승려, 관료, 성균관 유생, 노부모 부양자는 면제
무신 유응부, 단종 죽이고 즉위한 세조 암살 기도
세조, 유응부의 당당한 태도에 분노, 잔인하게 죽여
유응부 자식들도 연좌제로 죽여 시신 전국에 전시
▲ 그림은 이쾌대 형인 이여성이 그린 ‘격구도’
조선 현충원인 장충단과 군인들의 공동묘지였던 이태원을 답사하는 길 위의 인문학 걷기가 삼십여 분의 동행으로 마쳤다.
그동안 없었던 경험이 있었다. 하나는 유튜버들의 중계 속에 이동하며 걷는 것이었는데 긴장되고 좀 쑥스러웠다. 또 이태원을 지나며 일부 구간에서 시위 때 보는 선창자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나에게 이런 면도 있군! 했다.
그날 임재선 조선무예 경당관장이 쓴 ‘조선 무인의 긍지와 한’ 출판기념회에 다녀오면서 무예인들의 삶에 관심이 가서 어제는 임재선이 쓴 책을 독서하고 군 무예를 두루 검색하며 무인들에 대해 성찰했다.
이태원 1 묘지의 군인들은 어떤 분들이었을까?
고려에 이어 조선시대 병역의무 기간은 16세부터 60세까지였다. 참 긴 기간이다. 두 달 집중 군사훈련을 받고 매년 한 달에서 두 달간 병역의무를 돌아가며 수행했고 60세가 넘으면 지금의 예비군 같은 역할을 했다.
인구가 많지 않지만 내외로 적들의 침략이 많았기에 남성들에게 이렇게 긴 시간 병역기간을 줬고 농경사회고 재원이 부족해 민방위 형태로 유지된 것 같다.
군 면제자는 승려. 관료. 성균관 유생, 노부모 부양자 등이었다. 관료와 유생은 그들의 삶 자체가 국가와 상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사명대사를 보면 알듯이 임진왜란 등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스님들이 의병의 역할을 했다. 사명대사의 지휘 아래 고성 건봉사에서 스님 1,600명을 자발적으로 모여 군사훈련을 받고 전선에 참여하였다.
무과에 급제한 정규직 정병들은 지금 돈으로 2백만 원 이상을 받았고 계급승진이 주어졌다. 일반 의무 병역자들은 봉급이 없었고 피복·식량만 받았는데 한두 달 순환제로 근무했기에 근무하는 기간에는 근무하지 않는 분들이 조를 짜서 나중에 생활비나 군 활동비를 지원했다.
남소영 부대
장충단은 사십만 평 정도의 남소영 부대가 1895년 해체되고 5년 이후 세워진 곳이다. 남소영은 1695년(숙종시절) 남산 남소문 아래에 창설되었다. 남소영은 군사들 주둔지인 동시에 52칸이나 되는 화약 창고가 있었고 군 무기들이 보관된 곳이고 무과시험 장소이기도 했다.
이 남소영부대지역에 현재 있는 대표적인 건물들은 동국대학교, 장충단공원, 국립극장, 반얀트리 호텔 신라호텔, 앰배서더 호텔, 파라다이스호텔 부지 충무초등학교 태광기업 장충체육관 등이 있다.
남소영 부대를 지나면 성저십리 밖인데 군인들을 위한 공동묘지가 있었고 지금의 이태원 한남동이다.
사육신 가운데 한 사람 무신 유응부
그는 세조즉위 후 동지중추원사에 임명되고 1456년(세조2)에 성삼문·박팽년(朴彭年) 등이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초청 연회하는 날에 유응부와 성승(성삼문의 아버지) 등을 별운검(2품 이상의 武官이 칼을 차고서 임금 옆에서 호위하던 벼슬)으로 선정해, 그 자리에서 세조를 살해하고 단종을 다시 세우기로 계획을 세웠다.
이때 이런 의논을 한 사람들이 나중 생육신 사육신이 되었다. 그런데 이날 세조는 별운검을 세우지 말도록 명령했고, 세자도 질병 때문에 연회장에 나오지 못했고 거사를 준비한 다른 분들이 다음으로 미루자고 한다.
성삼문과 박팽년은 ‘세자가 경복궁에 있고, 이곳 창덕궁에서 거사하더라도, 세자가 변고를 듣고서 경복궁에서 군사를 동원해 온다면 일의 성패를 알 수가 없으니 뒷날을 기다리자’ 말한다.
무신 유응부는 ‘이런 일은 빨리할수록 좋은데 만약 늦춘다면 누설될까 염려가 되오. 지금 세자가 비록 이곳에 오지 않았지만, 왕의 우익(羽翼: 보좌하는 신하)이 모두 이곳에 있으니 오늘 이들을 모두 죽이고 단종을 호위하고서 호령한다면, 천재일시(千載一時)의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니 이런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것이오.’라고 말했다.
단종 복위 사건의 주모는 성삼문 박팽년이었고 유응부는 행동책이라 주모를 앞설 수는 없었다.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무신 유응부의 의견으로 모였다면?
공모자의 한 사람 김질(金礩)이 일이 혁명이 성공되지 못함을 알고 장인 정창손에게 알리고 결국 역모죄로 주모자 6인이 모두 세조의 국문을 받았다.
“너는 무슨 일을 하려고 하였느냐?”고 세조가 묻자 유응부는 “내가 한 자루 칼로써 족하(세조 지칭)를 죽여 폐위시키고 옛 임금을 복위시키려고 했으나, 불행히 간사한 놈 김질에게 고발당했으니 족하는 빨리 나를 죽여주오.”라고 말했다.
세조는 즉시 무사를 시켜 유응부의 살가죽을 벗겼다. 유응부는 성삼문을 바라보며 “무사들이 당신 같은 서생들과는 함께 일을 모의할 수 없다고 하더니 과연 그렇구려 지난번 내가 칼을 사용하려고 했는데, 그대들이 굳이 말리면서 ‘만전의 계책이 아니오’ 하더니, 오늘의 화를 초래하고야 말았구나!”
그리고 유응부는 세조에게 “만약 이 사실 밖의 일을 묻고자 한다면 저 쓸모없는 선비에게 물어보라” 하고는 입을 닫고 대답하지 않았다.
세조가 더욱 성이 나서 달군 쇠를 가져와서 배 밑을 지지게 하니 기름과 불이 함께 이글이글 타올랐으나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천천히 달군 쇠가 식기를 기다려 그 쇠를 집어 땅에 던지면서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하고는 끝내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추가
1. 만 60세까지 병역의 의무가 있었으니 옛 어른들이 회갑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를 알 듯하다.
2. 내가 거하는 건너편 집이 사육신 박팽년 집터다.
위의 본 글에 보면 사육신의 핵심 두 사람 성삼문과 박팽년이 전략적 한계가 보인다. 그러나 이들도 충정과 기개는 깊었다.
문종이 병약함으로 죽음을 예견하고 세자의 안위를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에게 부탁한다. 박팽년은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울분을 참지 못해 경복궁 경회루에 뛰어들어 자살을 시도하는데 성삼문이 함께 후일을 도모하자고 만류했다.
세조는 박팽년의 능력을 귀히 여겨 “ 항복하고 같이 역모를 안 했다고 숨기면 살 수 있을 것이다”라고 전했으나 박팽년 역시 성삼문처럼 세조를 "전하"가 아니라 "나리"라 칭하며 거절했다고 한다.
연좌제로 그의 자녀들도 순국하였고 그의 시신이 팔도에 전시되었으니 학자이고 관료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애국 충성심의 깊이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