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석현장(스님, 역사평론가)
덕천가강의 건방진 시에 핵 주먹 날려
덕천이 사명대사를 잡새라고 하자
덕천을 닭 무리, 자신은 학으로 묘사
임진왜란 후 사절단 이끌고 일본 들어가
포로 3천6백여명 데리고 돌아와
▲ 사명대사(좌)와 덕천가강(우) 자료: 삼태극
사명대사와 도꾸가와 이에야쓰가 직접 만나 한판 승부를 벌이다.
“돌에는 풀이 나기 어렵고
방안에는 구름이 일지 못하는데
그대는 어느 산에 사는 잡새이길래
감히 봉황의 무리 속에 찾아왔느냐”
사명대사 유정이 교토의 후시미성 회담장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보고 도쿠가와 이에야쓰가 읊은 시이다.
“나는 본디 청산에 사는 학이오.
늘 오색구름을 타고 놀았느니라
하루아침에 오색구름이 사라져
닭들의 무리 속에 떨어졌소이다.”
사명대사의 화답 시에 회담장은 팽팽한 긴장감이 생겨났다.
말로만 전해 들은 조선의 승장 유정의 범상치 않은 풍채와 그 붓끝에서 나오는 당당한 시구에 일본의 최고 실력자인 도쿠가와도 움찔하였다.
1605년 3월 교토의 후시미성 회담장 풍경이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일본이 조선에 화친 정책을 펼치자 선조는 사명대사를 강화 사절단 수장으로 일본에 보낸다.
손수 보검을 내려 명령에 불복하는 자는 참수해도 좋다고 하였다. 선박 8척에 동행할 인원은 오백 명에 이르렀다.
한양~부산~대마도~시모노세키~오사카로 이어지는 뱃길을 타고 교토에 갔다.
사명대사는 후시미성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쓰와 역사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갈 때는 8척의 배를 가지고 갔는데 올 때는 48척의 배를 끌고 왔다.
성공적인 외교활동을 펼치고 조정에서 부탁한 임무를 완수한 것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끌려간 3500여 명의 조선인 포로를 데리고 귀환하였다.
한·일 관계사에서 역대 최고의 외교 성과이며 사명대사에게 최고의 외교관 명성이 붙는 순간이었다.
철저한 기록문화로 유명한 일본에서 사명대사와의 회담 내용은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대사의 요구대로 들어 줄 수밖에 없는 일방적인 회담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조선이 일본에 요구한 세 가지 조건이다.
1.화해를 요청하는 장군의 국서를 먼저 보내되 장군의 호칭은 일본 국왕으로 한다.
2. 임진왜란 때 도굴된 왕릉(선릉·정릉)의 도굴범을 잡아서 보낼 것.
3. 죄없이 끌려간 조선 포로들을 돌려보낼 것.
사명대사의 일본 숙소는 임제종 사찰 혼포지(본법사)였으며 적국인 일본 스님들에게 설법하고 제자로 삼는 법화를 남겼다.
사명대사의 외교성과 힘입어 일본·조선 간에는 300년간 선린우호 관계가 지속될 수 있었다.
사명대사의 외교성과는 높이 치하한 선조는 대사에게 영의정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임무를 마친 대사는 바랑을 메고 해인사 홍제암으로 돌아왔다.
사명대사의 고향은 밀양이다.
밀양 표충사에는 대사의 위패와 유품을 모신 표충사가 있다.
출처: https://www.facebook.com/hyunjang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