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종성(미스바채플 목사)

선학들의 연구결과 한군현은 고대요동에 위치

고구려본기는 낙랑국과 낙랑군을 구별하여 기록

요동과 한반도는 방4천리 ‘한(韓)’으로 불려

월지국 병합 후에 백제왕은 마한의 진왕으로 등극

식민사관을 극복한 선학들의 연구성과를 종합하면 한(漢)군현은 고대요동 즉 화북성과 요령성 서부일대에 있었고, 증설된 현(縣)이 요동반도 남단에 있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삼한과 그 이전에 있었다는 옛 진국, 그리고 최씨낙랑국에 대한 인식도 새롭게 할 필요가 있고, 삼국지 한전에 기록된 한(漢)군현과의 접촉 기사도 달리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우선 최씨낙랑국에 대하여 다시 한번 살펴보자.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삼국사기를 찬술한 찬자(撰者)들은 고구려본기에서 낙랑국과 한군현을 혼동하지 않도록 세심히 배려하여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군현을 표현할 땐 “00군”이라고 표기했고, 만약 “군(郡)”이 생략된 경우는 그 기사의 내용을 통해 한군현이라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게 하였다. 일례로 위(魏)의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략했다가 밀우와 유유의 계책에 패하여 도주할 때 “군(郡)”을 생략하고 단순히 ‘낙랑(樂浪)으로 퇴각했다’고만 기술하였다. 여기서 보이는 낙랑은 누가봐도 문맥을 통해 위(魏)의 낙랑군이라는 사실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렇게 고구려본기는 낙랑국과 낙랑군을 혼동하지 않도록 친절히 기술하였다.

​그러므로 단순히 이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낙랑국의 실체를 부정하며 낙랑군으로 치환하거나 마치 낙랑국이 낙랑군에 곁방살이하는 후국(侯國) 정도로 이해하는 것은 고구려본기를 찬술할 당시 고대 1차사료를 접한 찬자들의 의도와는 동떨어지는 판단이다. 혹자는 한대인(漢代人)들이 “군(郡)”을 방국(邦•國)으로도 이해한 사례가 있는 것을 들어, 최씨낙랑국의 실체를 인정할 수 없다고 강변하나 군 태수를 왕이라 하고, 그 딸을 공주로 칭한 사례는 전무하거니와 그런 논리라면 고구려본기에 낙랑국 외에 고구려 주변에 등장하는 황룡국(黃龍國), 구다국(句茶國)과 같은 “국(國)”들도 한(漢)의 변군(邊郡)으로 모두 이해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도저히 수긍하기 어려운 주장일뿐이다. 우리의 관점이 아니라 타인의 시각으로 사료를 보고, 우리 국내의 사서보다 화이론적 관점에서 기술된 한적(漢籍)의 기사들이 마치 객관적 시각을 담보하고 있는 것처럼 믿어 의심치 않는 연구방법론은 지양(止揚)되어야 할 것이다.

SBS드라마 ‘자명고’, 북앞에 선 낙랑공주.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전반부 5권과 후반부 5권이 질적으로 다르다. 전반부는 고구려의 사회를 엿볼 수 있는 설화가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지만, 후반부에는 그러한 설화가 하나도 없다. 강경구의 연구에 따르면 고구려의 사서인 ⌜留記(유기)⌟는 국초로부터 기록된 사료를 모아 소수림왕 전후한 시기에 편찬되었고, 대체로 시조인 추모왕대부터 미천왕대까지 사실이 수록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것을 영양왕대 태학박사 이문진(李文眞)이 축약하여 ⌜新集(신집)⌟5권으로 만들었다. 고구려가 망한 후 보덕왕 안승이 신라로 투항하면서 그 휘하에 있던 이문진의 씨족도 함께 망명한 것이다. <익산이씨세보>에 의하면 ‘익산 이씨는 고구려 태학박사 이문진의 후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임병태교수는 고구려유민들이 익산과 남원 등지에 거주했다고 한다. 이문진의 후예들이 가문의 가보(家寶)의 일종인 <신집>을 보존, 전승했고, 고려 국초에 <구삼국사(舊三國史)> 편찬 당시 원사료로서 수록되었을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따라서 최씨낙랑국 이야기는 삼국사기를 찬술한 찬자들이 낙랑군과 그 어떤 착오를 일으켜서 가공해 낸 전설의 고향 같은 것이 아니다. 분명 고구려 당대 정사(正史)에 기록되어 있던 사화로서 그 역사성은 부인될 수 없다. 물론 자명고설화에는 일부 신화적인 표현이 등장하나 이것은 특정한 역사적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되어야 할 터이다. 그리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후반부 5권은 신라에서 관찬으로 정리한 <고구려고기(高句麗古記)>를 기초로 하여 한적 사료를 다량 보충함으로써 성립되었을 것이라고 고증했다.


경남 의령에서 출토된 “연가(延嘉) 7년명 금동여래입상”의 ‘고려국낙량동사(高麗國樂良東寺)’로 시작되는 명문에 나오는 ‘낙량(樂良)’과 고구려의 춘제(春祭)가 개최되던 ‘낙랑언덕’이라는 지명은 분명히 최씨낙랑국으로부터 유래한 이름이다. 우리는 이 낙랑국이 평양에 존속했던 국가이며, 진국이 성립될 당시에는 낙랑국(진한)이 그 주도세력이였던 것을 확신해야 한다. 삼국지에서는 ‘진한이 옛 진국이라’고 기록하고 있음으로 옛 진국이 성립할 당시에는 진한에서 진왕을 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진한이 경상도로 남하한 이후 북방에 남아 있던 낙랑인을 ‘아잔(阿殘 남아있는 우리)’이라고 지칭하며 친연성을 내보인다. 이것은 진한이 옛 진국 시절에는 낙랑인과 같은 곳에서, 함께 세력을 이루고 있었던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낙랑국(진한)은 옛진국(古之辰國)시기 주도세력이 분명하다. 진국, 진왕, 진한이 모두 ‘진(辰)’이 들어가는 것만 보아도 이 사실을 능히 유추할 수 있다.

당시 삼국지의 찬자는 요동과 한반도의 정세에 대해 무지하고 중화주의 관점을 지녔기에 마치 진한이 중국유이민(秦役民)에 의해 구성된 것처럼 강조했고, 낙랑인도 낙랑군민으로 이해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분명하게 ‘난을 피해온 일부 중국인이 진한유민과 잡거(雜居) 하는데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한유민은 역사적으로 옛진국 사람이였지, 낙랑군민이 된 적이 없으며, 북쪽에서 남하한 진한유민을 삼국지에선 분명히 ‘동방인(東方人)’이라고 적시하고 있다. 후에 낙랑국이 망하자 그 유민들이 백제가 아니라 신라로 유입된 것은 분명 동기상구(同氣相求)에 따른 선택이었다. 신라가 자칭, 타칭으로 즐겨 낙랑으로 일컬어졌는데, 신라인들은 자신들이 (왕검)조선유민으로서 낙랑국(옛 진국)에서 기원했기에 낙랑이라고 자칭한 것이다.

후한서 한전은 삼국지 한전과는 다르게 '삼한이 모두 옛진국이라'고 전한다. 옛 진국의 태내에서 삼한이 나온 것이다. 진국은 ‘방4천리’의 넓은 나라였기에 제국(諸國)의 간(干)들이 세 개의 권역으로 모여 삼한(三韓)을 형성하고, 그 중에 가장 강대한 수장을 진왕(辰王)으로 공립(共立)하여 그 권위에 복속하는 체제를 구축했다. 이 진국은 일찍부터 차이나와는 다른 해외의 나라로서 동북쪽에 있는 군자국(君子國)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공자는 도(道)를 상실한 주(周)를 떠나 군자국으로 망명하길 원했고, 진시황은 불사약을 찾기 위해 사신을 파견하기도 했다.

옛 진국을 주도하던 낙랑국(진한)은 기원전 3세기경 연장(燕將) 진개의 동침(東侵)의 여파로 준왕조선이 요하쪽으로 밀려들자, 요동반도 일대가 혼란에 빠지는 등 내부 정세 격변이 일게 되면서 점차 세가 흩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마한제국(馬韓諸國)의 간(干)들은 따로 한 수장을 진왕으로 공립하게 되면서 주도권이 이 때에 이르러 마한으로 넘어간 듯 보인다. BC 2세기 초 위만의 역성혁명으로 축출된 준왕이 남하하여 (진국의) 마한을 공파하고 한왕(韓王)을 자칭하게 되자 또 한차례 국체가 뒤바뀌고, 준왕 사후 자손이 멸절됨으로 하여 다시 마한의 월지국(月支國)에서 진왕을 내었다고 한다.

하지만 기원 전후로 이 진국 체제는 해소의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으니, 백제가 성장하면서 온조왕이 주변의 길지(吉支)들을 규합하여 세를 확대하고, 진한과 변진이 성장하여 이탈한 결과였다. 백제가 AD9년에 마한의 월지국을 병합하여 실력을 보이자 마한제국의 길지들이 백제왕을 진왕으로 공립하여 백제중심의 진국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이로서 백제왕은 진왕으로서 위상을 지니게 되면서 그 왕칭이 삼국사기에서는 ‘건길지(鞬吉支)’로, 삼국지에선 ‘마한주(馬韓主)’로, 오우치가문의 족보에서는 ‘백제국마한황제(百濟國馬韓皇帝)’로 기록되었던 것이다. 의자왕의 왕자로서 당(唐)에 끌려가 죽은 부여융(扶餘隆, 615~682)의 묘지명에 그를 ‘진조인(辰朝人)’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은 백제가 멸망하기까지 진국(마한) 진왕의 정통성을 계승했다는 자의식을 지녔던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부여융(扶餘隆, 615~682) 묘지명. 그는 의자왕의 왕자이다. 644년(의자왕 4)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660년 7월 백제 왕성이 나당연합군에게 함락될 때 웅진성(熊津城)으로 도피해 있다가 결국 신라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 해 9월 당장 소정방(蘇定方)을 따라 의자왕 및 왕족·귀족들과 함께 당의 수도인 낙양(洛陽)으로 끌려갔다. 그의 묘지는 중국 하남성(河南省) 낙양의 북망산(北芒山)에 있다. 묘지명에는 그를 ‘백제(百濟) 진조인(辰朝人)’이라고 소개하고 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탁본).


그런데 우리는 삼국지와 후한서 한전에 쓰여진 ‘방4천리(方四千里)’ 기록을 통해 만주와 한반도 전체가 한(韓)으로 인식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훗날 지나인들과 일본인들은 해동삼국을 가리켜 모두 삼한으로 지칭했다. 이 한(韓)의 기원을 따지고 올라가면 고조선에 가서 닿는다. 시경 한혁편에는 ‘한(韓)의 서쪽에도 역시 성(姓)을 한(韓)이라 하였는데 위만에게 공파 당하여 해중(海中)에 들어가 살았다’라고 한다. 여기서 한(韓)은 왕검조선이고, 그 서쪽에 있어 위만에게 패하여 해중으로 들어간 한씨(韓氏)는 기자조선의 준왕이니, 고조선이 곧 한(韓)이였던 것이다. 그리고 위략에서 언급된 ‘조선후(朝鮮侯)’를, 시경은 ‘한후(韓侯)’라고 표기한다. 따라서 사서에 등장하는 “한(韓)”이라는 표현이 나오면 고조선과 옛 진국과는 그다지 상관이 없는 별도의 정치체로 이해하거나 그것을 한강 이남에 있던 정치체로 고정시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옛조선 지역인 요서를 비롯하여 요동과 한반도 전체가 한(韓)이였고, 그곳에 거주하는 종족이 한(韓)이기도 했고, 지역에 따라 이 한(韓)을 예(濊)와 맥(貊)으로도 불렀다. 낙랑국의 구성원은 진한이였던 고로 때때로 한적(漢籍)에는 낙랑국을 “진국” 혹은 “한(韓)”으로 인식했다고 보아야 한다. 평양역 구내 전실묘에서 발굴된 “요동•한•현도태수령동리조(遼東•韓•玄菟太守領冬利造)”라는 명문전(銘文塼)에서 보이는 ‘한(韓)’이라는 이름을 통해서 요하 인근의 세력들도 그렇게 불린 것을 알 수 있다.

마한, 진한, 변진(弁辰)이라는 세 칸국들의 경계는 오늘날 국경처럼 선(線)으로 명백히 그어진 것이 아니었다. 삼한제국의 국읍과 촌락들이 ‘서로 끼어 있고(介居)’, ‘썩여 있어(雜居)’ 잘 통제가 안 되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우리가 기존의 통설에 함몰되어 마치 처음부터 마한은 경기충청전라에, 진한은 경북에, 변진은 경남에만 있었던 것으로 오해하여 그 어떤 논(論)을 구성해서는 안될 것이다. 요동반도와 서북한에도 낙랑국과 염사국처럼 진한제국(諸國)들이 있었고, 마한도 그곳에 몇몇 국(國)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를 보면 세 나라 초기부터 등장하는 말갈은 처음에는 “말칸”으로 불리웠고, 이것이 말갈(靺鞨)로 고정되었을 터이니 요동과 한반도 중북부에 활동하던 마한세력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최치원이 고구려를 마한으로 연결시킨 것은 일정부분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한적에 "한"이나 "한국"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면 이것을 한강 이남의 삼한으로만 연결시켜 이해하는건 곤란하다.

이 사실은 염사착의 설화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삼국지>의 찬자는 [위략]을 인용하여 '조선상 역계경이 동쪽의 진국으로 갔다'고 전하면서, 이어서 왕망시기에 진한 우거수 염사착의 이야기를 서술한다. 이것은 진국이 곧 진한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앞서 밝힌 것처럼 위만조선(낙랑군)은 요서일대에 있었고, 그 동쪽 요동일대에는 진국(진한)이 있었다. 염사착이 낙랑군 잠지현에 이르러 군(郡)에 통보를 했더니, 배를 보내와서 진한(낙랑국)에 벌목하러 왔다가 포로가 된 호래와 무리 천명을 실어가고, 나머지 포로 500명의 생환 문제를 두고 염사착이 통역관이 되어 진한(낙랑국)과 교섭하며 따졌다고 한다. “너희는 5백명을 돌려보내라, 만약 그렇지 않으면 낙랑[군]이 만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배를 타고 와서 너희를 공격할 것이라”고 협박했다는 것이다. 만약 기존 통설대로 낙랑군이 평양에 있고, 진한이 경상도에만 있었다면 바다를 건너 배로 망명객을 실어나르거나, 공격해 올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낙랑군이 요서에 위치하였고, 요동반도 중부와 서북한일대에 진한(낙랑국)이 위치하고 있었기에 배를 타고 올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염사착이 진한우거수였던 것을 보면 염사국(廉斯國)은 명백히 진한(낙랑국)에 속한 세력이였고 이 역시 요동반도 중부일대에 있었다.

▲기원전후 여러나라시대(후기진국) 형세도


<후한서> 한전에는 이와는 다른 염사인 소마시설화가 나온다. ‘건무(建武) 20년(A.D44)에 한(韓)의 염사사람인 소마시(蘇馬諟) 등이 낙랑[군]에 와서 공물을 바쳤다. [후한]의 광무제(光武帝)는 소마시를 봉(封)하여 한(漢)의 염사읍군(廉斯邑君)으로 삼아 낙랑군에 소속시키고 철마다 조알(朝謁)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염사착이 왕망시기(9~23년)에 활동했으니, 약 20년 후에 염사국의 또다른 수장으로 보이는 소마시가 후한의 낙랑군과 교섭하는 것을 보게 된다. 염사국은 그 이전에 일부만 이탈을 했을뿐 그 이후에도 여전히 진한에 소속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아니라면 염사착과 소마시가 원래는 같은 인물인데, 같은 사건을 다른 측면에서 상이하게 기록했을 수도 있겠다. 아마도 고구려가 37년에 낙랑국(진한)을 병합하자 여기에 반발하여 염사국은 기원 44년 후한에 붙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삼국사기>에서는 '대무신왕 27년(44)에 한(漢)의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고지)을 치고 그 땅을 취하여 군현으로 삼으니 살수 이남이 한(漢)에 속하게 되었다'라고 기록한다.

하지만 정작 광무제본기에는 이러한 동정(東征) 기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 대신 같은 년도인 '건무20년(44) 동이의 한인(韓人)이 낙랑군에 내부하였다'고만 나온다. 염사국의 소마시가 내부할 때 후한이 발해의 요동만을 건너 요동반도 남단에 출병하여 낙랑군의 현을 추가 증설함으로 이것을 광무제의 동정으로 판단하여 기록한 듯 싶다. 선학들의 연구에 따르면 살수도 청천강이 아니라 요동반도에 있는 하천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때 증설된 낙랑군현은 3세기 초에 공손강에 의해 대방군으로 분할된다. 건안(建安) 연간(A.D.196~226)에 공손강(公孫康)이 둔유현(屯有縣) 이남의 황지를 분할하여 대방군으로 만들고, 공손모·장창 등을 파견하여 한(漢)의 유민을 모아 군대를 일으켜서 한예(韓濊)를 정벌하자, [한국에 있던] 옛 백성들이 차츰 돌아오고, 이 뒤에 왜(倭)와 한(韓)은 드디어 대방에 속하게 되었다'라고 한다.

2세기말에서 3세기초가 되면 '한예(韓濊)가 강성해져 군현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자 민(民)들이 한국으로 유입되었다'고 한다. 이 기록에서 한예는 단단대령(의무려산) 이동 북진시일대의 영동예와 요동반도 중부의 진한(낙랑국유예)세력으로 보인다. 이에 공손강이 한(漢) 유민들을 모아 이들 한예를 제압하여 위세를 보였다는 것이다. 후에는 주변의 왜와 한(韓)이 대방군를 교섭창구로 삼아 위(魏)와 관계를 맺게 되었다고 한다.

지나의 사가들은 중화주의에 경도되어 있어 주변 국가와 접촉한 것을 기록할때면 자신들의 입장에서 사건들을 유리하게 윤색하여 위세를 과시하려는 버릇이 있다. 교섭창구 역할을 하게 된 것을 마치 ‘대방군에 속했다’고 표현한 것이다. 또한 정치체제를 기록할 때 한 문장안에서 국명의 중복 표기를 피하기 위해 동일한 정치체제를 이칭, 별칭으로 달리 표기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함으로 주의가 요구된다. 한적의 외교관계 기사를 대할 때는 액면 그대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항상 우리의 관점에서 여러 사료를 대조 비교하고 당시 정세를 고려하는 등 여과하여 이해해야 할 것이다.

다음에 기사들은 고구려도 ‘한(韓)’으로 표기되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시켜 준다. '경초(景初) 연간(A.D.237~239)에 명제(明帝)가 몰래 대방태수 유흔과 낙랑태수 선우사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대방·낙랑의] 두 군(郡)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여러 한국(韓國)의 신지(臣智)에게는 읍군(邑君)의 인수(印綬)를 더해 주고, 그 다음 사람에게는 읍장(邑長)[의 벼슬]을 주었다'라고 한다.

(요서)낙랑군의 토착인 왕조(王調)가 반란을 일으켜 대장군낙랑태수를 자칭하며 자립하자 후한이 신임 대방태수와 낙랑태수를 파견하여 (발해)바다를 건너와 (요서의) 두 군(郡)을 평정하고 두 군 산하에 예속된 재지세력인 영동예(嶺東濊)와 요동반도의 여러 한국의 수장들에게 읍군, 읍장의 인수를 내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부종사 오림은 낙랑[군]이 본래 한국(韓國)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진한8국(辰韓八國)을 분할하여 낙랑[군]에 넣으려 하였다. 그 때 통역하는 관리가 말을 옮기면서 틀리게 설명하는 부분이 있어, 신지와 한인(韓人)들이 모두 격분하여 대방군의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였다. 이 때 [대방]태수 궁준(弓遵)과 낙랑태수 유무(劉茂)가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정벌하였는데, 준(遵)은 전사하였으나 이군(二郡)은 마침내 한(韓)을 멸(滅)하였다'고 한다. 이 사건을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이왕조는 다음과 같이 보도한다.

'고이왕 13년(246)〕 가을 8월에 위(魏) 유주자사 관구검이 낙랑태수 유무(劉茂), 삭방(朔方)태수 왕준(王遵)과 함께 고구려를 쳤다. 왕이 빈틈을 타서 좌장(左將) 진충(眞忠)을 보내 낙랑의 변경 주민을 습격하여 빼앗으니 유무가 듣고 노하였다. 왕이 침략 당할 것을 염려하여 그 주민들을 돌려주었다'라고 한다. 위(魏)의 부종사 오림이 낙랑군이 본래 한국[요동에 있던 진한(낙랑국)]을 통제했다고 과장하면서 요동반도에 있던 진한8국을 분할하려 들자 그곳의 재지세력들이 격분하여 요동반도 남단에 있는 대방군의 군영을 공격했으나 오히려 반격을 받아 요동반도 중부일대 재지세력들이 대방군에 복속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낙랑•대방 양군(兩郡)태수가 공격한 '한(韓)'을, 삼국사기는 분명하게 '고구려'라고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같은 사건을 삼국지 한전은 미시적인 관점에서 대방군과 그 인근의 한(韓)세력과의 충돌로 기록했고, 삼국사기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위(魏)와 고구려간에 전쟁 기사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고구려-위(魏) 간에 전쟁이 발발하자 백제 고이왕은 단지 어부지리를 노리고자 한 것뿐이다.

여기서 고구려를 '한(韓)'으로 인식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선입견에 붙들려 고구려 인근에는 예와 맥이 있고 한강이남에는 한(韓)이 있었을 것으로 이해해 왔다. 하지만 한(韓).예(濊).맥(貊) 그리고 말갈=마한도 동일한 종족이고, 지역과 정치체에 따라 달리 불리고, 문헌에 표기되었을 뿐이다. 3세기때까지 광의적 의미에서 동이 열국과 삼국 모두가 '한(韓)' 혹은 '한국(韓國)'으로 통칭되기도 했던 것이다. 이것이 6세기경에 이르면 “삼한”으로 총칭되어진다. 그러므로 삼국지와 후한서의 한전 기사를 읽을때 기존의 통념에서 벗어나 구각을 거둬내고 보아야 할 터이다.

진서(晉書)를 비롯한 한적에는 3세기경 동이제국(東夷諸國)들이 진(晉)을 방문하는 기사들이 여럿 등장한다. 이 기록으로 인해 이 당시까지도 만주와 한반도에는 소국들이 난립하고 있었던 것처럼 오해될 수 있다. 진(晉)이 황하일대를 통일하고 천하를 아우른다는 세계관에 따라 마치 동이제국 다수가 사신을 파견한 것처럼 기술했으나 대륙에 진출해 있던 대륙백제의 군현내 세력들이 내헌(來獻)한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고, 고구려에 예속된 요동반도일대 재지세력들이 고구려사신을 따라 한군현을 내방하여 무역을 한 것을 그렇게 기록했던 것으로도 볼 수 있다. 3세기 당시까지만해도 고구려와 백제는 기존의 진국체제 유습이 많이 남아 있어 지방분권적 재지세력의 독자성이 강하였다. 이러한 면모가 차이나 사가들에겐 진(晉)을 방문한 고구려와 백제 사신단이 마치 동이제국들로 비쳐졌던 것이다.

▲일본 오우치(大内)가문의 족보. 백제 琳聖太子(임성태자)의 후손을 자처하는 이 가문은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 시대에 주고쿠와 규슈 북부를 제패한 강력한 다이묘 가문들 중 하나로 존속했지만, 센고쿠시대(戦国時代 15C중반~16C후반) 스에 하루카타(陶晴賢 1521-1555)의 쿠데타로 사실상 멸망하고, 허울만 남은 오우치 가문도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 1497-1571) 에게 본가가 멸망하고 말았다. 이로인해 다이묘 지위는 상실했지만, 방계가 이어져 가문의 혈통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족보에 기록된 "百濟國馬韓皇帝齊王(백제국마한황제제왕)"이라는 칭호이다. 서기9년 백제의 마한병합 이후 백제왕 중심의 마한(진국)체제를 확인시켜 줌과 동시에 제왕(齊王)을 자칭하며 대륙의 산동과 요서일대를 경영한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태강7년(286) 8월에 동이십일국(東夷十日國)이 내부했다' 했으나 후술한 바를 보면 '마한등십일국(馬韓等十日國)이 내헌했다'고 밝히고 있다. 백제는 3세기대까지 대외적으로 공신력이 있던 "마한(馬韓)"이라는 국호를 사용하며 예속된 지방 재지세력의 수장층과 상단을 이끌고 진(晉)과 교역했다. 이것을 마치 동이의 제소국이 방문한 것처럼 표현되었던 것이다.

진(晉) 태강3년(282)에 마한의 신미제국(新彌諸國)이 조공한 기사도 나오는데, 이것은 백제(마한)왕이 신미국의 수장을 백제(마한)사신으로 삼아 그 손에 국서를 들려주어 신미국이 거느리는 재지세력들의 상단을 이끌고 진(晉)을 방문하도록 한 것일터이다. 후에 일이긴 하지만 발해(渤海)의 예속되어 있던 말갈제부의 수령들이 발해사신을 따라 당과 일본에 가서 무역한 사례들을 상기하면 백제 초중기 당시에 그 예하에 부용하던 신미제국(新彌諸國) 수장층이나 무역단이 진(晉)을 방문했던 것임을 능히 유추할 수 있겠다.

차이나 사가(史家)들이 전문(傳聞)하여 기록한 단편적인 동이의 민족지(民族誌)를 가지고 삼국이전 한국고대사를 복원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국내 사서를 중심에 두고 차이나 사가들이 전문하여 기록한 사료를 보조로 삼아 우리의 관점에서 사료를 면밀히 살펴 역사의 진상을 복원해 가야하리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