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석현장(역사연구가, 스님)

98명 임진왜란 공신 중 18명만 무신,

나머지 80명은 선조 호송한 환관

전공 세운 장군들은 고문, 무신 차별대우

이몽학의 난, 무신들에 대한 차별대우 때문

선조, 김덕령 누명 씌워 잔인하게 죽여

곽재우 등 의병장들 모두 피신 산으로 숨어

정유재란 때는 의병 안 일어나

의병으로 무사했던 호남, 왜 침으로 쑥대밭

▲충장공 김덕령 진영

- 꿈속에 나타나 억울함을 하소연한 충장공 김덕령 이야기 -

임진왜란이 끝나고 전쟁 중 공을 세운 장수들에 대한 훈장이 수여되었다. 98명에 일등무공훈장이 내려졌다.

그중 80명이 문신이고 목숨을 걸고 싸운 무신들은 겨우 18명이었다.

더욱 황당한 것은 80명 문신 대부분이 자신의 몽진을 도와준 신하들과 의주까지 호종한 환관들이었다.

전공을 크게 세우고 백성들의 영웅이 된 장군들은 수시로 불려가 볼기를 맞았다. 조선 조정은 장수들에게 전공에 합당한 대우를 해주지 않았다.

이런 무신 차별대우에 불만을 품고 일어난 것이 충청도 부여에서 발생한 이몽학의 난이다.

그는 농민 세력을 모으면서 김덕령 의병장과 곽재우 장군 등이 우리와 뜻을 함께하여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선전하였다.

이몽학의 난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다.

당시 진주에서 권율장군 휘하에 있던 김덕령에게 이몽학의 반란군을 토벌하라는 명이 내려왔다. 천하 명장 김덕령이 부대를 이끌고 반란군을 토벌하러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몽학 부대는 큰 혼란에 빠졌다.

역도로 몰려 죽임을 당할 것이 두려운 부하들이 이몽학의 목을 쳐서 반란은 쉽게 진압되었다. 남원까지 행군하던 익호장군 김덕령은 진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반란군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곽재우, 김덕령 등이 동조 세력이라고 허위자백하는 바람에 김덕령도 포승줄에 묶여 선조의 직접 국문을 받게 된다.

선조가 김덕령을 국문한 내용이 선조실록에 나온다.

선조: “너는 역적 한현, 이몽학의 무리와 결탁하여 나라가 위급한 틈을 타 반역을 꾀했다. 이제 숨김없이 사실대로 고해라.”

김덕령: “시시비비는 분명해야 하거늘 어찌 조금이라도 감추겠습니까?

신은 나라를 위해 친척을 작별하고 선영을 버리고 온갖 고초를 겪었습니다. 나라에서는 오히려 상을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신이 헛된 이름을 지녔기에 적도들이 신을 시기하여 모함한 듯합니다. 7월 14일에 도원수의 명령에 따라 적도들을 치기 위해 달려갔으나 이미 진압되어 본진으로 돌아간 것밖에는 아무 죄가 없습니다.”

당시 류성룡은 그의 죄란 역도들이 찍어다 붙인 것에 불과하니 시일을 두고 자세히 조사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그때 선조는 김덕령 같은 자는 고문을 당해 죽어도 괜찮다는 극언을 하였다.

이순신 장군을 27일간 국문하고 고문하였듯이 김덕령 장군을 여섯 차례에 걸친 혹독한 고문을 하였다. 무릎에 살이 터지고 뼈가 드러나는 고문 끝에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심정을 노래하였다.

“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에 내 없는 불이 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그의 나이 29세였다. 지혜는 제갈량에 견줄 만하고 용맹은 관운장에 견줄 만했던 충장공 김덕령은 그렇게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하였다.

김덕령의 억울한 죽음은 정유재란 때 백성들의 재앙으로 나타났다. 김덕령의 부장으로 있던 최현령은 바보행세하고 지냈으며 아무도 의병으로 나서지 않았다. 최초의 의병장 곽재우는 의병을 모두 해산하고 은둔생활을 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피해가 없었던 호남이 정유재란 때 백성들이 어육으로 엄청난 희생을 치른 것은 의병대장 김덕령의 억울한 죽음으로 의병의 씨가 말랐기 때문이다.

일설에는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 막바지에 스스로 몸을 드러내어 왜군의 총을 맞고 숨진 것도 김덕령 같은 최후를 예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형님의 억울한 죽음을 듣고 동생 김덕보는 세상을 등지고 무등산 자락에 은둔하였다. 김덕령의 부인 흥양이씨는 담양 추월산에서 왜군에게 쫓기다 보리암 절벽에서 몸을 던져 정절을 지켰다.

▲설주 송운회의 주련이 걸린 취가정


전쟁이 끝나고 송강 정철의 제자 석주 권필의 꿈에 모진 고문으로 죽은 김덕령이 나타났다. 자신의 원통함을 호소하면서 한 맺힌 노래를 불렀다.

<취시가> 술에 취해 부르는 노래

“술에 취해 부르는 나의 노래는

들어 주는 사람 아무도 없네

나는 꽃이나 달에 취하고 싶지도 않고

공훈을 세우고 싶지도 않네.

공훈을 세운다니 이것은 뜬구름

꽃과 달에 취하는 것 이것 또한 뜬구름

술에 취해 부르는 나의 노래는

들어주는 사람 아무도 없네

내 마음 바라기는 긴 칼로

밝은 임금 받들고자 하네”

석주 권필은 꿈에서 깨어나 김덕령의 취시가를 받아 적었다. 그리고 장군께 올리는 화답시를 적었다.

“장군은 지난날에 창을 잡고 나섰건만

씩씩한 뜻 중도에 꺾이니 운명을 어찌하리

지하에서 영령이 품었을 무한한 한이

한 곡조 취시가 속에 분명히 드러나누나”

충장공 김덕령의 생가에서 가까운 충효동에 취가정이 세워진 내력이다.

취가정의 편액과 주련은 보성출신 설주 송운회의 작품이다.

“충성은 일월을 꿰고

명성은 하늘을 찌르네

취한 노래 땅에 가득하고

기운은 산하에 장엄하다”

▲ 광주광역시 충효동의 취가정



1661년에 그의 억울함이 풀려 관직에 복직되었다. 1680년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1788년 충장공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태어난 마을에는 충효리라는 비석을 세워 김덕령 삼형제와 그의 부인의 충절을 기린다. 충효동의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일제 때 광주의 중심 상권이었던 본정통은 해방 후 1947년에 김덕령 장군을 기리는 충장로가 되었다.

광주시와 동구청은 광주의 대표축제로 축 장거리 축제를 화려하게 진행하고 있다.

그런데 충장축제의 주인공 충장공 김덕령은 찾아볼 수 없다.

출처: https://www.facebook.com/hyunjang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