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석현장(역사연구가, 스님)

“뜬구름 같은 세상에서

물거품 같은 중생을 제도하고

밑 없는 배를 타고

물결치는 대로 맡겨 두어라.”

▲사명대사 진영이다.


적국에 수신사로 가서 일 본 임제종 승려들의 스승이 된 사명대사 이야기

사명대사 일행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정상회담을 앞두고 교토에 머물고 있을 때 오초라는 일본 승려가 찾아왔다. 그 당시 일본 불교계에 사명대사의 활동과 법력은 널리 알려져 생불, 살아있는 부처님이 우리나라에 오셨다고 알려졌다.

오초는 사명대사를 친견하고 품에서 그림을 한장 꺼내서 바닥에 펼쳤다. 달마도였다. 자신이 그린 달마도에 어울리는 찬을 대사께 부탁하였다. 달마도를 찬찬히 들여다보던 사명대사는 곧바로 붓을 들어 단숨에 달마도 상단에 일필휘지로 사행시를 적었다.

[十萬里來靑眼少 십만리래청안소

九年虛度少林春 구년허도소림춘

不逢末後神光拜 불봉말후신광배

也是流沙浪徒人 야시유사낭도인

십만리를 왔어도 눈 갖춘이 없어

구년이나 소림의 봄을 보냈더라

만일 신광이 예배하지 않았다면,

류사流沙를 달리는 건달이 될 뻔했구나.]

사명대사 달마찬이다. 여기서 靑眠은 눈밝은 자, 즉 깨달은자를 말한다.그 당시 중국불교는 염불. 사경. 공덕수행으로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정토불교와 교학불교 중심이었기 때문에 수행으로 깨달은 자가 없었다. 그런 이유로 달마대사는 소림면벽 9년으로 제자를 기다렸던 것이다.

막중한 사명을 띠고 대한해협을 건넌 사명대사는 일본불교의 극진한 존중과 환대를 받는다. 그러나 실질적인 외교성과가 없다면 떠돌이 조선 중에 지나지 않을 것이란 자신의 심정을 달마도 찬을 통해 표현하지 않았을까.

▲사명대사 달마도로 알려진 작품이다. 사실은 달마도는 일본 스님이 그리고 사명대사가 그림에 찬을 쓴 것이다.

한번은 임제종 승려 원이가 찾아왔다. 대사를 친견하고 선문답을 나눴다. 대사의 걸림 없는 지혜에 탄복한 원이는 대사님을 선가의 스승으로 모시고 싶다고 일어나 삼배의 큰절을 올렸다.

일본 임제종 흥성사 승려 원이에게 허응이란 법호를 내려주면서 아래와 같은 선시를 적어준다.

[집으로 돌아갈 활로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곧장 위음왕 저쪽까지 뚫고야 멎어라

물건을 볼 때 마음을 비워 집착하지 말고 기를 돌려 비춰보면 깨달음이 있으리라

정수리에도 눈이 있음은 천주와 같고

팔꿈치 뒤에 부를 다니 국후와 같다.

뜬구름같은 세상에서 물거품 같은 중생을 제도하고 밑 없는 배를 타고

물결 치는 대로 맡겨 두어라.]

해인사 홍제암에 있는 사명대사 행적비이다. 홍길동전을 쓴 허균이 비문을 썼다.

일제때 비석에 총을 쏘아 네 조각으로 파손되었다. 해방 후에 조각을 다시 모아 복원한 것이다

사명대사의 선맥이 일본 임제종으로 전수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일본의 막부정권시절 한시를 짓거나 필담으로 대화를 나누고 외교문서를 작성할 수 있는 직급은 일본불교의 고위 승려들이었다. 조선 초기 태종·세종. 세조 때 조선 국왕을 만나 일왕의 서신을 전한 이들은 모두 일본 승려들이었다. 그들은 조선 국왕과 공식적인 회담을 끝내면 일본불교에서 필요한 것을 요구하였다.

해인사의 대장경판을 찍어 달라. 범종 만드는 기술자를 보내 달라. 이제는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필요 없는 경전과 불화를 달라고 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일왕사들이 올 때마다 대장경을 요구하니 너무 귀찮아서 차라리 해인사 대장경판을 모두 일본으로 선물하자는 얘기까지 거론된다.

막강한 사회적인 지위를 지닌 일본 임제종 승려들이 사명대사의 인품과 법력에 감화되어 삼배를 올리고 선가의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

임진왜란의 책임소재를 가리고 앞으로의 화평을 위한 수신사의 길에서 사명대사의 역할이 크게 빛나는 현장이다.

적국의 고승들이 줄지어 참배하고 스승으로 모시는 모습과 지난 정권이 외국에 가서 외교관 신분으로 자행한 추태가 국가 망신으로 돌아오는 현실과 비교된다. 사명대사의 이야기는 오백 년 조선 역사를 통하여 최고의 외교성과로 평가받고 있다.

▲일본 임제종 승려 원이에게 허응이란 법호를 내려주다.
▲불심종조 달마 원각대사라고 쓰고 달마 37세손 송운이라고 썼다


아래는 임진왜란의 명장 권율장군이 사명대사가 일본으로 떠날때 보낸 송별시이다.

[만리의 길에 험준한 바다물결

한폭의 돚대로 행하니

하늘에 닿은 섬들은 마치 떠있는 아지랑이와 같음이로다.

이번 길에 왜적의 무리가 반드시 항복하리니

모름지기 관백을 가르쳐 다시 예경으로 합장함이로다.]

부채형 현판에 반듯하고 강인한 예서체로 쓰여졌다.

▲권율 송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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