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석현장(불교 역사 연구가)
일제, 한양도성문 중 남대문, 동대문은 철거 안해
임진왜란 때 왜군의 도성 함락 개선문 역할 때문
임진왜란 발발당시 서산대사 토굴서 73세 맞이
대사 제자, 영규스님이 청주성 탈환 등 승전 소식
서산대사가 이끄는 승군, 평양성 탈환에 결정 역할
명나라 이여송 장군, 대사의 고매한 인품에 헌시
▲ 임진왜란 당시 승군을 지휘하는 서산대사 기록화
모란봉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평양성 탈환에 큰 공을 세운 서산대사 이야기
선조 25년 (1592년 4월 13일)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부산성이 함락되고 왜군은 20일만에 한양에 입성했다. 소서행장은 동대문으로 가등청정은 남대문을 통하여 들어왔다.
후에 일제는 사대문을 모두 철거할려고 했으나 임진왜란에서 개선문 역할을 했다는 이유로 남대문은 국보 1호 동대문은 보물 1호로 각각 지정하였다.
조선은 독립되었으나 친일파들의 득세로 아직까지 국보1호도 바꾸지 못하고 있다.
임진왜란이 나던 해 서산대사는 묘향산 토굴에서 73세를 맞이하고 있었다.
선조는 나라를 지키려 하기보다 제 한목숨 지키기 위해 의주까지 도망하여 행재소를 차렸다.조금만 밀리면 조선을 버리고 명나라로 망명할 준비를 하였다.
서산대사는 아비규환 속에서 신음하는 조선백성들을 생각하였다.
나라는 불교를 버렸지만 불법은 나라를 버릴수 없다. 자비로써 구제해야 할 중생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왜놈들이 조선 백성들의 귀와 코를 잘라 소금에 절여 전리품으로 가져간다는 소식을 듣고 치를 떨었다.
마침 대사의 제자 영규 스님이 승병을 이끌고 왜군토벌에 나서 청주성을 회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영규스님은 서산대사의 제자로 공주 청련암에서 무예를 익혔다.왜란이 일어나자 최초로 승군을 일으켰고 전국적으로 승군이 일어나는 도화선이 되었다.
임진년 9월 선조는 청주성 탈환에 승군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말을 듣고 문득 3년전에 만난 서산대사가 생각났다. 묘향산으로 사람을 보내 대사를 의주 행재소로 초청했다.
3년만에 서산대사를 본 선조는 대사에게 매달렸다.
나라의 위태로움이 이와 같은데 대사께서는 어찌 나를 잊었단 말이요. 무슨 도술을 부려서라도 나라를 구할 방도가 없겠소. 대사께서는 부디 도탄에 빠진 이 나라 백성들을 구해주시오.
임금의 간절한 하소연을 들은 대사는 가슴이 답답하였다.
“어찌하다가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불교를 불효 불충의 가르침이라고 국법으로 탄압하고 승려는 천민으로 내치더니 인과의 시기가 무르익어 올 것이 왔구나.” 하고는 선조에게 말하였다.
“소승에게 무슨 계책이 있겠습니까마는 전국의 승려들을 모아 창과 방패를 들고 적군을 물리쳐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고 나라를 구할 것입니다.”
서산대사는 선조의 명을 받들어 팔도십육종도총섭이 되어 드디어 백마를 타고 전장에 나섰다.
조선팔도에 선종과 교종 총섭을 두고 팔도의 총섭을 지휘하는 직함이었다.
서산대사는 전국사찰에 격문을 보냈다. 당시 대사를 따르는 제자가 1천명이 넘고 한 산중을 이끌만한 덕망 높은 제자도 70명이 넘었다. 스승의 호소문을 보고 호남의 뇌묵처영. 충청도의 기허영규. 경상도의 중관해안. 구월산의 의엄. 금강산의 사명 등이 승군을 조직하여 순안 법흥사로 모여 들었다.
서산대사가 이끈 승군은 특히 평양성 전투에서 용맹을 떨치고 큰 공을 세웠다.
이 전투에는 우리 관군과 명나라 이여송 군대. 그리고 승군이 합세하였다. 평양성에서는 소서행장이 이끄는 5만의 왜군이 지키고 있었다. 대사는 평양성 공격에 앞서 전략적 요충지인 모란봉을 공격하여 탈환하는 것이 평양성 전투의 사활이 걸렸다고 판단하였다.
왜군도 모란봉을 중시하여 2천의 병력으로 수비하였다. 그러나 서산대사가 지휘하는 용맹한 승군들의 공세에 모란봉의 왜군 막사는 불타고 승군의 깃발이 올라갔다.
곧이어 명군의 포병부대가 모란봉에 올라왔다. 평양성이 내려다보이는 모란봉에 포진지를 설치하고 공격하니 큰 피해 없이 평양성을 탈환할 수 있었다.
이여송 장군이 모란봉을 찾아와 서산대사를 친견하였다. 대사의 고매한 인품에 감동한 이여송은 시 한수를 바쳤다.
“삼가 큰스님의 옥장 아래 봉정합니다.
공명과 욕심에는 뜻이 없고
오직 불도를 닦는 일에만 전념하셨네
위급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총섭이 되어 산에서 내려 오셨네”
그 모습을 지켜본 조정의 한 대신이 한탄하는 시를 남겼다.
선조 26년 평양성을 탈환하고 이어서 10월에는 한양을 되찾았다. 선조는 대사로 하여금 어가를 호위하게 하였다.
대사는 젊은 승군 100명을 선발하여 어가를 호위하게 하였다.
선조는 전란 중에 모든 관리들은 서산대사를 재상처럼 대우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서산대사 승군은 수도경비 사령부로 격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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