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종성(바른역사알기운동 대표)
김유신가(家)는 누대에 걸쳐 평양을 경영
신당전쟁 과정에서 통일신라군은 요동으로 진격
통일 이후 대신라 북경(北境)은 최소 압록강에 이르러
최근 신라의 영토가 혼하~길림합달령~연변 선에 이르렀다는 연구도 있어
▲남산공원에 있는 김유신의 동상. 그는 가야국의 시조 수로왕의 후손으로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함께 삼국통일을 이루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당은 그에게 ‘平壤郡開國公(평양군개국공)’이라는 작위와 함께 평양일대를 분봉지로 하사하며 회유하였고, 그의 후손들은 ‘平壤州(평양주)’를 설치하여 경영하였다.
통일을 이룩한 대신라의 북방경계와 관련하여 기존 통설은 신-당전쟁이 끝나는 675년에서, 당이 패강 이남의 영유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735년까지 그 한계가 임진강에서 함경남도 덕원(德源) 선에 이르렀고, 당의 양해 하에 겨우 대동강에서 원산만 정도를 확보했다고 한다. 이러한 전제는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회의론을 불러일으켜 쟁론을 야기시켰고, 논쟁의 과정에서 도출된 억설들은 중국 동북공정에 이용되는 어이없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1차 사료를 가지고 따져보면 현 통설이 역사적 사실과는 동떨어져 있음에 놀라게 된다. 신라 북방경계와 관련하여 이미 2007년도 강경구의 연구(“김유신의 평양왕국과 신라의 북방영토” [학연문화사])가 있어 주목되는데, 그는 김유신이 당으로부터 받았던 봉지(封地)와 작위에 대하여 주목하였다. 김유신은 신당연합군이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665년 당으로부터 평양을 관할하는 군공(郡公)이라는 제후의 작위를 받게 된다.
'인덕(麟德) 2년(665)에 당 고종(高宗)이 사신 양동벽(梁冬碧), 임지고(任智高) 등을 파견해 예물을 보내고 아울러 김유신을 봉상정경(奉常正卿) 평양군(平壤郡) 개국공(開國公) 식읍(食邑) 2,000호(戶)에 책봉하였다'<삼국사기 김유신열전 하>
이것은 전승(戰勝) 후에 평양 일대를 그에게 영지(領地)로 하사하겠다는 당의 약속이었는데, 이것을 달리 생각하면 곧 신라에게 그 지배권을 넘기겠다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다. 3년 후에 당주(唐主)는 조칙을 통해 평양 일원에 대한 김유신의 지배권을 재확인시켜 주기도 했다. 이 당시 당이 김유신을 '평양군공(平壤郡公)'으로 책봉한 것은 그를 회유하여 전공을 이끌어 내기 위한 차원도 있었겠지만, 한편으로는 신라 지도층의 내분을 조장하려는 전략적 목적도 있었을 터이다.
신-당연합군은 668년 평양성을 함락하여 고구려를 붕괴시켰지만, 이듬해 초 평양 인근에서 검모잠(劍牟岑)의 고구려 부흥군이 봉기하였고, 이들과 합세한 김유신 군대에 밀려, 평양에 설치되었던 당의 안동도호부가 요동의 신성(新城)으로 쫓겨가게 된다. 이때 신-고연합군은 평양일대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것에 힘입어 670년 3월에 신라장군 설오유는 고연무를 필두로 하는 고구려부흥군과 연합한 일종의 통일신라군(統一新羅軍)을 꾸려 압록강 이북으로 진격하였다. 요동의 반당세력과 연합전선을 구축하고자 했던 것이다. 통일신라군은 당군과 "개돈양대전(皆敦壤大戰)"에서 맞붙어 승리하였으나, 당의 후원군이 연이어 계속 파견되자 일단 후퇴하여 백성(白城)에 주둔하게 되었다. 이때 당군은 안승(安勝)을 따르는 요동의 반당세력을 소탕하는데 여념이 없어 압록강이남을 넘볼 겨를이 없었다.
검모잠은 한성(漢城)에서 안승을 왕으로 옹립하여 고구려를 재건하게 되었지만, 곧이어 검모잠과 안승은 부흥군의 진로를 두고 갈등하다. 결국 안승이 검모잠을 처단하고 자신이 수복한 지역을 들어 신라에 귀부하게 된다. 이에 신라는 안승을 금마저(전북 익산)로 이치시켜 보덕왕(報德王)으로 삼았다. 안승의 고구려정부는 670년에서 683년까지 비록 신라의 부용국이긴 했지만, 독자적인 정치와 외교를 펼쳤으며, 그 실질적인 기반으로서 고구려고지 일부를 유지하기도 했다.
이때 평양성은 일부 남아있던 고구려부흥군과 김유신 군대가 공동 점유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같다. 평양일대에 대한 신라의 평정은 김유신 가문이 평양의 영유권을 실질적으로 확보하려는 차원에서 전개된 것이다. 고구려 공격 초기부터 신라는 김유신에게 정벌군 총사령관 격인 '양하도총관(兩河道摠管)' 직을 맡겨 평양 지방 군량 수송을 위임하고 있었다. 이 직책은 두 하천 지역에 대한 군사 전제권을 부여한 것으로서 승전 후에도 김유신 군병이 점령 지역을 진수(鎭戍)하도록한 것이다. <삼국사기>는 향고기(鄕古記)라는 사서를 인용하여 '김유신이 평양지방을 진수하고 있었다(與<新羅><金庾信>等 戍之)'고 명기하고 있다.
평양에는 김유신과 관련된 "추남설화(楸南說話)"라는 것이 전래되는데, <삼국유사> 김유신전에 따르면 고구려 말기에 억울하게 처형당한 추남이 사후에 환생한 인물이 김유신이라는 것이다. 이 설화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김유신이 고구려인 내지 고구려적(高句麗的)인 신라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류의 이야기는 경북 문경 출신인 후백제 진훤(甄萱)이 광주여자의 소생이라든지, 삼별초 대장 김통정이 제주 소생이라는 전승에서도 엿볼 수 있다. 당사자들이 현지민들과 유대의식을 강화하기 위한 차원에서 꾸며낸 이야기일 수도 있고, 당시 지역민들이 자기네들과 접촉한 영웅들을 자기 고장 출신으로 미화하려는 욕구의 투영으로도 볼 수 있다. 아무튼 평양지역에 김유신과 관련된 전설이 내려온다는 사실은 평양과 김유신가(家)의 깊은 인연을 보여주는 것이다.
당은 672,673,675년 3차에 걸쳐서 신라를 대대적으로 침공해 왔다. 672년 9월에 고간, 이근행이 이끄는 당군의 침입으로 평양성을 도로 빼앗기게 되었는데, 이때 김유신의 차자인 원술(元述) 부대가 패전하게 되면서 김유신가는 영지를 상실하게 되었다. 673년 발로하 전투에서는 고구려부흥군이 패전하게 되면서 고구려 복국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고, 674년 유인궤가 이끄는 당군이 칠중성을 함락하면서 기세를 높였지만, 이듬해 매소성전투에서 신라가 결정적으로 승리하게 되면서 당을 요동일대로 몰아내게 된다(675).
▲기록화 : 매소성전투. 당의 이근행이 군사 20만을 이끌고 매소성에 머물렀는데 통일신라군이 공격해 대승을 거두어 신라땅에서 외세를 완전히 축출하게 된다. 이 전투에 김유신의 서자 원술이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고, 이후 김유신가는 상실했던 평양 일대를 다시 되찾아 누대에 걸쳐 경영하게 된다.
신라는 퇴각하는 당군을 쫓아 압록강까지 이르렀는데, 그 과정에 중간지역의 하천을 안북하(安北河)로 명명하고 그곳에 관문성(關門城)을 쌓게 된다. 당은 신라의 요동 진출을 방어할 차원에서 676년 안북하 이북에 소재한 것으 로 보이는 *도림성(道臨城)을 공격해 왔으나 신라는 이 전투에서 당군을 패퇴시킴으로서 압록강이남까지 신라의 영향력을 미칠 수 있게 되었다.
*도림성을 기존 통설은 강원도 통천 부근으로 비정하나 상식적으로 압록강 이북으로 철수하여 가는 당군이 강원도 동해안에서 마지막 전쟁을 벌였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안변일대가 당측에 접수되어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675년 원술(元述) 부대는 매소성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평양지방을 수복하게 되면서 김유신의 서자였던 원술에 의한 평양 지배가 이루어진다. 김유신 사후에 "평양군개국공"의 작위는 장남 삼광에게 승습되어 갔을 것이나, 평양주(平壤州) 도독직(都督職)은 원술이 임명된 듯 싶다. 얼핏 생각하면 평양주 도독이 관할하는 행정경역과 평양군공의 식읍관할지가 중첩되는 면을 보이나 이것은 호수 분할을 통한 공동관리가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되어야할 터이다.
그리고 신라는 고구려 남경(南境)을 점유하고 그 지역을 "향수제(鄕戍制)"로 편성했는데, <삼국사기> 권37 고구려 지리지 말미에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 조에는 많은 향(鄕)과 수(戍)가 언급되고 있다. 아마도 군현제 실시에 앞서 김유신을 중심으로 한 군벌세력들의 경제적 수취 구조를 담보해 줄 목적에서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둔전적(屯田的) 지배에 유사한 이러한 변방 지배방식은 그 후 고려와 조선의 변경지배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김유신의 평양 지방에 대한 연고권이 재확인되는 것은 그 적손 윤충(允忠)에 와서이다. 8세기 중엽 당은 대진(大振 발해) 공격에 신라의 참전을 청하였고, 신라는 김유신의 손자 윤충, 윤문 등을 장군으로 임명해 대진을 공격하게 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귀환하게 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신라는 당으로부터 패강 이남 영유를 공인받게 되었는데, 성덕왕은 윤충에게 평양일대 시찰을 명하였다(736). 윤충은 평양 검찰 이전부터 평양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면서 그 지역의 지리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북정(北征) 사령관의 소임을 맡을 수 있었고, 시찰까지 담당한 것이였다. 기존 통설은 당의 공인이 있은 후에 신라가 패강까지 이르렀다고 생각하나, 그 이전부터 평양주(平壤州)는 설치되어 있었다.
선덕왕 3년(782)에는 패강진(浿江鎭)이 설치되고, 김유신의 후손 김암(金巖)이 그 무렵에 패강진 두상대감(頭上大監)으로 취임하여 진수(鎭戍) 활동을 벌렸다. <적인선사 비문>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패강진이 평양에 설치되었다고 한다.
일본인학자 천전강도(千田剛道)의 와당 연구에 의하면 평양 안학궁성에서 발견된 와당(瓦當)들은 7~8세기로 편년된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고구려 와당이 고구려 멸망후에도 이어지고 있는 셈이니, 일상 권력이 계속 존재했던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평양 지방에 김유신 가령(家領)이 설치되어 있었다는걸 반증하는 것이다.
황해도방면에는 패강도(浿江道)가, 평양일대는 평양주(平壤州)가, 안북하 이북에는 패서도(浿西道)가 설치된다. 대신라의 하대 어느시점엔가 중앙권력이 쇠퇴하자 "패서적구(浿西賊寇)"라 불리운 반독립적인 할거세력이 있다가 후에 궁예(弓裔)에게 귀부하였고, 그곳에 패서13진(浿西十三鎭)이 설치되고, 뒤늦게 패강도의 호족들도 투항하게 된다.
대신라의 강토가 최소한 압록강까지 이르렀다는 인식은 여러 기록에서도 확인되는데, <고려사> 지리지 서문에는 '...당(唐)이래로 *압록(鴨綠)을 경계로 삼았다'라고 한다. 이것은 당이 존립하던 시기에 대신라의 북방경계가 압록 이남이라는 것이다. <고려사> 북계 총서에도 '보장왕 27년(667) 신라 문무왕이 당과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키어 그 땅이 마침내 신라로 들어갔다'고 되풀이하여 강조하였다.
*여기서 압록은 강(江)이 아니라 지명(地名)일 가능성이 있다. 압록의 어원이 되는 만주어 ‘야루’는 땅의 경계 혹은 어느 지역이라는 말로도 해석된다. 고구려 시기에는 압록원(鴨綠原), 압록곡(鴨綠谷), 압록책(鴨綠柵)이라는 지명이 있었고, 대진(발해)의 서경은 압록부(鴨淥府)에 있다는 것을 볼 때도 <고려사> 지리지 서문의 ‘압록(鴨綠)’은 요동에 있는 “어느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 예종12년(1171) 3월, 갑오에 백관이 표문을 올려 축하하며 말하길, '압록(鴨綠)은 신라의 옛 터이고 계림(鷄林)도 옛 땅으로 조정 때부터 본래 옷깃의 띠처럼 방비를 했던 것입니다'"라고 기록했다. 이를 보면 당시 고려의 백관들은 압록이 신라의 영토임을 알고 있었다.
일찍이 장도빈(張道斌, 1888~1963)은 신라의 북계가 청천강이라고 밝혔고, 정약용(丁若鏞)을 비롯한 조선후기 실학자들은 신라의 평양 점유를 인정하고 있었다. '개원(開元)24년(735) 당 현종이 패강(浿江) 이남을 신라에게 조칙으로 하사하였으나 그 실제에 있어서 패강 이북도 역시 (신라에) 기미되어 있었던 것이고, 그 다스림에 있어서나 (관리의) 내침에 있어서 당은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라고 하여 소위 당 현종의 패강 이남에 대한 영유권 인정은 외교적 언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조선후기 한백겸(韓百謙) 이래로 패강 이북을 대진의 영토로 이해하고 있으나, 정작 서북한일대에 비정되는 대진의 주군(州郡)은 보이질 않는다. 오히려 <삼국사기>에는 이 평양지방에 해당 될 수 있는 신라의 향(鄕)과 수(戍) 등의 명칭이 전해 내려오고 있고, <고려사> 북계의 지명들 중에는 '본래 고(구)려의 무슨무슨 군(郡)'이라는 표현은 있어도 대진의 주현과 관련된 지명은 하나도 없다.
일야개삼랑(日野開三郞)은 요동반도에 8세기 이후 당의 부용국으로서 고덕무(高德武)의 소고구려국이 있었다고 하면서도 그 영역이 압록강 이북에 한정된다고 하는 것만 보아도 압록강 이남은 대진도 당도 아닌 대신라의 강역이였던 것이다. 보장왕이 안동도호부로 파견되어 조선왕(朝鮮王)이 되어 말갈인과 복국운동을 벌릴 때에도 평양일대 세력과 제휴했다는 언급이 없다. 따라서 신라의 북경(北境)이 압록강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기존 통설을 뒤엎는 이러한 연구성과가 발표되어도 대신라의 영토가 수정되지 않고,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추정하여 그려놓은 강역도를 지금까지 사용하며, 신라의 삼한통일에 딴지를 걸고 엉뚱한 주장을 일삼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대중적인 설득력을 상실한 기존 학설이 마치 종교의 도그마처럼 행세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는 조속히 지도를 바꾸어야 한다.
*최근 학계에서 고구려 당시 압록강(鴨淥江)이 요하(遼河)이고, 고구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은 중국 요령성 요양(遼陽)이며, 패수(浿水)는 태자하(太子河)이고, 신라의 천정군(泉井郡)은 연변의 룡정시(龍井市)라는 연구가 있다. 그렇다면 김유신가(家)가 경영한 관할지와 안북하(安北河)와 패서도(浿西道)와 같은 지명들은 요동반도 일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향후 강호제현(江湖諸賢)의 보다 진일보한 연구를 기대한다. 일단 여기서는 강경구의 연구를 인용하여 기존 통설이 1차사료와는 맞지 않는 엉터리라는 사실을 밝혀 놓고자 한다.
▲ 左>새롭게 고증된 압록수(鴨淥水)-살수-평양성 위치도
(‘고구려평양성과그연관관계연구’ 복기대著 [우리영토])
右> 인하대 고조선연구소가 발표한 대신라 영토 예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