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 유엔 안보리 한국전쟁 참전 거부권 행사 안 해

미국을 한반도 전쟁에 묶어 두어 동유럽 공산화가 목적

2005년 러시아 국립문서보관소 스탈린 편지서 밝혀져

거부권 불행사로 한국전쟁 내전에서 국제전으로 비화

▲서기1953. 미군병사가 인민군 소년병을 생포하고 있다.

자료: https://www.nytimes.com/2018/05/10/opinion/end-korean-war.html

625 동족상잔 한국전쟁(한국전쟁)의 수수께끼 중의 하나가 서기 1950.06.27. 열린 국제연합(유엔)의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에 소련이 참석하지 않은 것이다.

김일성이 서기 1950.06.25. 새벽에 “폭풍”이라는 작전 명령으로 38도선 전역에 걸쳐 전면 남침을 개시한 지 이틀 만에 미국은 재빠르게 유엔 안보리를 개최하여 한국전쟁 유엔군 파병 안건을 처리하려고 하였다.

소련은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한국전쟁 파병 안건을 거부하면 안건은 폐기되어 실행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한국전쟁은 김일성의 요청과 인민군을 무장시키고 전쟁물자를 전폭적으로 지원한 소련의 스탈린이 승인하여 일어났다. 여기에 모택동이 동의하였다. 물론 이전에 꾸준히 국지전이 있었지만, 전면전은 김일성이 스탈린의 지원과 승인을 받아 일으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한국전쟁의 진실과 수수께끼』 A.V.토르쿠노프 지음, 구종서 옮김, 2003.).

당시 유엔 주소련 대사, 야곱 말리크(Yakov Malik's)는 유엔 안보리의 한국전쟁 찬반 거수투표를 하는 자리에 없었다. 투표하기 바로 전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장을 나갔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은 스탈린이 회의장에 있는 말리크에게 연락하여 불러냈다는 것이다.

유엔군의 한국전쟁 참전 여부 찬반투표를 고의로 하지 않은 것이다. 기권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트루먼의 미국은 이로써 일사천리로 한국전쟁 참전을 주도하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부터 인민군을 소련제 무기로 중무장시키고 전차 기계화 부대까지 만들어 준 스탈린이다. 이는 김일성의 뜻대로 미제국주의자들과 친일 민족 반역자들이 지배하는 남한을 완전하게 해방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유엔 안보리 한국전쟁 참여 의안에 거부권을 행사하여 미군과 유엔군 참전을 막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1950.06.27. 미국 대통령 트루먼의 요구로 소집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국전쟁에 유엔군이 참전할지 여부를 묻는 찬반투표. 자료: 한국방송 특별기획 한국전쟁 10부작 중 3부 "폭풍" 발췌 갈무리.

그런데 고의로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서기 2005년 러시아 국립문서 보관소 중의 하나인 사회정치사 문서보관소(RGASPI)에서 발견된 스탈린의 편지에서 거부권 불행사의 비밀을 찾을 수 있다. 이 편지는 안르레 레도프스키라는 러시아 학자가 찾아냈는데 스탈린의 편지는 “문서 번호 fond 558, opis 11, delo 62, listy 71∼72”에 있다.

스탈린의 편지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두 달 뒤인 서기 1950.08.27.에 작성한 것으로 유엔 안보리 거부권 불행사로부터 2달 만이었다.

편지는 체코의 프라하 주재 소련 대사에게 보내는 편지인데 프라하 주재 소련 대사로 하여금 체코슬로바키아 클레멘트 고트발트 대통령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편지를 체코슬로바키아 클레민트 고트발트에게 말로 전달하라고 하였고 고트발트가 요구하면 필사하여 주라는 말까지 남겼다.

편지에서 스탈린은 서기 1950.06.27. 유엔 안보리 한국전쟁 참여 안건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은 이유를 여러 개 들었다. 안보리 상임이사국을 중공이 아니라 대만을 인정하여 이에 대한 항의 표시도 그중 하나다. 또 미국에 대한 여러 가지 불만을 들고 있다. 하지만 그의 한국전쟁 전폭 지원과 승인을 보면 이는 단지 거부권 불행사의 핑계로 보인다.

거부권 불행사의 진짜 이유는 다음 구절에서 보인다.

“미연방 합중국이 극동에 묶여 현재 유럽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다는 사실도 명백하다. 이 같은 사실은 세계의 세력 균형에 있어서 우리에게 득이 되지 않는가? 의심할 바 없이 그렇다.”

스탈린은 미국을 한국전쟁에 묶어 두기를 바랐다. 당시 상황은 2차대전이 끝나고 미국의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의 공산주의 양대 진영으로 나뉘어 냉전체제로 세계가 흘러가고 있었다. 소련은 동유럽에서 공산주의 국가를 늘려 가고 있었다.

냉전으로 치닫는 당시 유럽은 소련에 대응하기 위한 서유럽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와 이에 대응하는 소련의 바르샤바조약기구(WPO, Warsaw Pact Organisation)로 대치하고 있었다. 유럽으로 몰리는 미국의 압도적인 힘을 극동 한국전쟁으로 분산시켜 균형을 이루겠다는 의지가 편지에 담겨 있다. 다음 글을 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미국을 극동에 묶어 둠으로써)이는 유럽에서 사회주의를 강화하는 시간을 줄 것이며, 더구나 미국과 중국의 투쟁이 극동의 전 지역을 혁명화할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런 모든 것들이 세계의 세력 균형에 있어서 우리를 유리하게 만들지 않는가? 의심의 여지 없이 그렇다.”

거부권 불행사가 동유럽 공산화를 강화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에서 전쟁이 계속되고 치열해져야 미국이 국력을 더 소모하게 되고, 이는 유럽에 신경을 쓰지 못하거나 약해지는 것으로 이어진다. “(미군이 한국전쟁에 묶여 있는 것은) 우리를 유리하게 만드는 것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말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 한국전쟁 참여 여부를 묻은 안보리에 나타나지 않은 소련측 대표. 자료: 한국방송 특별기획 한국전쟁 10부작 중 3부 "폭풍" 발췌 갈무리.

결국 스탈린이 한국전쟁 발발 이틀만 에 소집된 유엔 안보리 한국전쟁 참여 여부 투표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는 것은 미군을 한국전쟁에 묶어 두어 동유럽의 공산화를 촉진하기 위한 것이었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북한을 무장시키고 김일성에게 전면 남침 전쟁을 벌이도록 한 것도 김일성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함이 아니라, 스탈린의 동유럽 위성국가를 확장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인민군이 서기 1950.06.28. 서울을 점령하고 3일간 주저앉아 있었는데 이유가 춘천 방면의 인민군이 국군에 막혀 늦게 합류하였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서울에서 인민군이 발이 묶인 원인을 여기서 찾지 않고, 애초 지원해 주기로 돼 있던 탄약 등 물자를 스탈린이 제때 공급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을 받아들이면 전체 그림이 드러난다. 6월 27일 안보리에서 스탈린은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고 인민군에게 제때 무기를 공급하지 않았다. 김일성의 의도대로 속전속결로 전쟁을 끝내 8월 15일까지 남한을 완전히 해방하겠다는 것은 애초에 꿈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스탈린의 의도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가능한 오래가고 치열해지는 것이었다.

만약 스탈린이 거부권을 행사했다면 한국전쟁은 남과 북의 내전으로 끝났을 것이다. 유엔군이 참전하기 전에 참전 여부를 결정할 때 한국전쟁을 내전으로 규정한 발언도 나왔다. 스탈린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는 바람에 한국전쟁은 내전에서 2차 대전에 버금가는 국제전이 되었다.

한국전쟁으로 일본은 물론 미국과 유럽경제가 새롭게 발전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3년간의 지루하고 치열한 공방전으로 우리나라는 전국이 초토화되었고 전쟁을 전후하여 수백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남북 간은 더욱 철천지원수가 되었고 이 후유증은 전쟁이 일어난 지 75년이 되는 오늘날에도 기승을 부리며 남북은 물론 지역 간, 계층 간, 세대 간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며 민족 소모전을 이어가고 있다.

▲전쟁 터로 가는 국군과 피란 오는 생민들. 자료: https://www.history.com/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