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관동군 헌병 입대 독립군 적발로 헌병오장

해방 후 두 번 사형선고에도 두 번 다 탈출

조선경비사관학교 입교 95일 만에 소위 임관

이승만의 사냥개로 “빨갱이” 사냥 수천 명 학살

학살에 분노한 장병이 출근길 김창룡 사살

이승만, 육군 중장으로 추서, 김창룡 나이 39세

현재 국립 대전현충원에 유공자로 누워 있음

▲이승만(좌)과 김창룡(우)


용공 조작의 달인, 이승만의 양아들 특무대장 김창룡 이야기

태어나서 악업만 쌓고 간 김창룡은 함경도 영흥 출신이다.

1940년 일본 관동군 헌병대에 입대하여 만주에서 조선과 중국 항일독립조직 50여 건을 적발하여 헌병오장(하사급)으로 특진한다.

1945년 일본 패망 뒤에 철원에서 체포되어 전범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이송 중 탈출하였다. 1946년 또다시 소련군에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내렸으나 또다시 탈옥하여 월남한다.

미 군정의 도움으로 반공 국가를 충실히 만들어가던 대한민국에서 김창룡은 1947년 조선경비사관학교 3기생으로 입교하여 95일 동안 단기교육을 마치고 소위로 임관하였다. 자신의 주특기인 군 부내 좌익 색출 공로로 소령으로 특진한다.

1949년부터 1956년까지 육군 특무부대를 창설하여 이승만의 정적을 제거하고 독재정권의 초석을 다지는 첨병 노릇을 수행하였다.

이승만 독재 권력의 영구집권을 위해 김창룡이 주역이 되어 조작했거나 과대 포장한 대표적인 사건은 부산 금정산 공비위장사건. 정국은 간첩 조작사건. 동해안 반란사건. 국가원수 암살 음모 사건 등이다.

1948년 제주 4·3사태 진압을 반대하는 14연대의 봉기로 여순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승만은 군법무관 김완용에게 한 달 내로 빨갱이들을 다 잡아 죽이고 오라고 지시하였다.

이때 김창룡이 실무자로 있던 육군 정보국 3과가 나섰다. 1948년 11월 11일 정보요원들은 여순 사태 정보장교인 박정희 소령을 체포하였다.

박정희의 진술로 군대 내 남로당 조직의 인맥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1949년 3월까지 김창룡 방첩부대는 1,500명에 달하는 좌익 장교들을 처형하였다. 당시 군병력의 3분 1에 달하는 엄청난 인원이었다.


독립군 때려잡던 일본군 하사출신 김창룡의 주도하에 군대 내 숙군은 계속되었다. 1949년 7월까지 4,749명이 처형되었다.

숙군 과정에서 짧은 시간 안에 뛰어난 실적을 올린 김창룡은 49년 초에 소령으로 승진하고 6월 육군 방첩대 CIC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불과 2년 3개월 만에 소위에서 중령까지 올라간 것이다.

특히 6·25전쟁으로 피난 수도 부산 근교에 무장공비 출현을 조작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포 분위기를 조장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킨다. 이승만의 재집권을 성공시킨 사건은 안 보문제를 정치에 악용한 첫 사례이다.

김창룡이 일제와 해방 후에 한민족에게 저지른 악행은 끝이 없다. 민족 지도자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가 끌려간 곳은 육군 특무부대였다.

김창룡이 안두희에게 말했다. 안 의사 수고하셨소. 그 뒤로도 김창룡은 안두희를 끊임없이 챙겼다.

6·25전쟁으로 한강철교를 폭파하고 가장 먼저 도망간 이승만은 서울이 수복되자 부역자 처벌을 김창룡에게 맡겼다.

그때 검거된 인원만 15만3825명 자수한 인원은 39만 7,090명이었다. 이 가운데 서울지역에서만 1,298명이 처형되었다.

▲ 좌익 군인들을 처형하는 모습이다.

김창룡이 만든 수많은 조작사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1955년 이승만 암살 음모 사건이다. 과거 독립운동을 했던 나재하.김병호.민영수.김재호.김익중.이범륜.유성연.김동훈에게 이종태라는 청년이 접근한다. 이 청년은 이승만을 비판하면서 노령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도탄에 빠진 국민을 구하기 위해서는 이승만을 제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열혈 청년의 등장에 반가움과 함께 과거 일본강점기 때 요인 암살이 떠올랐다.

그들은 이종태 청년에게 55년 10월 3일 개천절 행사 때 이승만을 죽여 달라고 부탁하고 수류탄을 구입 해 주었다. 하지만 이 음모는 거사 직전 특무대에 의해 발각되었다.

독립운동가들이 체포되어 실컷 두들겨 맞고 있을 때 이종태 청년이 군복을 입고 웃으면서 나타났다.

독립투사들은 해방 후에도 친일세력들에 의해 조롱당하고 그들이 매설한 함정에 빠져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1956년 1월 30일 특무부대장 김창룡은 출근길에 짚차가 길을 막고 있는 것을 보고 차를 세웠다.

그때 두 명의 괴한이 짚차문을 열고 권총 6발을 발사했다. 이승만의 오른팔이며 양자였던 김창룡도 그렇게 죽었다. 그의 나이 39세였다.

이승만은 김창룡의 죽음을 보고 받은 그 날로 중장으로 추서했다. 국군 최초로 국군 장이 열렸다. 그날 하루 육해공군 전 군부대는 조기를 게양했고 장병들의 음주와 가무도 금지되었다.

김구 선생이 죽었을 때 한반도 조문하지 않았던 이승만은 김창룡 영전에 세 번이나 찾아와 애통해하였다.

그의 비문은 친일 사학자 이병도가 직접 썼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국립대전 현충원에 묻혀 있다. 독립투사들은 죽어서도 잠 못 이루는 대한민국이다.

육군 특무부대는 일제때 배운 조작과 고문으로 이 땅의 민주인사들을 탄압하고 독재정권을 보좌하면서 오늘도 조작질을 계속하고 있다. 그 이름은 육군 방첩대·보안사령부로 이름이 바뀐다.

16대 보안사령관 김재규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총을 쏘았다. 20대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21대 보안사령관 노태우는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었다.

▲김창룡의 생전 모습

출처: https://www.facebook.com/hyunjang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