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행무상, 모든 것은 끝 없이 변할 뿐 영원한 것은 없다

유학의 역경, 삼일신고, 동경대전, 용담유사도 같은 말해

날숨과 들숨의 조식에 머물면 제행무상 초월, 진리 안착

▲ 한국학을 부활시킨 것으로 평가 받는  동학 수운 최제우가 쓴 동경대전. 불교의 삼법인 중의 하나인 제행무상과 같은 뜻을 사계절과 운수로 표현하였다. 자료: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 한국학을 부활시킨 것으로 평가 받는 동학 수운 최제우가 쓴 동경대전. 불교의 삼법인 중의 하나인 제행무상과 같은 뜻을 사계절과 운수로 표현하였다. 자료: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불교 삼법인의 하나인 제행무상諸行無常을 들여다본다.

글자 그대로 모든 것(諸)은 흐르고 움직일 뿐(行) 늘 그대로 인 것은 없다(無常). 실제로 오감으로 지각되는 펼쳐진 세상은 끊임없이 변할 뿐 고정된 것은 없다. 실체가 그래서 없어 보인다.

나도 거울을 보면 끊임없이 변하고 있음을 안다. 소위 늙어간다. 인간의 주기를 생로병사라고 하는 데서도 제행무상의 일면을 볼 수 있다.

<삼일신고三一神誥> ‘인물’편에서는 생장소병몰고(生長消病沒苦)라고 하여 좀 더 현실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또는 습관적이든 수많은 나름의 목표를 세워놓고 끊임 없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왜일까. 죽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죽기 전에 무엇인가 해놓겠다는 본능적 행위라고 본다.

이 행위도 제행무상에 들어갈 것이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흐르고 변한다. 고정된 영원히 있는 것은 없다. 죽음도 변화하는 과정에서 찾아온다.

제행무상은 불교만 말하지 않았다. 불교가 생겨나기 전 시기에 나온 것으로 보이는 유가의 원전, 주역[易經]의 역易도 바뀌고 변한다는 뜻이다. 우주 삼라만상은 끊임없이 변한다.

고정된 실체는 없다는 철학적 의미를 확실하게 찾아내지 못하더라도 바뀌고 변한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동학 창건자 수운 최제우도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에서 4계절과 운수를 예로 들어 세상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세상에는 나도 포함된다.

“개자상고이래 춘추질대 사시성쇠 불천불역하니蓋自上古以來 春秋迭代 四時盛衰 不遷不易하니(동경대전/포덕문).”

“시운을 의논해도 일성일쇠 아닐런가. 쇠운이 지극하면 성운이 오지마는(용담유사/권학가).”

주역과 동학에서 우주삼라만상과 세상이 변한다는 것은 불교처럼 인생과 연결하여 상대적으로 깊고 섬세하게 철학적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불교의 제행무상은 나와 연결하여 깊은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는데 핵심은 고苦다. 고에는 허무함도 들어가 있다.

인생 끝자락에서 지난 삶을 돌아보면서 모든 게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며 허무하다고 얘기하는 경우가 상당하다.

누군가 그랬다. “나이 60세 넘어가면 다 똑같다”고. 그가 교수든, 박사든 대통령이든 촌부든 일용 노동자든 나이 60세 넘어가면 별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은퇴하는 나이이고 왕년의 활발한 활동이 멈추는 나이대에 접어들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는 깊은 허무가 깃들어 있다.

탱탱하던 몸이 어느새 쪼그라들고 예전보다 몇 배로 노력해야 근육이 유지되고 하루라도 운동을 안 하면 근육이 빠지는 것이 눈에 띄게 보인다. 이게 60대에 나타나는 모습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은 영원히 변치 않길 바란다. 사랑하는 이가 곁에 남아서 영원히 변치 않길 바란다.

나를 먹이고 입히고 길러주신 부모님도 영원히 곁에 계셨으면 좋겠다. 나도 늙지 않고 지금 그대로 영원히 있길 바란다. 그래서 운동하고 좋은 것을 먹고 발라서 늙음을 조금이라도 늦추고자 한다.

하지만 제행무상이다. 생각도 변한다. 어렸을 때 생각이 지금 생각과 다르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변해 있다.

하지만 정말 제행무상이 다일까?

이게 진리일까?

이것은 내가 하나의 개체라고 볼 때만 가능하다. 몸이 나라고 여길 때만 가능하다. 마음[생각]이 나라고 믿을 때만 가능한 얘기다.

비록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지금 이 모습의 나만 나라고 여길 때 제행무상은 진리다.

그러나 <삼일신고三一神誥>는 이 제행무상을 거부한다.

지감止感, 조식調息, 금촉禁觸에 머물 때 제행무상은 없다. 이 중에 특히 날숨과 들숨을 타는 조식에 머물러 있을 때 제행무상이 아닌 영원한 것이 있다.

조식은 누구나 지금 당장 가능하다. 조식 상태에서는 내가 사라진다. 마음이 사라진다. 생각이 사라진다. 우주가 사라진다. 세상이 사라진다. 열반적정涅槃寂靜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대인관계와 대물 관계에서는 조식을 놓치지 않은 상태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혼자 있을 때는 조식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다.

조식을 실천할 때 “정신 승리”라는 말이 들어올 틈새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