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백승종(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창산후인 조석헌>, 동학 해월 최시형 활동 기록
경남, 충북, 충남, 경기도에 점조직 통해 동학 재건
해월, 교첩과 임명장으로 1896까지 동학 조직 복구
수 천장 교첩 발행, 포 두령 밑에 6개의 직임 둬
▲ 동학교인 조석헌이 쓴 해월 최시형의 활동기(편집인 주). 자료: 백승종.
이천 앵산동과 여주 전거론 - 최시형의 말년 은거지
최시형의 말년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서술한 기록은 여럿이다. 가령 천도교의 역사책인 《본교역사》의 제2편은 <해월신사(海月神師, 최시형)>의 연대기를 정리한 것이며, 그 책의 제3편은 <의암성사(義庵聖師, 손병희)>의 연대기이다.
또, 동학의 초기 지도자들의 이력을 기록한 문헌도 다수 남아있다. 그중 하나가 <창산후인 조석헌역사(昌山后人 曺錫憲歷史)>이다.
모두 귀중한 문헌인데, 필자가 보기에는 <창산후인 조석헌역사>(이하 <조석헌>이라고 약칭)야말로 그의 스승 최시형과 동학 교단의 실제 모습을 가장 충실하게 기록한 것 같다.
아래에서는 <조석헌>을 바탕으로 1897년 1월부터 1898년 4월 3일까지 최시형의 일상생활을 몇 대목만 약술하겠다.
박희인에게 맡긴 중요한 임무
정유년(1897) 정월 3일에 충청도 태안 접주 조석헌은 자신을 동학에 안내한 상암장(박희인, 상암은 호)을 모시고 경상도 함창군(咸昌郡) 내은재로 찾아가서 해월신사(海月神師, 최시형)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러자 최시형은 박희인에게 좀 더 일찍 오지 그랬느냐며, 자신의 집 근처로 이사하라고 말하였다. 이어서 최시형은 장석(丈席, 원로)에게 주는 <경시문(敬示文, 회람)>을 나눠주고 몇 마디 가르침을 베풀었다.
여기서 보듯 동학의 <통문> 중에는 원로용이 따로 있었다. 그리고 박희인은 최시형의 명령에 따라 함창 부근으로 급히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해 정월 16일에 해월 최시형은 가족을 대동하고 충청도 음죽군(陰竹郡) 앵산동(鶯山洞) 충의포(忠義包)로 이주하였다.
그날에 조석헌은 장석(丈席) <경훈(敬訓)>과 <경고문>을 받아 들고 관내에 두 가지 문서를 알렸다. 조석헌은 접주로서 교단의 소식을 교도에게 전파한 것이다.
그다음에 조석헌은 상암 박희인이 해월 최시형의 집 근처로 이사하는 것을 도와야 했다. 그는 친구이자 태안의 접주인 문장준과 함께 길을 떠났다.
그들은 천안의 교인 강연홍의 집에서 잠을 자고, 강연홍까지 3인이 길을 재촉해 2월 8일에 보은의 갈목리에 있는 상암 박희인의 집에 도착하였다. 그 집에서 이틀을 머물며 이삿짐을 꾸렸다.
2일 11일에 상암 박희인의 식구만 모시고 강연홍, 조석헌, 한윤화, 문장준, 고창억 등이 길을 재촉하였다. 그리하여 결국은 충청도 충주 외서촌(外西村)의 솔박리에 도착하여 상암 박희인의 이사를 마쳤다.
상암 박희인은 이제 최시형을 찾아가 이사가 완료되었음을 보고하게 되었다. 2월 12일에 솔박리를 출발하여 거기서 20리 떨어진 앵산동(鶯山洞)의 최시형 댁으로 갔는데, 조석헌이 동행하였다. 일행이 해월 최시형을 뵙고 인사를 올리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매사에 처신하기가 어렵다. 각지의 두령(포주, 접주)이라도 임시 거주하는 식(住接)으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 너의 집에 먼저 도착한 다음에 2~3인씩만 안내하라.”
그 후에 조석헌은 곧 태안으로 돌아왔다. 이후로 팔도의 접주 가운데 최시형을 뵙고자 올라온 교인은 누구든지 솔박이에 있는 상암 박희인의 집에 머물렀다.
박희인은 기회를 보아 최시형의 허락을 얻은 다음에야 방문객을 들여보냈다. 대개 이러한 방식으로 주도면밀하게 최시형은 보안을 유지하였다.
교첩 또는 임명장의 발송
이천의 앵산동에서 해월 최시형은 한 가지 중요한 사업을 펼쳤다. 동학농민혁명 이후로 조직이 크게 흔들렸으나, 1896년 말까지 교세는 거의 회복되었다.
그러므로 각도의 동학 접주를 비롯하여 다양한 직책을 수행하는 간부들에게 정식으로 임명장을 보내는 일이 현안으로 떠올랐다.
<조석헌>에 따르면, 1897년 3월부터 최시형의 집에서 교첩(敎牒, 임명장)을 작성해 각지로 보내는 작업을 시작했다.
조석헌은 홍주 김낙철(金哲洙)의 큰아들 김동식(金東植)을 서기(書記)로 삼았다. 보조역할은 김일택(金一澤)과 고창억(高昌億)이 담당했다.
그때 전라도(全羅道)에서 김낙철, 김경제, 주문상, 허진(許鎭), 임윤상 등이 올라와 함께 작업을 진행하였다. 그들은 각자 수천 매씩 교첩을 작성하였다.
혹자는 3~4일을 머물렀고, 혹자는 4~5일씩 머물면서 그 사무에 종사했다.
그해 3월 23일에 조석헌은 예포(禮包, 예산포)를 비롯하여 충청도 남부 각처로 포(包)의 규모(規模)를 다시 정하고, 대단위 포의 두령 밑에는 다시 6개의 직임을 정하고 교첩을 만들어 내보냈다.
그때 조석헌은 해미, 서산, 태안, 안흥(安興), 대산(大山) 다섯 읍(邑)의 교수(敎授)로 임명되었다.
조석헌의 둘째 형 조석훈(曺錫勳)은 동해(東海) 본포교장(本包敎長)으로 임명되어 해미, 서산, 태안의 모든 접을 주관하였다.
당시에 동해(東海)접주 이용신(李容信), 관송포(貫松包)접주 문장로(文章魯), 굴향 이원면(梨園面)접주 문장준(文章峻), 대산(大山)접주 이원영(李元榮), 서산(瑞山)접주 이계화(李桂化), 궁사(弓射) 접주문동하(文東夏), 서면(西面)접주 변봉호(邊鳳浩), 북포(北包)접주 이광우(李廣宇), 예산(禮山)접주 곽기풍(郭基豊) 등은 조석훈과 비밀리에 만나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동학을 부흥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조석헌은 이 임무를 마치고 6월 20일에 고향으로 돌아갔다.
출처: https://www.facebook.com/fehlerhaf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