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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신종근(역사연구가, 의사)
에조 보고서, 명성황후 집단강간 후 살해라고 밝혀
신문사 사장 등 언론인, 공사관 무관, 경찰이 살해
언론인은 하버드대학, 프랑스 등 유학파들이 다수
▲경복궁 곤녕합 옥호루. 서기 1895. 10.08. 일본군은 경복궁의 건청궁으로 침탈해 들어가 조선 수비대를 물리치고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작업을 하였다(편집인 주).
1. 명성황후 시해가 아니라 살해가 적합한 표현이다.
2. 에조 보고서에 의하면 명성황후가 살아있을 때 집단강간을 하고 나서 살해했다
에조(英臟) 보고서
“정말로 이것을 쓰기는 괴로우나…중략…더욱이 민비의 유해 곁에 있던 일본인이 같은 일본인인 나로서는 차마 묘사하기 괴로운 행위를 하였다……”로 시작되는 에조(英臟) 보고서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발생 71년 만인 1966년 한 일본인 역사학자에 의해 최초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 보고서는 그동안 역사학계 일부에만 알려져 있었다.
이 보고서에 의거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대하여 '능욕(凌辱)'과 '시간(屍姦)'의 근거가 됐으나, 그 존재만 알려져 있었을 뿐 전문(全文)이 국내에 입수되거나 공개된 적은 없었다.
그러나 2002년 작가 김진명씨가 끈질긴 추적 끝에 찾아냈다. 이 문서의 전문을 살펴보면 근대 일본의 기초를 형성한 비열한 3류 사무라이들이 명성황후를 강간한 후 살해했다는 내용은 충격적이다 못해 아연실색(啞然失色)하게 한다.
3. 을미사변(명성황후 살해사건)의 주범들은 낭인들만이 아니었다.
"1895년 10월 8일 경복궁의 새벽, 수백 명의 일본군과 조선군으로 건청궁(乾淸宮) 안은 아수라장이다. 한성신보 신문사 사장부터 칼을 들고 지휘한다. 암살단 1조 대장은 아다치 겐조(安達謙藏) 사장, 2조 대장은 주필 쿠니토모(國友重章), 편집장 고바야카와(小早川秀雄) 그리고 공사관 무관, 외교관. 일본 경찰 등 40여명의 살인마들..."
<중략>
"한성신보(漢城新報)는 일본 외무성이 자금을 지원하는 정보센터 및 공작 기지였다. 편집장은 뒷날 민후암살기(閔后暗殺記)까지 펴낸다.“
일본은 명성황후 살해사건이 일본정부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을 은폐하기 위하여 낭인들의 소행으로 주장하여 왔다.
일부 군인ㆍ경찰도 있었지만 재야 정치인이자 지식층이 많다. 신문사 종사자들은 미국 하버드대학, 프랑스 등 유학파 지식인들이 많았다.
살해사건을 주모한 자들의 역할은 다음과 같다. 물론 최상부에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조선통감과 무츠 무네미츠(陸奧宗光) 외상이 있었다.
입안자: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전 주한공사)
행동대장: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주한공사)
총괄모집책:
아다치 겐조(安達謙藏, 한성신보 사장, 후에 내무대신 지냄)
행동대원:
군인, 경찰, 신문사 주필, 기자 등 지식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