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불붙인 한단고기 진위논쟁
“폐멸사학” 식민사학, 민족사학에 총공세
박종인 조선일보 기자 태백일사 위서 맹공
이유립이 동아일보, 동광 등 베꼈다고 궤변
신채호 글, 감시만어, 태백일사 인용 드러나
태백일사 이맥, 당대 존재한 문헌 인용 확실
박종인 이덕일에 토론 핑계 조롱, 비난 악담
오종홍 기자의 토론요청엔 유령취급, 무시
▲ 일십당 이맥이 편찬한 태백일사 옥진총담 부분에 나오는 장유의 오월국 피란과 화어를 잘하여 외국사진 접대했다는 기사와 같은 내용의 고려사절요 해당 부분.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이재명 대통령이 서기 2025.12.12. 교육부 산하 동북아역사재단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환빠’를 언급함으로써 ‘한단고기’ 위서 논쟁에 불을 붙였다.
서강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이종욱 사학과 전 교수가 “폐멸사학”, “식민사학찌꺼기”로 명명한 식민사학의 대본영, 한국고대사학회가 중심이 되어 일제히 민족사학을 ‘환빠’로 조롱, 비난, 저주를 퍼부었다.
이에 망둥이가 뛰니 꼴뚜기가 뛴다고 주변부의 서구 사조 사대노예 세력이 가세하여 현재까지도 시끄럽다.
이 중에는 언론인인 조선일보 기자, 박종인(이하 박종인)도 자신의 유튜브 방송 ‘박종인의 땅의 역사’를 이용해 ‘한(환)단고기’를 긍정하는 이덕일 등 민족사학 세력을 ‘환빠’로 비난하고, ‘환단고기’는 이유립이 서기 1950년대 이후 서기 1979년까지 창작한 가짜라고 맹렬하게 비난, 조롱, 저주를 퍼붓고 있다.
여기에 역사단체협의회(대표 김민곤) 등 민족사학계도 반격에 나섰고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이하 이덕일)도 박종인의 한단고기 위서 주장을 공격하였다.
이에 화가 난 박종인은 이덕일에 토론 도전장을 냈고 세 번까지 반응이 없자 이덕일이 ‘입을 꼬맸다’는 등 비난과 조롱을 퍼부었다. 이에 이덕일은 서기 2025.12.29. “환단고기 위서론, 독립운동가들의 사료로 다시 검증한다” 제목 영상을 현재 구독자 10만이 넘어간 ‘이덕일역사티비’에 올려 독립투사, 성재 이시영이 서기 1934년 중국 절강성 항주에서 펴낸 ‘감시만어’를 중심으로 박종인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이에 박종인은 바로 “넌 이제 끝이야, 넌 죽었어.”라는 듯이 의기양양 흐뭇해하며 다시 “이덕일씨의 '왕진총담' 영상 검증” 영상을 올려 이덕일의 주장을 가소롭다는 듯이 공격하였다.
그는 서기 1924 동아일보 기사의 신채호의 글->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청비록의 기사-> 서기1931년 7월호 동광잡지 김윤경의 글-> 서기 1934년 성재 이시영이 쓴 감시만어-> 서기1979년 이유립의 한단고기 태백일사를 시간차 발행 순서를 기준으로 이른바 ‘빼박’증거를 제시하며 이덕일 주장을 조목조목 외통수로 몰아가며 공격하였다.
서기 2025.12.31. 13:00시 현재 박종인의 이 영상은 1만7천명이 보았으며, 이덕일의 영상은 1만8천명이 보았다. 각각 영상에 붙은 댓글수는 이덕일 영상이 737개, 박종인 영상은 747개다.
박종인 영상 댓글은 대부분 박종인의 실력을 인정한다며 ‘이덕일은 학자요 교수라고 하는데 기본적인 역사학적 검증 방법도 모르고 기자만도 못한 실력으로 여태까지 뭐했냐’는 식의 갖은 독설과 악담을 늘어놓고 있다. 그러면서 한단고기 위서논쟁은 끝났고 그 결정 역할을 박종인이 하였다며 칭송과 숭배가 하늘을 찌를 듯하다.
과연 그럴까?
결론은 박종인이 사료(문헌)를 자기에 유리한 것은 취하고 불리한 것은 유령취급하여 버리고 선택한 사료는 자기 멋대로 해석하여 사기극을 벌였다는 것이다.
이제 왜 그런지 알아보자.
박종인은 영상에서 한단고기 태백일사가 위서라는 증거로 서기 1924년 동아일보에 기고한 신채호 글과 서기 1931년 ‘동광東光’잡지에 올라온 김윤경의 글, 서기 1934년 중국 절강성 항주에서 쓴 성재 이시영의 감시만어 해당 글과 1979년 이유립이 내놓은 한단고기 태백일사 옥진총담 이하 해당 글이 일치한다며 시간 순서로 볼 때 이유립이 태백일사에 신채호, 김윤경, 이시영의 글을 베꼈다고 단정하였다.
먼저 동아일보 신채호의 글 중 박종인이 걸고 넘어지는 부분은 아래와 같다.
“渤海의 國書가 唐에 일으매 唐의 擧朝에 그 文字를 解하는 이 업서” 와 “李太白을 薦하야 金鑾殿 에 들어와 이 글을 解讀하고 그 答書를 草할새”
박종인은 “위대한 환단고기 신문을 베꼈네” 영상에서 위글이 금고기관 이적취초혁만세에 나오는 글이고 신채호가 이를 동아일보에 인용하였고 이것을 이유립이 태백일사 옥진총담 부분에 베껴 넣었다고 단정하였다.
그러나 해당 금고기관 이적선취초혁만서를 아무리 찾아봐도 위 신채호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특히 ‘거조擧朝’라는 표현은 눈을 아무리 씻고 봐도 보이지 않는다. 이에 반해 ‘거조擧朝’라는 말은 신채호가 옥진총담을 인용한 부분에 나오고 이시영의 감시만어에 쓰이고 있고 태백일사에도 똑같이 나온다.
‘거조擧朝’ 포함 신채호의 위글은 태백일사 옥진총담 편에 거의 부합한다. 태백일사 옥진총담 부분과 신채호의 옥진총담 글을 비교해 보면, 신채호 글이 태백일사 옥진총담의 한문체 글을 국한문혼용체로 번역해서 인용한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만큼 거의 내용이 거의 일치한다. 이는 신채호가 동아일보에 언급한 옥진총담이 한단고기 태백일사의 옥진총담을 보고 인용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신채호 글과 서기 1934년 중국 절강성 항주에서 쓴 성재 이시영의 감시만어 옥진총담 글은 국한문 혼용체이냐 한문체이냐의 차이일 뿐 내용이 똑같다. 또 이시영의 감시만어 옥진총담 부분은 태백일사 옥진총담 부분을 베꼈다고 할 만큼 일치한다.
감시만어 옥진총담 부분은 이렇다.
“且李太白全書 玉塵叢談 云 渤海國 有書於唐國 擧朝無解之者 惟李白能解而答之”
태백일사 옥진총담 부분은 이렇다.
“李太白全書 玉塵叢談 云 渤海國 有書於唐 擧朝無解之者 李太白 能解而答之”
감시만어 ‘차且’와 ‘국國’, ‘유惟’등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글만 빼면 완전히 일치한다. 이 정도면 이시영 또는 이유립 둘 중 어느 하나는 상대방의 글을 베꼈다고 해도 무방하다.
감시만어에는 이전에 전해오던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를 한데 묶어 한단고기라는 이름으로 내놓은 운초 계연수도 등장한다. 천부경이 한단고기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도 나오는데 계연수도 이것을 묘향산 숲속에서 발견하였다고 한다(該地人桂延壽發見叢林中). 여기에 이르면 더욱 이시영, 이유립 둘 중 하나는 상대방 글을 베꼈다는 강한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박종인은 이 감시만어를 이덕일이 한단고기 태백일사가 위서가 아님을 증명하는 증거로 갖고 올 생각을 말라며 토론도 하기 전부터 무기 대등의 원칙이 기본인 토론의 기초를 허무는 무지막지한 짓을 벌였다.
이 같은 무례함은 자신이 이미 서기 1934년에 나온 감시만어가 서기 1931 ‘동광’잡지 7월호에 올라온 김윤경의 글과 완벽하리만큼 닮았다는 것을 파악했기 때문인 것으로 드러났다.
박종인은 신채호나 김윤경은 자신의 글을 인용할 때 문헌 출처를 밝혔고 이시영도 다른 곳에서 글 출처를 밝혔다며 만약에 이시영이 태백일사 옥진총담 부분을 보았다면 반드시 태백일사를 적시했을 것이라고 하였다. 안 했으니 이시영이 태백일사를 본 적이 없고 신채호나 김윤경의 글을 한문으로 축약하여 쓴 것이라고 확정하였다. 그러면서 태백일사 옥진총담 부분과 감시만어 옥진총담 부분이 같은 것은 이유립이 태백일사에 감시만어를 베껴 넣은 것이라고 우겼다.
그러나 이시영은 일제의 우리 사서 금지와 처분에 분노하며 사라진 문헌 사료를 나열하고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 그 책들은 “신지비사, 대변설, 조대기, 주남일사기, 지공기, 표훈천사, 삼성밀기, 도증기, 동천록, 도중록, 지화록, 서운관비기, 안함로원중도 삼성기 등” 이다. 이 책들은 모두 조선왕조 세조실록, 예종실록 수서령 조항에 나오는 것들이다.
이시영은 분명히 조선왕조실록을 보고 썼음에도 출처를 밝히지 않고 있다. 더구나 책 이름이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달 알 수 있는 조선왕조실록이다. 그럼에도 출처를 밝히지 않고 내용만 그냥 적시만 하였다.
이 같은 경향을 볼 때 이시영이 옥진총담 부분을 태백일사 기사를 보고 인용했을 개연성이 훨씬 크다. 더구나 박종인이 이유립이 이시영의 감시만어를 베꼈다는 주장이 얼마나 허구에 차한 궤변인지 금방 드러난다.
▲ 조선일보 기자 박종인이 자신의 유튜브 방송에서 자신은 감시만어를 통달하여 쓸모없음을 검증했다는 듯이 이덕일에게 감시만어를 토론에 들고 나오지 말라고 윽박질렀다. 자료: 박종인의 땅의역사 발췌.
박종인이 이덕일을 무력화 시키려고 이덕일에게 감시만어를 갖고 ‘나오덜 꿈도 꾸지 말라’는 식으로 조롱한 한데는 감시만어를 수없이 숙독하여 입체적으로 파악, 소화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감시만어는 이유립이 한단고기를 내놓은 서기 1979년 한참 후인 서기 1983년에 세상에 처음 나왔다. 박종인은 이유립이 감시만어를 베꼈다고 하는데, 이유립이 4년 후인 서기 1983년에 감시만어가 나올 줄 알고 미래로 와서 보고, 서기 1979년으로 돌아가 태백일사에 넣었다는 것이냐?
당시 성재이시영선생기념사업회 회장 윤택중이 발간사를 쓰고 이종찬 현 광복회장이 헌사를 썼다. 두 글 모두 625전쟁 전에 성재 이시영이 유일하게 갖고 있던 한문본 감시만어 1권을 당시 안호상 박사에게 부탁하여 원문이 포함된 한글 번역책을 내려고 하였다고 한다.
불행하게도 625전쟁이 터지면서 잃어버렸다가 안호상 박사의 서재에서 다시 우연히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것을 안호상 박사가 이시영 기념사업회에 기증하였고 서기 1983년에 기념사업회에서 번역하여 처음 세상에 내놨다고 하였다.
이를 볼 때 박종인의 과대망상과는 달리 이유립이 감시만어를 봤을 가능성은 0%로다. 그렇다면 이시영은 서기 1911년 계연수가 내놓은 한단고기 태백일사를 보고 옥진총담 부분을 감시만어에 인용하였다고 볼을 수밖에 없다.
감시만어를 통달하여 자신만만한 박종인이 감시만어 첫 부분에 나오는 이 발간사와 헌사를 보지 않았을 리 만무하다. 이 같은 사실을 다 알고 있으면서 뻔뻔스럽게 이유립이, 유일하게 하나 남았고 그것도 성재 이시영 저자 본인이 가지고 있는 것을 베꼈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박종인이 한단고기가 위서인지 진서인지 중립 입장에 있는 대중들을 박종인 위서론에 가담시키기 위하여 선전 선동하는 절박한 심정을 일단 동정한다.
하지만 금방 만천하에 드러날 거짓말까지 스스럼없이 한다는 것은 그가 어쩔 수 없는, 사실 날조와 왜곡을 밥 먹듯이 하고 김일성을 잡아 먹을 듯이 물어뜯다가 김일성의 ‘영용’한 조선인민군이 서기 1950.06.28. 서울을 점령하자 ‘위대한 김일성 장군 만세’를 그것도 급하게 호외로 외친 기회주의 조선일보 기자스럽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서기 1931년 동광이라는 잡지에서 김윤경은 고려 광종 때 장유(張儒)라는 사람이 거문고 바닥에 어떤 글이 새겨진 고려의 거문고가 중국 오월국으로 떠내려갔는데 중국인(好事者)이 고려 거문고 바닥에 새겨진 글을 알 수 없어 장유에게 번역을 부탁하여 한문으로 풀었다고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한송정곡寒松亭曲’ 이야기다.
박종인은 동광잡지의 김윤경 글체와 용어, 글 순서가 감시만어와 거의 일치하고 다시 태백일사 해당 기사도 복사하듯이 일치한다면서 ‘동광’잡지가 서기 1931년, 감시만어가 서기1934, 이유립이 내놓은 태백일사가 서기 1979년이라는 점을 들어 이유립이 감시만어나 김윤경의 동광 글을 표절, 베꼈다고 하였다.
박종인은 김윤경의 기고문에 나오는 ‘고려 광종 때’, ‘장유張儒’,‘好事者호사자’ 글이 이시영의 감시만어와 태백일사에 똑같이 순서대로 나온다는 이유로 태백일사를 이유립이 위조하였다고 비난하였다.
하지만 태백일사와 감시만어에는 김윤경의 기고 글의 원형이 되는 기사가 나온다(接伴使著聞初避亂到吳越). 그리고 이 글의 원형은 유형원이 서기 1656년 내놓은 동국여지지에 나온다. 동국여지지의 해당 글은 다시 고려사절요에 나온다(戶部尙書 張延祐卒. 新羅末父儒避亂吳越, 習華語而還, 光宗累授客省, 每中國使至, 使儒儐接之.). 태백일사의 글의 원조는 결국 고려사절요라는 이야기다.
특히 여기서 주목할 부분이 “新羅末父儒避亂吳越”과 “使儒儐接之”이다. 태백일사는 이 부분을 “張儒初避亂到吳越”과 “接伴使著聞”으로 압축하여 표현하였다. 표현만 달랐지 내용은 똑 같다.
이는 일십당 이맥이 서기 1520년 태백일사를 펴낼 당시 고려사절요는 당연하고 바닥에 문자가 적힌 고려 거문고가 오월국에 떠내려 온 것을 현지 중국 사람이 한문이 아니라서 해석하지 못한 것을 장유가 한문으로 해석해 줬다는 문헌을 확보했을 개연성을 보여준다.
박종인 말대로 이유립이 김윤경의 글을 베꼈다면 태백일사에 김윤경의 해당 글만 나와야 한다. 그런데 김윤경의 글의 저본이 되는 글도 함께 나온다. 그것도 김윤경의 '동광' 기고 글이 인용한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의 글 원형보다 수 백년 앞선 고려사절요에 있다. 더구나 이유립이 베꼈다는 김윤경의 ‘고려광종시’, ‘장유’, ‘호사자’ 세 글 중 ‘호사자’만 빼놓고 고려사절요에 그대로 나온다. 결국 박종인의 논리에 따르면 이유립이 ‘호사자’만 베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호사자’자를 베꼈을 가능성도 희박하다. ‘호사자’를 박종인이 마치 ‘동광’ 잡지 김윤경의 글에서만 고유하게 쓰이거나 당시에 소수만 쓴 특수한 글자인 양 인식시킨 것과 달리, 조선 태종 17년 정유년, 서기 1417년 조선왕조 태종실록를 필두로 널리 사용되는 일반명사였다. 누구나 얼마든지 일반적으로 쓰는 말이었다. ‘호사자’는 ‘일을 벌이기 좋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용어가 서기 1417년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흔히 쓰이는 일반명사라는 점에서 서기 1520년 일십당 이맥도 얼마든지 썼을 수 있다. 결국 이유립이 김윤경 글을 표절했다는 박종인의 주장은 한단고기 위서론 선입견에 꽂힌 나머지 성급하게 내린 궤변이다.
결론적으로 이유립이 서기 1924년 동아일보 신채호 글과 서기 1931년 동광의 김윤경 글과 서기 1934년 감시만어의 이시영 글을 표절, 베꼈다는 말은 거짓임이 드러났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박종인은 한단고기 위서 결정적 증거를 찾은 듯이 자신의 거짓말에 넘어간 독자들을 상대로 선전, 선동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로써 일십당 이맥의 태백일사는 사료가치와 더불어 위서가 아닌 진서임이 드러났다. 그의 고백처럼 서기 1520년 경진년에 역사편찬검수를 하는 찬수관撰修官으로 뽑혔고 내각의 비밀 서적을 접할 기회를 이용해 태백일사 옥진총담 부분을 담고 있는 문헌 내용을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태백일사에 넣은 것이다.
한편 이번 옥진총담을 필두로 한단고기 위서론을 펼치는 박종인은 자신이 요구한 태백일사 옥진총담 진위토론에 이덕일이 대답 안 하고 있다며 이덕일이 “입을 꼬맸다.”는 등 갖은 조롱과 독설을 쏟아 냈다. 이에 한문화타임즈 박찬화 기자가 ‘박종인이 조선일보 기자이고 자기도 기자이니 기자대 기자로 토론하자’고 제안하였다. 이에 박종인은 박찬화가 증산도 법사로 종교인이고 한단고기와 직접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이덕일의 석사학위 제자라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이에 코리아히스토리타임스 오종홍 기자가 나섰다. 오종홍 기자는 박종인이 토론 불가 사유로 내세운 종교인도 아니고 한단고기의 직접 이해당사자도 아니고 이덕일의 학위 제자도 아니니 토론하자고 제안하였다. 그의 유튜브 방송에 대표 연락처로 올려놓은 전자우편 ‘paypal parkshistorybook(@gmail.com’으로 토론을 정중하게 요청하였다. 그는 이 요청을 확인하였음에도 서기 2025.12.31. 20:05 까지 꿀먹은 벙어리처럼 말이 없다. 한단고기를 증오하며 위서론을 펼치는 그의 영상과 게시글 마다에 댓글로 요청하여도 유령 취급하고 있다.
자기주장을 깨면 소주와 삼겹살을 산다고 했는데 코리아히스토리타임스 오종홍 기자에게 이렇게 허망하게 깨질 것을 예상했는가. 그래도 그렇지, 소주와 삼겹살 돈이 아까워 묵언 수행하는가. 이 기사를 이용하여 다시 한번 제안한다. 박종인 조선일보 기자는 코리아히스토리타임스 오종홍 기자의 태백일사 옥진총담 진위 토론 요구에 응하라. 이미 위와 같이 패를 다 보여주었다. 그대가 훨씬 유리한 고지에서 시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