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빠’ 낙인 정치의 민낯

비판을 가장한 조롱 담론

친일 이력의 도구화

상고사 문제제기의 배제

지적 우월감의 폭력성

▲ 김형민도 기경량, 이문영류와 같이 '환빠'를 덧씌워서 민족사학을 비열하고 치졸하게 조롱, 비난하는 논조를 유지한다. 자료: 삼태극

‘한단고기 비판’이라는 이름의 낙인 정치

요즘 ‘환빠’ 논쟁으로 시끄럽다. ‘환빠’에 유난히 두드러기를 일으키며 한(환)단고기를 연구하는 사람들을 조롱과 비난하는 데 열을 올리는 인물이 있다. 한단고기 논쟁에서 세간에 잘 알려지지는 않은 듯해 보인다. 김형민이라는 인물이다.

기경량, 이문영류와 같이 비열하고 치졸하게 조롱, 비난하는 논조를 유지한다. 알고 보니 고려대 사학과를 나왔다. 직장생활을 서울방송 연출로 시작하여서 그런지 글발이 장난이 아니다. 이 김형민이 요새 연일 자기 얼굴책에 ‘환빠’라는 제목을 걸고 민족사학을 비난, 조롱하는 글을 연이어 올리고 있다.

이번에 올린 글은 자신의 개인적 회고를 외피로 삼아, 이른바 ‘한단고기’와 그 독자들을 하나의 인식 범주로 묶어 비난하고 있다. 그는 고교 시절 만났던 한 영어 교사의 민족주의적 역사관과 이를 뒷받침한 책들―특히 『한단고기』와 『다물』―을 회상하며, 이 계열의 사유를 ‘과장되고 황당한 상고사 신화’, 나아가 오늘날 ‘환빠’로 불리는 집단적 망상으로 연결한다.

김형민의 핵심 논지는 분명하다.

첫째, 한단고기 계열의 상고사는 실증적 역사학이 아니라 신념과 욕망이 만들어낸 이야기라는 것이다.

둘째, 이러한 사유는 일제강점기·군사정권 시기 민족주의와 결합해 왜곡된 역사 인식을 확산시켜 왔다는 주장이다.

셋째, 한단고기를 둘러싼 담론은 시간이 흐르며 더욱 과격해졌고, 이제는 학문적 토론이 아니라 정체성 정치와 음모론의 영역으로 이동했다는 평가다.

넷째, 그는 자신의 영어 교사를 ‘인격적으로는 존중하지만, 사상적으로는 동의할 수 없는 인물’로 묘사함으로써, 한단고기 지지자들을 선의는 있으나 잘못된 길에 빠진 사람들로 위치시킨다.

마지막으로 김형민은 오늘날 한단고기 담론이 식민사관 비판이라는 명분 아래 오히려 비이성적 민족주의를 재생산하고 있다고 결론짓는다.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1. 김형민의 글은 비판이 아니라 봉쇄

김형민의 글은 겉으로는 개인적 체험담이지만, 실제로는 한단고기와 그 독자들을 사유의 장 바깥으로 밀어내는 낙인 효과를 만들어낸다. 그는 “대충 읽었다.”고 스스로 고백하면서도, 그 문헌 전체를 ‘괴서’, ‘황당무계한 신화’로 규정한다. 이는 비판이 아니라 접근 차단에 가깝다. 읽지 말아야 할 책, 상대할 가치가 없는 문헌이라는 이미지를 먼저 씌워 버리기 때문이다.

이 방식은 낯설지 않다. 일제강점기 조선사편수회가 취했던 태도, 그리고 해방 이후 주류 사학이 ‘비주류’를 처리해 온 오래된 문법과 닮았다. 검토·반박·논쟁이 아니라 조롱과 격하로 문제를 정리하는 방식 말이다. 김형민의 글이 아무리 개인적 회고를 가장해도, 그 효과는 분명히 공적이다. 한단고기를 읽으려는 이들, 우리 고대사의 다른 가능성을 사유하려는 이들을 ‘환빠’라는 이름으로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집단으로 만들어 버린다.

2. ‘친일 경력’의 선택적 호출

더 심각한 문제는 역사적 맥락을 다루는 방식이다. 김형민은 『자유』지의 발행인 박창암, 그리고 그가 5·16 군사쿠데타에 가담했으며 간도특설대 출신이라는 점을 끌어와, 한단고기 계열 담론 전체를 도덕적으로 의심스러운 계보에 올려놓는다. 그러나 이 논리는 매우 위험하다.

사상이나 텍스트의 진위와 가치는 그것을 접한 인물의 정치적 전력만으로 판정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일제강점기 조선사편수회에 협력했던 수많은 학자의 연구 성과 역시 같은 잣대로 폐기되어야 한다. 다시말해 김형민과 같은 패거리인 식민사학이 해방 후 80년간 구축한 식민사관 역사학을 볼 것도 없이 불태워야 한다. 그러나 김형민의 글은 이 문제에 침묵한다. 친일 경력은 오직 한단고기를 공격할 때만 소환되는 도구다. 이것은 역사적 일관성이 아니라, 정치적 선택이다.

3. ‘정체성’에 대한 두려움은 누구의 것인가

김형민은 한단고기 지지자들을 ‘우리의 위대한 상고사’에 집착하는 사람들로 묘사하며, 그것을 일종의 보상 심리나 망상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그는 질문하지 않는다.

왜 이 사회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주류 역사 서술에 만족하지 못하는가. 왜 ‘상고사’라는 영역이 반복해서 귀환하는가.

한단고기를 읽는 이들이 모두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이 느끼는 결핍과 불신, 즉 “우리의 역사 서술은 과연 온전한가”라는 질문 자체를 조롱으로 처리하는 태도는 지적 성실함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외래 사상과 제도 위에 구축된 현재의 지식 체계가 흔들릴까 두려워, 다른 서사를 미리 배제하려는 방어적 반응에 가깝다.

4. 비판은 가능해야 하고, 봉쇄는 경계해야

한단고기는 역사서일 수도 있고, 사상서일 수도 있으며, 종교적·신화적 텍스트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논쟁의 대상이지, 조롱의 대상은 아니다. 김형민의 글은 자신이 비판하는 대상보다 오히려 더 강한 신념―“이것은 볼 가치가 없다”는 신념―에 사로잡혀 있다.

역사는 확정된 진실의 목록이 아니라, 끊임없이 재해석되는 서사다. 한단고기를 읽지 말라고 경고하는 대신, 왜 문제가 되는지 조목조목 논증하는 글이 필요하다. 낙인은 쉽지만, 논쟁은 어렵다. 김형민의 글은 안타깝게도 후자를 선택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글은 비판이 아니라 차단이며, 성찰이 아니라 자기 확신의 선언에 가깝다.

역사를 둘러싼 논쟁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태도는, “나는 다 알고 있고, 너희는 속고 있다.”는 자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오만은 그가 ‘환빠’라 부르는 이들과 매우 닮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