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강효백(역사가, 전 경희대 법학대학원 교수)

고구려 강이식 장군, 대륙에서 고구려로 귀화

수나라 조공 협박에 요동과 산동 공격으로 응수

강이식 전술 ‘기다림으로 적 굶겨 안 싸우고 승리’

수나라 30만 대군, 강이식 장군에게 황해서 섬멸돼

요녕성 무순시 장당현 고려촌 근처에 ‘원수림’ 존재

‘원수림’은 강이식 ‘병마도원수’의 원수에서 나온 것

▲중국 요녕성 무순시 장당현 고려촌에 강이식 장군을 뜻하는 병마도원수의 원수를 딴 원수림이 있다. 자료: 구글 지도 갈무리



《강이식 ―요서·산동을 선제공격한 고구려 원수》

— 대륙의 심장을 찌른 첫 창끝-

1. 산동의 소년, 천하를 품다

서기 550년. 중국 산동의 대평원, 동이족의 터전이라 불리던 땅에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 이름, 강이식(姜以式).

아버지는 시랑(侍郞) 강철상(姜哲常), 동이족 마한계 무관의 후예였다. 그는 어릴 적부터 비범했다. 열다섯 살이 되자 이미 철퇴 90근(약 54kg)을 마상에서 자유자재로 휘둘렀고, 전장의 형세를 읽는 눈을 가졌다. 그 철퇴가 바람을 가르면 허공은 번개처럼 갈라졌고, 말을 몰며 진형을 지휘하는 그 모습은 이미 한 나라의 장군 같았다.

스물넷 되던 해, 573년의 봄. 산동의 무예대회에서 그는 장원(壯元)의 영예를 거머쥔다. 그의 이름은 대륙의 북쪽까지 퍼졌고, 그를 눈여겨본 이가 있었다. 훗날 수나라를 세울 인물, 양견(楊堅)이었다.

강이식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총관부로 나아갔고, 돌궐과 거란, 말갈을 넘나들며 사신으로 활약했다. 그는 단순한 무인이 아니었다. 대륙의 언어와 문화를 꿰뚫고, 동서의 세력을 저울질하는 감각을 지닌 외교가이자 전략가였다.

581년, 양견은 수(隋)를 세우고 천하를 통일한다. 강이식은 건국의 공신으로 이름을 올렸고, 589년, 남북조의 긴 분열이 끝나며 중원의 전쟁은 잠잠해졌다. 그러나 그 순간, 강이식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불길이 타올랐다.

그는 말했다.

“천하를 하나로 묶는 것도 위대하다. 그러나 진정한 위업은, 강을 넘어 바다를 건너 다시 고향의 깃발을 세우는 것이다.”

그는 조용히 관직을 버리고 북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고구려의 땅에 발을 디뎠다. 그의 귀화는 단순한 귀향이 아니었다.

대륙의 제국을 경험한 자가, 이제 제국을 상대하기 위해 돌아온 것이었다.

592년(영양왕 3년), 요동성 서부 총관부에 부임한 강이식은 그곳에서 젊은 무장 을지문덕(乙支文德)을 만난다. 을지는 아직 보직을 받지 못한 무명이었으나, 그의 눈빛에서 강이식은 자신과 같은 불길을 보았다. 그날 이후 두 장수는 고구려의 전략을 새롭게 세우기 시작했다.

하나는 창의 이식(以式), 하나는 방패의 문덕(文德).

두 사람은 훗날 고구려를 둘러싼 천 년 전쟁사의 축이 되었다.

2. 수의 오만한 국서, 칼로 답하다

597년 여름, 수문제(隋文帝) 양견은 한 장의 국서를 보냈다.

그 서신은 전하(傳賀)문이라 쓰였으나, 실상은 협박장이었다.

“짐은 천명을 받아 온 천하를 다스리니, 왕에게 바다 한 귀퉁이를 맡긴다.”

“고구려는 비록 땅이 좁고 백성이 적으나, 왕을 내쫓고 다른 이를 보낼 수도 있다.”

그 말은 곧 “조공을 바치지 않으면 멸망시키겠다”는 뜻이었다.

대궐 안은 분노로 끓었다. 영양왕은 신하들을 모아 회답을 논의했다.

대신들은 목소리를 높였으나, 결국 말은 조심스러웠다.

“당장은 싸우기 어렵습니다.” “문서로 응수하되, 기회를 보아야 합니다.” 그때,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병사들의 검보다 굵은 음성이 천장을 울렸다.

“이같이 오만무례한 글은 붓으로 답할 것이 아니요, 칼로써 답할 일입니다.”

그 말의 주인공은 강이식 대장군이었다. 장내의 공기가 얼어붙었다가, 곧 불길처럼 일었다. 영양왕은 침묵 속에서 결심했다.

그날 밤, 왕의 밀명이 내려졌다.

“강이식을 병마원수로 삼노라. 오만한 제국에, 고구려의 첫 창끝을 겨눠라.”

고구려의 군문이 열리고, 5만의 정예군이 움직였다. 그들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 수나라의 본토 요서와 산동.

출정 직후, 강이식은 기만으로 시작했다. 말갈 병사 1만을 요서로 진입시켜 수군의 시선을 끌고, 거란 기병을 배에 태워 산동 연안을 기습하게 했다. 수군은 분열된 전선에 당황했고,

수문제는 급히 셋째 아들 양량(楊諒)을 행군대총관으로 삼아 고굉(高頎), 주나후(周羅喉) 등 명장을 붙여 30만 해륙대군을 동원했다.

하지만 그 거대한 군세는 이미 스스로의 무게에 짓눌려 있었다.

고구려의 하늘에는 장마가 내렸다. 비는 대지를 잠식했고, 도로는 진흙 늪으로 변했다. 수군의 군량은 끊기고, 병사들은 굶주림에 지쳐 눈빛이 흐려졌다.

비는 멎을 줄 몰랐고, 전염병은 진영 전체를 덮쳤다. 고구려군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매복과 기습을 이어갔다. 병사들은 안개 속에서 나타나 활을 쏘고, 사라지면 또 다른 부대가 반대편에서 들이쳤다.

수나라 군은 방향을 잃었다. 그들의 전진은 더 이상 진격이 아니라, 늪으로의 행군이었다.

▲ 강이식 장군 영정. 자료: 강효백


3. 발해만 불바다의 결전: 싸움이 아니라 심판이다

598년 여름, 바다가 들끓었다. 발해만(渤海灣) 일대, 하늘은 구름으로 덮이고 바람이 거세졌다. 그날, 강이식은 전군에 명령을 내렸다.

“이제부터 싸움이 아니라 심판이다. 불을 실은 배를 띄워라.”

고구려의 전함 5만은 파도 위에 줄지어 섰고, 불화살이 일제히 하늘로 솟구쳤다. 수나라의 함대는 이미 풍랑에 시달려 절반이 부서진 상태였다. 그들이 움츠릴 때, 고구려의 화공선은 파도를 가르며 돌진했다. 화염은 순식간에 선단 전체를 뒤덮었고, 폭발과 비명이 바다 위에서 뒤엉켰다.

《수서(隋書)》는 차갑게 기록했다.

“한왕 양량의 군대는 역병을 만나 회군하였으니, 죽은 자 열에 아홉이었다.”(汉王谅师遇疾疫而旋,死者十八九)

30만 대군의 90%, 그 대부분이 바다에 가라앉았다. 황해는 불타는 함선과 함께 붉게 물들었다. 그날의 전투는 단순한 승리가 아니었다.

고구려의 전략이 제국을 넘어선 순간이었다.

바다에서 궤멸한 주나후의 해군은 육군에 보급을 전달하지 못했고,

양량의 육군은 군량이 끊겨 혼란에 빠졌다. 고구려의 기병은 철처럼 냉정했다. 그들은 퇴각하는 적을 요서 일대에서 추격하며 지형을 이용한 포위망을 완성했다. 수나라의 깃발은 무너졌고, 고구려의 깃발은 바람을 갈랐다. 승전의 함성은 발해만을 넘어 요동, 하북, 그리고 천산의 능선을 뒤흔들었다.

4. 단재 신채호의 증언, 시간을 무기로 바꾼 지휘

“진주 강씨 시조 강이식은 수군을 시켜 바다에서 군량 운반선을 깨부수고, 전군에 명하여 보루를 높이 쌓은 채 지키기만 하고 나가 싸우지 않았다. 30만 수군은 군량이 떨어져 먹을 것이 없는 데다, 6월 장마를 만나 굶주림과 역질로 사망자가 늘어났다. 어쩔 수 없어 군사를 퇴각시키자, 강이식은 이들을 유수가에서 추격하여 전군을 거의 섬멸하고 무수한 군자와 병기를 노획하여 개선하였다.”

이것이 바로 598년, 황해대전(黃海大戰)의 실상이다.

고구려의 원수 강이식은 단순한 장수가 아니었다. 그는 전략의 시조(始祖)였다.

그의 전법은 단재의 표현처럼 치밀했다 — "싸우지 않음으로써 승리하고, 기다림으로써 적을 굶긴다."

그는 병사들에게 명했다. “적의 창끝에 맞서지 말라. 그들의 배가 스스로 비워지기를 기다리라.” 이것은 단순한 인내가 아니었다. 시간을 무기로 바꾼 천재적 지휘였다. 30만 대군이 황해를 건너 몰려왔을 때, 고구려의 바다는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군량선은 불타고, 장마는 내리고, 물자는 썩어갔다.

수군의 노를 젓던 자들은 역병에 쓰러졌고, 함대의 장막에서는 굶주린 신음이 새어나왔다. 수문제의 기세는 거센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그 파도는 곧 자기 자신에게 삼켜졌다. 그리고 바로 그때, 강이식은 명했다.

“지금이다. 그들의 배가 돌아서기 전에, 그들의 등에 화살을 꽂아라.”

고구려군은 일제히 기병과 수군을 이끌고 추격에 나섰다.

그 싸움은 황해의 격랑을 피로 물들였고, 바다는 불타는 군선과 떠다니는 시체로 뒤덮였다. 그날 이후, 수나라의 황제는 고구려를 향한 분노로 떨었다. 14년 뒤, 그 분노는 113만 대군의 재침으로 이어졌으나, 결과는 다시 패망이었다. 그 불씨의 시작이 바로 강이식이었다.

5. 고려촌 원수림의 증언, 공격의 미학 강이식 병마도원수

오늘날 요녕성 무순시 장당향 고려촌(辽宁省 抚顺市 章党乡 高丽村) 동쪽의 깊은 숲 속, 원수림(元帅林)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그 이름 그대로, ‘원수의 숲’이다. 지금도 위성지도 위에서 그 이름은 뚜렷하다 — Yuanshuailin, 元帅林. 이곳은 고구려의 강이식 장군이 잠든 자리로 전해진다. 그의 묘는 한때 높이 솟은 비석과 함께 있었다. 하지만 1966년 문화대혁명기의 광란 속에, 묘비와 대좌(臺座)가 파괴되었다.

오늘날 진주 강씨 문중은 중국 요녕성 문물국 및 현지 대학과 협력하여 이 유적의 지표 조사와 복원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 묘역은 단순한 무덤이 아니다.

한민족의 첫 ‘공격형 원수’가 잠든, 전략과 자존의 성역(聖域)이다.

그의 묘비 대좌는 무너졌지만, 그 자리에 남은 한 줄의 흔적은

고구려가 대륙에 새긴 마지막 좌표이기도 하다.

지도를 보면, 원수림은 무순시의 동북쪽 산맥 끝, 장학량 장군 기념관(張學良將軍紀念館) 근처의 호수 변에 있다. 북쪽으로는 요하(遼河)가 흘러 선양(瀋陽)으로 이어지고, 동쪽으로는 통화(通化)를 거쳐 압록으로 이어지는 고구려의 옛 진군로 한가운데다.

즉, 강이식 장군의 묘소가 바로 그가 싸웠던 전장 위에 자리 잡은 셈이다. 그는 죽어서도 자신의 전선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그를 찾는 이유는 단 하나다. 그의 무덤은 단순히 고대의 유적이 아니라, 한민족이 수비의 민족이 아니라 진격의 민족이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요동의 바람은 지금도 그 이름을 부른다 —

“강이식, 고구려의 창끝이여.”

진주 강씨 문중은 이 지역을 “고구려 강이식 장군 성역화 프로젝트”로 지정하고, 한민족의 자존을 되살리는 상징으로 복원할 필요가 있다. 그 묘비의 대좌 위에 다시 비석이 세워질 날, 고구려의 혼은 다시 일어날 것이다.

강이식의 전쟁은 단순한 방어가 아니었다. 그는 ‘기다림의 공격’과 ‘선제의 창끝’을 동시에 쥔 자였다. 그로부터 20여 년 뒤, 수양제의 113만 대군을 상대한 을지문덕은 살수에서 방어로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역사는 기억해야 한다. 을지문덕의 방패 앞에는, 강이식의 창이 있었다. 그의 전투는 ‘수비의 전설’이 아니라 ‘공격의 전통’을 세운 전환점이었다. 그의 결단은 “칼로 답하라”는 한마디로 시작되어

대륙의 심장을 꿰뚫는 전쟁으로 완성되었다.

수양제가 훗날 612년 113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고구려를 침공한 핵심이유는 강이식의 선제타격이었다. 그는 수제국의 자존심에 첫 칼자국을 남겼다. 고구려- 수·당 전쟁의 불씨는 그날, 그의 검끝에서 피어올랐다. 그는 고구려의 병마도원수이자, 역사로 기록된 한민족 최초의 ‘공격형 장군’이다. 그의 이름은 지금도 요동의 바람 속에 울린다.

불타는 바다의 향기와 함께. “적이 칼을 빼기 전에, 우리가 먼저 찌른다.” 그 한마디가 오늘까지 고구려의 창끝을 대표한다.

참고 사료:

《진양강씨족보》(1727), 《수서》 卷八十一, 《조선상고사》 단재 신채호,

《隋书》卷八十一「列传·高句丽传」, 중국 바이두백과사전 “姜以式”,

《고려사》 지리지, 《만주원류고》(17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