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종성(미스바채플 목사)

국사학계 송시열식 학문풍토로 반론과 이설 불허

313년 이전에 이미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

국립중앙박물관, 고대사판 식민지근대화론 설파 중

식민사관 청산에 정부와 여야가 나서

조선후기 노론의 송시열은 남송의 주자(朱子)가 유학 경전의 이치를 다 밝혀 놓았으니 단지 암기만할뿐, 여기에 딴지를 거는 자는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 규정했다. 윤휴(尹鑴)가 이러한 주장에 대해 반박하며 "어찌 천하의 이치를 주자만 알고 나는 모를까 보냐"라고 도전했다가 이단아로 몰려 사사되고 만다. 송시열(宋時烈) 이래로 성리학이 교조주의로 치달으면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고 변화를 추동하는 개혁사조가 아닌 수구의 철학으로 변질되어 끝내 조선왕조를 망국으로 이끌었다.

▲윤휴(尹鑴, 1617~1680) 영정. 그는 대사헌, 우찬성 등 중앙 요직을 두루 거친 인물로, 예학(禮學)과 경세론(經世論)에 밝았던 조선 후기의 대표적 실천적 지식인이자 개혁가였다. 특히 유교 경전에 대한 주자와 다른 독창적 해석으로 학문적 경지를 넓혔으나, 이러한 시도가 당대 보수적 성리학자들로부터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지목되며 정치적 탄압을 받는 비운을 겪었다. *사문난적(斯文亂賊) 유교, 특히 성리학에서 교리를 어지럽히고 그 사상에 어긋나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

​그런데 이러한 송시열식 학문풍토가 대한민국 현 국사학계에도 만연한 것 같다. 학문이란 정반합의 과정을 통해 진리를 찾아가야 할 분야이건만 어찌된 일인지 일제식민사학자들이 체계화한 학설들이 종교의 도그마인냥 행세하는 것이 우리 학계의 현실이다.

그들이 설정해 놓은 한국사의 시공간에 대해서 반론과 이설을 제기하는 학자들과 이의를 다는 시민들이 있으면 거두절미 배타하고, 마치 송시열이 정적들을 사문난적으로 낙인을 찍듯, "유사-사이비"라는 정치적이고도 종교적인 용어를 동원하여 매도하기에 바쁘다.

​송호정이라고 하는 서울대 교수는 '(한국사의 시공간과 관련하여) 학계에 이설과 반론을 제기하는 무리들이 있다면 일체 상종치 말라"고 얘기한다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을 찾고, 진리를 궁구하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만고불변의 교리를 지닌 종교인처럼 행세하고 있는 것이다.

​식민사관의 학풍을 계승한 학자들의 연구성과물을 읽어보면 고개가 끄덕여 지는 것이 아니라 의혹만 증폭된다. 1차 사료와는 전혀 맞지 않는 엉뚱한 주장을 펼치기 때문이다. 일례로 낙랑군평양설과 관련하여, 기존통설은 421년동안 한(漢).신(新).후한(後漢).위(魏).진(晉)의 왕조가 계속 뒤바뀌는 시기에도 북한의 평양에는 변함없이 차이나의 식민지기관이 존속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삼국사기>를 보면 낙랑군이 평양에 있다는 기간(BC108~AD313)에 이미 고구려가 그곳에 도읍을 삼고 있다. ‘동천왕 21년(247) 봄 2월에 왕이 환도성이 전란을 겪어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평양성(平壤城)을 쌓고 백성과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옮겼다’라고 한다. 그리고 ‘중천왕 4년(251) 여름 4월에 왕이 관나부인(貫那夫人)을 가죽 주머니에 넣어 서해(西海)에 던져버렸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 시기에 수도가 북한의 평양에 있었기에, 투기사건에 연루된 후궁을 곧장 서해 바다로 끌고갈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미천왕 3년(302) 가을 9월에 왕이 병력 3만명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침략하여 8천명을 포로로 잡아 이들을 평양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사들은 북한의 평양(平壤)에 낙랑군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시켜준다.

▲북한 남포시에 소재한 고구려 수산리고분의 서벽에 그려져 있는 귀부인 인물화. 관나부인은 고구려 중천왕의 후궁으로서 본명은 전해지지 않으며 다만 '관나부인'이라는 호칭으로 전해질 뿐이다. 이로 추측해 보건대, 아마 고구려 5부 중 하나인 관노부(灌奴部) 출신의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장발미녀였는데 왕의 총애를 놓고 왕후와 서로 경쟁하다가 후에 왕후를 거짓 참소했다는 이유로 서해 바다에 수장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왕후 집안보다는 세가 약했던 까닭으로 그녀가 밀려 난 것으로 보인다. ‘西海(서해)’라는 언급을 통해 당시 수도가 북한의 평양이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기록들에 대해서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고작 한다는 얘기가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기에 이 기록에서 언급된 평양은 북한의 평양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료를 가지고 논(論)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고정관념에다 사료를 끼워 맞추는 방식을 구사하며 억지를 부리고 있다.

​그런데 한적(漢籍)에도 낙랑군은 평양이 아닌 고대 요동일대에 있다고 분명하게 증언한다. 한군현 설치 직전까지 살았던 회남왕 유안(BC179~BC122)은 <회남자>에서 '갈석산을 지나면 조선이라'고 한다. 위만조선 멸망 50여년 후에 생존했던 가연지(?~BC43)는 '갈석산을 지나면 현도,낙랑군이 있다'고 하며, 2세기에 생존했던 후한 때의 학자 순열(148~209)은 '갈석산을 지나면 낙랑이라'고 한다.

▲<온 국민을 위한 대한민국역사교과서>의 갈석산 위치. 하북성 창려현에 소재한 명산으로 진시황과 조조가 올랐던 산이기도 하다. 사기 하본기에는 ‘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태강지리지에서 말하길, 낙랑(군) 수성현은 碣石山(갈석산)이 있는데, 장성이 일어나는 곳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갈석산이라는 랜드마크를 기준으로 낙랑군의 위치를 소개하고 있으니, 갈석산을 지나면 바로 옆에 낙랑군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몇해 전에 국회 동북아특위가 주최한 한사군 위치 비정에 대한 토론회에서 패널로 나온 윤용구라는 자는 이 기록들을 가지고 말장난을 시도했다. "갈석산을 지나면 낙랑이라고 언급하고 있지만, 얼마를 더 가야만 낙랑군이 있는지는 알 수 없는 기록이라"고 궤변을 늘어 놓았다. 보통 랜드마크를 가지고 위치를 안내할 때는 바로 옆에 있는 그 어떤 사물을 가지고 얘기를 하지, 한참 동떨어져 있는 것을 가지고 위치를 설명하는 경우는 없다. 자신의 오류를 은폐하고자 랜드마크의 기능조차 무시하며 혹세무민(惑世誣民)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학자들의 입김이 국책역사기관을 잠식하고 있다.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은 선사고대관을 다시 단장하여 공개하면서 철저하게 식민사관으로 덧칠에, 덧칠을 해놓았다. 그나마 표기되던 단군과 왕검조선 건국연도도 이제는 찾아볼 수가 없고, 진국(낙랑국)의 유물을 가져다 놓고, 한나라 낙랑군의 것이라고 딱지를 붙히며, 한국사의 모든 길은 한나라 식민지 낙랑군으로 통하고, 그 선진문물 덕분에 삼국이 태동하고 고대국가로 발전했다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국내외 관람객들에게 "고대사판 식민지근대화론"을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선사고대관 지도. 낙랑군이 중국 사료에는 고대 요동에 있었다고 나오지만, 선사고대관 지도는 평양에 위치시키며, 차이나 식민지기관의 선진문물의 여파로 우리나라 열국들이 성장한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일제가 주입하려 했던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을 철저히 따르고 있다(출처 : 한가람뉴스플러스).

이러한 황당한 전시에 시민들이 전방위로 항의를 하고 있음에도 관의 학예사들은 눈과 귀를 닫은체 "영구없다~"만 외치고 있을 뿐이다. 언제까지 국민의 혈세를 가지고 중국 동북공정을 뒷받침하며, 한류의 국제적 성과를 무색케 하고, 못난 한국인 상(像)을 주입할 것인지, 이제는 시급히 정부와 여야가 나서 특단의 대책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