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지정(문경 봉천사 주지)

역사교육은

나의 뿌리를 찾아 우리의 심연을

들여다보고자 하는 회귀본능 몸짓

나일강, 황하 등 강은 문명을 이루는 중심지

낙동강 1만여기 무덤 고녕가야 중심축

이병도와 후학 김태식 등 일제 사학 복사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에서 왜구사학을 충실하게 이어받은 친일사학자, 이병도의 서기1950년대 모습. 그의 사학을 이어받은 것이 서울대 국사학과 연세대, 고려대 등 역사학이며 이들이 주도하는 것이 현재 주류 역사학계이며 흔히 식민사학이라고 일컫는다. 대표단체로는 '한국고대사학회'이다(편집부 주석). 자료: 위키백과

“사료(史料)와 사서(史書) 엄연한 2000년 고령가야 역사” 함창고녕가야를 말한다

국사교육은 애국심의 원천(源泉)이다. 하지만 우리 고대사는 황국사관에 찌들었고 근현대사는 유물사관에 물들었다. 우리가 국사를 배우는 것은 나의 정체를 알고자 함이요, 공동체인 나라의 뿌리에 닿고자 함이다. 역사를 살피는 작업은 형이상학적인 사상이나 종교적인 사명감이 아니라 내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본 모습을 찾고자 함이다.

이는 나의 뿌리를 찾아 우리의 심연을 들여다 보고자하는 회귀본능의 몸짓이다. 이렇게 숭고한 우리의 뿌리역사를 일제는 식민통치의 수단으로 삼고자 조작하고 왜곡했으니 대표적인 사례가 함창고녕가야 역사말살이다.

조선사편수회 소속의 이병도는 함창고녕가야가 김해 금관가야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가야라 부르기에 부적절하다고 했다. 그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번역하면서 가야가 낙동강을 근거로 건국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을 터인데도 식민사학자들의 뜻을 이기지 못하고 곡필했다.

고대부터 인류는 강을 매개로 교류하였음은 전문학자가 아니라도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이집트 문화가 나일강을 따라 형성되었고 인도는 갠지스강이나 인더스강을 따라 문명을 이루었다. 그뿐 아니라 양자강이나 황하강이 그렇고 수메르 문화의 두 젖줄기인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 그러하다. 낙동강을 따라서 고대 가야문명이 일어났으며 낙동강 700리 언저리에는 가야의 숱한 흔적이 아직 숨쉬고 있다.

김해와 함창의 거리가 멀어서 함창이 가야권역이 될 수 없다는 말은 삼척동자도 고갯 짓을 할 정도의 망언이다. 강은 인체의 혈관과 같으며 현대국가의 고속도로와 같음을 간과한 치사한 언행일 뿐이다.

▲ 가야 제국에서 고녕가야가 맨 위에 위치하고 있다. 고녕가야를 밝히면 가야사를 다시 써야 한다(편집주 주석). 자료: 위키백과

이병도는 이외에도 두어가지 더 핑곗거리를 만들어 함창고녕가야를 외면했다. 그는 “고녕가야가 진주의 고명인 거열과 비슷해서 아마 진주가 고녕가야의 본고장일 것이다. 그리고 지리상의 중요성 즉 웅주거목의 입장에서 생각하더라도 함창보다는 진주가 더 개연성이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해 필자는 여러번 그 주장을 반박했다. 고녕과 거열이 발음이 비슷하지도 않고 설사 발음이 비슷하다고 한들 그것이 진주고녕가야가 될 턱이 없다. 더구나 거열은 진주의 고명이 아니라 거창의 고명이라고 밝혀졌다.

또 하나 지리상의 중요성을 거론하면서 웅주거목(雄州巨牧)을 지칭하였는데 웅주거목이란 물자가 풍부한 큰 고을이라는 의미다. 상주함창이 진주보다 면적이 2배나 넓고 쌀생산량도 1.7배나 된다. 그리고 예부터 상주의 이칭이 웅주거목임을 살펴본다면 이병도가 함창고녕가야를 부정한 세 가지 이유는 하나도 타당성이 없다는 것이 명명백백하다.

이병도보다 앞서 김해와 함창의 거리가 멀어서 가야연맹의 일원이 아니라고 주장한 일본인 학자가 있다. 그 대표적 식민사학자가 동경제국대학교와 경성제국대학에서 교수를 지낸 나가 미치오(那珂通世, 1851~1908)다. 그의 저서 <가라고(伽羅考)>에서 밝히기를 “함창고녕가야는 가야산과 멀리 떨어져 있어 가야라고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 일제는 서기19세기 중후반부터 조선침략이론을 만들었다. 그 대표 어용학자가 나가통세다(편집부 주석). 자료: 위키백과

당시 일본학자들의 역사관은 고대 일본이 한반도에 출병하여 백제와 신라를 정복하고 다시 북상하여 광개토대왕의 대군과 싸웠다는 것이다. 이는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치르면서 침략전쟁을 합리화하고 군인들에게 사기를 고취시키기 위해 <일본서기>와 광개토태왕비문을 악의적으로 해석한 결과다.

<일본서기>의 ‘신공기’에 “신공왕후가 산도를 돌로 막고 신라에 쳐들어오니 신라왕과 고구려왕이 함께 와서 항복하고 백년토록 충성을 맹세했다.”는 것이다.

광개토태왕비의 신라백잔도해파(新羅白殘渡海波), 임나가라종발성(任那伽羅鍾鉢城) 등의 모호한 글자를 두고 마치 일본이 바다를 건너와 신라와 백제를 격파한 것처럼 왜곡했다. 이처럼 일본이 고대 한반도 남부에서 무인지경으로 활약하려면 낙동강 중상류에 함창고녕가야라는 국가가 있어서는 절대 안 될 일이다. 한반도 남부를 저들이 지배했다는 논리를 만들기 위해서 눈엣가시처럼 껄끄러운 대상이 바로 함창고녕가야다.

그들은 “김해금관가야와 멀어서 가야가 아니다”라는 이유 외에도 납득 할 수 없는 이유들을 제시했지만 모두 신뢰할 수 없는 조잡한 내용들이다. 그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김태식의 “고녕가야나 금관가야처럼 가야이름이 붙어있는 모가야는 원래 없었다”는 주장이다. 고려시대 일연을 위시한 승려들이 육가야의 이름을 창작했다는 것이다.

신라 경덕왕 때 처음으로 한문 투의 이름으로 지역명을 바꾸었기 때문에 그 전에는 고녕가야나 고녕군과 같은 한문 투의 지명이 없었다는 것이다. ‘고동람군’이라는 함창의 고 지명이 이두식 표현이라 볼 때 그 전에는 한문 투의 지명이 없었다는 주장이다.

언어학자들도 다루기 조심스러운 언어적 이론을 가지고 일개 사학자가 무슨 권위로 천년사직을 난도질하는지 의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겨레의 5,000년 사직을 대표하는 역사서를 구상유치의 서생이 충분한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함부로 다루어도 되는지 의심의 눈길을 거둘 수 없다.

김태식은 육가야 지명에 대해서 일본의 임나 13국이야말로 진정한 가야의 원래 이름이라고 쇠망치로 내려칠 정도의 묵직한 말을 내놓았다. 이영식이 저술한 <가야제국사연구>에서도 육가야 지명 부정설은 김태식과 거의 동일하게 서술되어 있다. 6가야 지명부정설을 처음 초안한 사람 역시 이들이 아니라 식민사학자 중 한 사람인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1873~1961)였다.

▲ 홍익대학교 사학과 김태식 교수가 서기2016. 서울 한성백제 박물관에서 '한국고대사학회'가 주최한 시민강좌에서 식민사관을 전파하고 있다(편집부 주석). 자료: 코리아히스토리타임스

쓰다 소기치는 일찍이 그의 저서 <조선역사지리>에서 함창고녕가야를 비롯한 6가야 지명은 후대에 승려들이 지어낸 용어라고 서술했다. 즉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6가야 이름은 애초에 없었는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저술인들이 두 사서를 저술할 때 가야를 집어넣었다는 이야기다.

괴이하고도 어이없는 저들의 주장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저들의 목적을 위해 뻔한 거짓말이나 논리도 그럴듯하게 만들어 낸다. 그러고도 마치 천하에 없는 무엇을 처음 발견한 것처럼 갖은 권위를 내세우면서 논리를 키워간다.

경덕왕 때 지명을 변경한 것은 사실이며 내용에 분명히 고녕가야, 고동람군, 고릉현이 기록되어 있는데 실상은 그것이 아니라고 우긴다. 우기니 그대로 먹혀들어서 마치 정설인양 일반인들은 벙어리마냥 입을 다문다.

가야학자들은 식민사학자들의 논리를 그대로 앵무새처럼 지절거리고 있으니 난감하다. 당시 조선에서는 그들처럼 우리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진 이도 적었고 저들처럼 세계전쟁을 일으키면서 역사논리를 발굴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무력과 서구식 논리로 무장한 조선총독부 학자들에게 우리나라 학자들은 변변히 대응도 못하고 오히려 저들이 제공해주는 이론을 확대재생산 하기에 급급했다.

조선총독부 학자들이 내놓는 우리역사 해설을 보면 조선총독부 관리들이 경주 금관총에서 발굴한 금관을 기생들 머리 위에 씌우고 술을 따르게 했다는 장면이 떠오른다. 신라의 왕이나 왕비가 사용했을 권위의 상징을 일개 천한 기생의 머리에 얹어놓고 술을 따르게 했으니, 조선의 문물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가늠할 수 있다.

▲ 우리역사를 파괴하는 이른바'삼국사기 초기기록 가짜설'을 만든 장본인이다(편집부 주석). 자료: https://www.waseda.jp/inst/weekly/news/2020/10/20/79302/

이와 같이 조선을 연구하던 일제식민사학자들의 입장에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권위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오로지 일본의 대외정책에 사용할만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우리가 역사를 대하는 태도에서 저들의 논리를 답습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교과서 내용은 일제 학자들이 주장하던 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나가 미치오(1851~1908)와 쓰다 소키치는 20년의 연령차이가 있지만 일제의 조선식민통치라는 목표 아래 일사불란하게 뜻을 같이했다. ‘함창고녕가야는 가야산과 멀다 그래서 가야일 수 없으며 고녕가야 등 가야제국의 이름은 일연을 비롯한 고려 승려들이 창작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러한 엉터리 논리를 지금까지 답습하면서 함창고녕가야뿐 아니라 금관가야까지 신화나 설화로 둔갑시키고 있다. 저들이 호들갑을 떤다고 해서 2,000년의 고녕가야 역사가 사라질 리 없으며 사료와 사서가 엄연한데 하루빨리 역사가 정상화되기를 바란다.

역사는 인문학 이전에 국학으로서 국가정체성을 확립하고 가르치는 학문이다. 학교에서 국사를 올바르게 가르치고 배워야만 청년들 가슴에 뜨거운 애국심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