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종성(바른역사알기운동 대표)
범엽은 동아시아 시원문화의 뿌리는 구이(九夷)라고 기록
선인과 군자로 등장하는 단군
군자국으로 불린 왕검조선은 바로 진국(삼한)
후대까지 우리나라는 ‘군자국’으로 불려
▲울산시 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된 석남사 山神圖(산신도)[출처. 연합뉴스]. 울주군 상북면에 있는 석남사의 산신도는 1863년 불화승 성규가 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학술적 가치가 인정돼 문화재로 지정하게 됐다.
식민사관의 학풍을 계승하고 있는 학자들은 왕검조선과 관련된 기록이 한적(漢籍)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단군과 그 나라의 역사성과 사실성을 부정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관점으로 한적들을 탐구해 보면 단군과 왕검조선의 잔영들이 여기저기서 나온다. <후한서> 동이전에는 만주와 한반도에 있던 열국(列國)들을 소개하면서, 그 이전에 구이(九夷)와 군자국을 언급하고 있다.
「왕제(王制)」에 이르기를 ‘동방(東方)을 이(夷)라 한다’고 하였다. “이(夷)란 근본(根本)이다. [그 의미는] 이(夷)가 어질어서 생명(生命)을 좋아하므로, 만물(萬物)이 땅에 근본하여 산출(産出)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夷)는] 천성(天性)이 유순하여 도리(道理)로서 다스리기 쉽기 때문에 군자불사국(君子不死國)이 있다...그러므로 공자(孔子)도 구이(九夷)에 살고싶어하였다.”라고 한다.
<후한서>의 저자 범엽은 위진남북조시기 남조(南朝)의 사람으로서 분명 중화주의에 경도되어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땅에서 만물이 나는 것처럼, 구이가 상고시기 동아시아 시원문화의 뿌리라고 기록하였다.
근대에 와서 발견된 요하문명은 이 기록의 사실성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특히 이 사료에서 주목되는 것은 부여.고구려.옥저.동예.한(韓).읍루와 같은 동이 열국의 전신으로 군자국이라는 이상적인 국가를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군자국은 어떤 나라일까. 산해경(山海經) 해외동경(海外東經)에서는 이 군자국의 특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군자국이 북방에 있는데, 그들은 의관을 갖추고 칼을 차며 짐승을 잡아먹는다. 호랑이를 곁에 두고 부리며, 사양하기를 좋아하고 다투기를 싫어한다(君子國在其北衣冠帶劍食獸使二大虎在旁其人好讓不爭)'라고 한다.
여기서 군자국이 해외동경편에 실린 점과 방위가 북쪽이라는 기록에서 이 나라는 고대 지나인들의 입장에서 "발해 밖 동북쪽"에 위치하는 해외(海外)의 국가임을 알 수 있다. 의관을 갖추는 예의를 알고 겸양의 덕목을 지닌 모습은 유가(儒家)에서 이상적 인간으로 여기는 '군자(君子)'의 면모를 보여주고, 심산유곡(深山幽谷)에 사는 맹호를 거느린다는 것은 산신도(山神圖)에서 볼 수 있는 선인(仙人)의 특성을 나타낸다.
따라서 당시 구이의 군자국은 고대 지나인들에게 선인과 군자가 사는 이상향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난세로 인해 도가 무너진 주(周)의 현실을 보고 절망한 공자(孔子)가 뗏목을 타고 군자국에 가서 살기를 원했다고까지 한다. 우리는 이러한 기록에서 도가(道家)와 유가(儒家)의 기원이 구이의 군자국이라는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선인(仙人)”과 “산신(山神)” 그리고 “군자(君子)”는 왕검조선의 창건자 단군에게서 찾을 수 있는 특성들이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위서」와 「고기」를 인용하여 단군과 왕검조선의 역사를 소개하면서 ‘단군이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에 돌아와 은둔하여 산신(山神)이 되었다’고 전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조에는 이 단군을 가리켜 '선인왕검(仙人王儉)‘이라고 소개한다. <동명왕편>에서는 비류국 송양왕이 ’선인의 후예‘로 자처하고 있다. 초기 왕검조선의 발상지인 홍산지역에서는 선(仙)의 수련을 하는 가부좌를 튼 웅녀 여인상과 남성 소조상이 출토됨으로 이러한 기록들의 사실성을 뒷받침해 준다.
당시 왕검조선이 대외적으로 선인의 나라로 널리 알려졌던 사실은 여러 한적에서도 발견된다. <사기>에는 진시황이 불사약을 얻기 위해 “서시와 동남동녀를 파견하여 동쪽의 바다에 들어가서 선인을 구했다”는 기록이 보이고, <사기정의>에는 괄지지를 인용하여 "선인(仙人)이 사는 땅의 이름은 단주(亶洲)이며 산동성의 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라고 한다. 여기서 단주(亶洲)는 바로 단군(壇君)이 통치하는 지역을 뜻한다.
▲홍산 우하량의 반가부좌를 한 웅녀 여신상(좌)과 내몽골 흥륭와에서 출토된 남성상(우), 모두 오른손이 왼손목을 잡고 단정히 앉아있다. 仙(선) 수행자세와 종교의식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단군을 조연수 묘지명(1325)에는 선인(신선)뿐만 아니라 '군자(君子)'로도 소개된다.
'평양의 선조는 선인왕검(仙人王儉)으로, 오늘에 이르러 남은 백성이 당당한 사공(司空)이시네.
평양의 군자(平壤君子)는 삼한(三韓)에 앞서 있으면서 나이 1천이 넘도록 장수하여 신선이 되었어라'고 한다.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구이의 군자국은 단군과 관련된 국가라는 것이 명확해진다. <후한서>를 비롯한 여러 한적(漢籍)들에는 단군과 왕검조선을 직접 명시하진 않았으나, 그 나라를 이상향(理想鄕)의 의미로 '군자국'이라고 달리 표기했던 것이다.
초기 왕검조선의 발상지는 화북성일대였다. 그래서 그곳에 '조선'이라는 지명이 남게 되었고, 송대까지도 그곳에 흐르는 하천을 '조선하(朝鮮河)'라고 명명했다. 단군(壇君) 황가(皇家)가 동천한 이후 기자의 후예를 자처한 준왕조선과 그를 대체한 위만정권과 후에 한군현이 모두 그 지역에 위치했다.
왕검조선은 오늘날 요동과 서북한일대로 동천(東遷)하면서 진국(辰國)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진국에는 단군처럼 사제의 역할을 수행하는 ‘천군(天君)’이라는 존재가 확인되는데, 중국어로 단군(壇君)은 "탕준"이고, 천군(天君)은 "텐준"으로 발음되어 매우 유사하다. 천군으로 불린 여러 단군이 있는 진국이 곧 왕검조선이거나 그 후신인 것이다.
▲좌)국조 단군왕검 영정. 일연은 “魏書”와 “古記”를 인용하여 단군의 건국사화를 저록했다. 우)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21년(247)조에는 평양성을 쌓고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고 하면서, ‘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평양은 본래 선인왕검의 집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단군왕검이 처음 나라를 세울 당시는 고대 지나 왕조와 접촉이 빈번하지 못했을 터이니, 그래서 한적에선 단군이나 왕검과 같은 칭호가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훗날 지나 왕조들과 빈번하게 교섭하기 시작하는 시기에 이르면 이미 왕검조선은 제정분리사회가 되는 등, 사회가 한층 발전하여 왕호도 바뀌었을 터이다. 한적에 등장하는 단군의 왕호가 시기와 장소에 따라 ‘가한(可汗)’ ‘한후(韓侯)’ *‘동후(東后)’ ‘진왕(辰王)’ 등과 같은 이름으로 달리 기록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단순히 한적(漢籍)에 단군왕검이라는 칭호가 빈번하게 보이지 않는다 하여 그 역사적 사실성을 부인하려 드는 것은 합리적인 역사연구 방법론이 아니다. 지금은 비록 소실되어 현전하지 않으나 일연이 위나라 역사책인 <위서(魏書)>를 인용하여 단군의 건국을 소개한 것을 상기하면 한적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또한 군주의 칭호로 보이는 “왕검(王儉)”이 ‘왕험성(王險城)’이라는 성읍명으로 남은 기록이 있기도 하다. 아무튼 자국의 역사는 자국의 역사책에 더 상세히 사료가 남아 있기 마련이다. 조연수묘지명을 쓴 이숙기나 일연은 전래되던 우리측의 옛기록을 참조하여 단군을 소개하고 왕검조선 건국사화를 저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서경』 「우서(虞書)의 순전(舜典)」에 "동순망질(東巡望秩) 사근동후(肆覲東后)"라는 기록이 보인다. 순임금이 동쪽 지역을 순수하여...마침내 동방 임금을 찾아뵈었다”로 해석된다. 그 당시 순(舜)이 알현한 만한 인물은 군자국의 단군 외에는 없다.
군자국으로 불린 왕검조선과 그 후신인 진국(삼한)은 그 면적이 만주와 한반도를 포함하는 '방4천리'의 큰나라였다. 그래서 진국 내에 제국(諸國)들은 크게 세 개의 권역별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것이 세 개의 칸국 즉 삼한(三韓)이다. 그중에 최대의 세력을 진왕으로 공립하여, 그 진왕에게 국(國)의 제간(諸干)들이 통속되는 체제를 구축했다. 그러니깐 제간(諸干)은 각각의 '국(國)'이 있는 가운데 상위의 국가를 건립하는 형태를 취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초기 신라의 성립 과정에서도 발견되는데, 진한 6국의 제간들이 혁거세를 거서간(진왕)으로 옹립하여 신라를 건국했다는 기록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런데 이 진국의 위치와 관련하여 유안이 기록한 '회남자(淮南子)'에서는 “동방의 끝, 갈석산으로부터 조선을 지나 대인의 나라가 있다(東方之極 自碣石山過朝鮮 貫大人之國)”라고 하였다. 유안이 생존할 당시에 조선은 위만정권시기였다. 그렇다면 위만조선 동쪽에 있었다는 ‘대인의 나라’는 진국일 수 밖에 없다. <위략>에는 조선상 역계경이 위만조선의 우거왕과 갈등하다 동쪽의 진국으로 갔다는 기록이 있고, <사기>에는 진번과 진국이 한(漢)과 통교하려고 하나, 위만조선이 가로 막았다는 기록을 통해서도 위만조선의 동쪽에 위치한 나라는 군자국으로 불린 "진국(辰國)"이였던 것이다.
▲ 좌)기자의 후예를 자처한 준왕조선이 있을 당시 군자국(왕검조선)의 위치, 우)위만정권 당시 군자국인 ‘방4천리’ 진국(삼한) 위치도 [출처. 매림역사TV].
군자국이라는 이름은 처음에는 왕검조선과 진국을 꾸미는 별칭으로 사용되었고, 후대에도 여전히 우리나라의 이칭으로 활용되어진다. 당 현종이 대신라 효성왕을 책봉하면서 보낸 국서에 '황제가 형숙에게 말하기를, “신라는 군자(君子)의 나라라고 일컬어지고, 자못 글[書記]을 잘 알아 중국과 비슷함이 있다”고 하였다. 신라 하대 최치원이 찬술한 낭혜화상탑비에는 '...산악이 신령한 정기를 내려서 군자국(君子國)에 태어나 사찰에 우뚝서게 하였으니 대사가 바로 그분이다'라고 한다.
거란이 고려의 정종(靖宗)에게 보내온 국서에는 '아 (그대는) 군자국(君子國)을 지키는 후왕(侯王)들 중에 으뜸이다‘라고 한다. 또한 문종23년에 송의 상인 황신이 와서 송주(宋主)의 말을 전하는 과정에서 ‘고려는 예로부터 군자의 나라라 부르고 그들의 선대부터 정성을 다하여 매우 부지런하였는데...’라고 한다.
<동인지문사륙> 문왕애책(文王哀冊)에는 '군자국은 해동삼국인데 대를 이어 임금을 세웠다. 하늘이 슬기롭고 총명한 이들을 내었으니 알에서 혁거세가 나오고 해의 아들은 주몽이고, 백가로 백제를 이루니. 세 성씨를 영웅이라 했다. 우리 신성(태조왕건)에 이르러 천부의 명에 응하여 여러나라를 통일했다(有君子國, 鼎足海東. 代立君后, 天生睿聰. 卵童赫世, 日子朱蒙. 百家而濟, 三氏曰雄. 迄我神聖, 應天符命. 一統群邦)‘라고 한다. 고구려.백제.신라가 모두 군자국에서 기원했고, 그래서 고려까지도 군자국으로 불린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국내외 문헌을 통해 군자국은 단군의 나라이며, 동이 열국들이 모두 그 후신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또한 구이가 동아시아 시원문화를 창조함으로써 우리 겨레의 전통문화가 중국의 아류가 아니라 본류라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실증을 추구하는 제대로 된 학자라면 결코 구이의 요하문명과 단군과 왕검조선에 대한 역사를 부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