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석현장(역사연구가, 스님)
고려 몽골 60년 전쟁 종지부 강화 조약 추진
고려 왕전, 원나라 가던 중 대칸 멍케 사망
대칸 자리 아릭부케 유력했으나 쿠빌라이 선택
당 태종도 굴복 못 시킨 고려가 왔다며 감격
쿠릴타이 개최 후 대칸에 오른 뒤 아릭부케 평정
대칸의 딸 고려 태자에에 시집보내 혼인동맹
징기스칸 시조모 알랑고아, 고구려 유화부인으로
남북한 서로 인정하고 몽골과 연합하면 강대국
대몽골 제국의 쿠빌라이 칸이 고려국왕에게 딸을 준 이야기
징기스칸의 손자이며 대원제국의 황제 쿠빌라이칸이다.
그가 대칸의 자리에 오른 배경에는 고려 고종의 세자 왕전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그 당시 고려 정부는 무신들이 절대권력을 쥐고 왕들은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 MBC 드라마 무신의 주인공 김준이 최 씨 무신정권을 무너뜨리고 왕실의 권한이 일부 회복된다.
당시 고려의 왕 고종은 몽골에 항복할 것을 결정하고 태자 왕전을 40명의 사신과 함께 멍케 칸에게 보낸다. 1259년 5월의 일이다. 우리 역사에서 적국에 항복하기 위해서 왕세자가 직접 찾아간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태자 일행이 멍케 칸을 만나러 가는 도중에 대칸의 사망 소식을 듣는다. 다음 대칸의 자리는 막내아들인 아릭 부케가 유력했다.
멍케칸이 남송 정벌을 떠나면서 몽골제국의 통치를 위임했고 대칸을 선출하는 쿠릴타이를 개최할 권한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 태자 일행은 아릭 부케와 쿠빌라이 두 사람 중 누구를 찾아가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태자 전은 명분보다 강력한 군사력을 소유한 쿠빌라이를 찾아가기로 마음을 결정한다.
세계역사와 고려역사가 뒤바뀌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마침 남송 공격을 중단하고 카이펑으로 올라오던 쿠빌라이는 고려국 태자 왕전 일행을 맞이한다.
쿠빌라이는 감격하여 외쳤다
“일찍이 당 태종이 몸소 공격해도 항복 받지 못했다. 지금 그 나라의 세자가 내게 항복하러 찾아왔다. 이것은 하늘의 뜻이로다.”
쿠빌라이는 독자적으로 쿠릴타이를 개최하여 스스로 대칸에 오른다.
대칸에 오른 쿠빌라이는 즉각 아릭 부케를 치기 위한 원정에 오른다. 1264년 마침내 아릭 부케를 평정하고 몽골제국의 대칸 쿠빌라이칸의 등장을 세계에 알렸다.
쿠빌라이칸은 고려를 극진히 생각했다. 고려를 무지개라는 뜻의 솔롱고스로 불렀다.
자신을 대칸의 자리에 오르게 한 고려의 태자에게 딸을 주어 사돈 관계를 맺었다. 태자 전은 고종의 뒤를 이어 원종이 되었다.
원종의 아들 왕심은 대원의 수도에서 세자학습을 받고 귀국하여 39세에 충렬왕으로 즉위한다. 쿠빌라이칸은 16세 막내딸을 태자비로 보낸다. 그가 바로 제국대장공주이다.
한국에서는 고려와 원 황실과의 결혼을 식민속국을 위한 전략으로 가르치는 경우가 많다.
대원제국과 고려의 결혼 동맹은 이전의 식민개념과는 다르다. 원나라의 부마가 된다는 것은 친족 관계로 전환하여 그 지위가 매우 높았다.
원사에 따르면 특별한 개국공신이 아니면 혼인관계를 맺을 수 없고 일단 부마가 되면 제왕의 대우를 받는다. 실제로 충렬왕은 원성종의 즉위식에 참석하여 권력서열 7위의 자리에 앉았다.
몽골비사에는 징기스칸의 시조모 알랑고아가 고주몽의 딸로 나타난다. 고구려와 몽골은 뿌리로 보면 바이칼의 코리족이 나눠진 것으로 생각한다.
대몽골 제국이 고려국을 부마국으로 대우한 것은 태자 전의 역할도 있지만, 피를 나눈 형제국으로써 세계경영에 동참시키려는 의도도 읽을 수가 있다.
몽골은 현재 인구 300만의 가난한 나라이다.
그러나 16배 넓은 영토와 엄청난 자원 등은 강대국들이 군침을 흘리고 있다.
남한과 북한이 서로 체제를 인정해 주고 교류를 확대해야 한다.
그리고 형제국인 몽골을 연대하여 3국 연방국을 건설할 수 있다면 한민족은 과거의 위대한 역사를 다시 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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