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강효백(전 경희대 교수)
고려와 조선 지킨 이종무 장군, 대마도 정벌
나라를 지킨 충심에 칼을 꽂은 이 조선 정권
우리 땅 대마도에 기어들어 약탈한 왜구 토벌
고려와 조선서 권력을 멀리하고 무인의 길 가
▲ 이종무 장군은 서기 1419.06.20. 227척의 군함을 이끌고 대마도로 가서 왜구를 토벌하였다.
<대한해협 파도 위에 남긴 칼끝 – 이종무 장군 진혼시>
강효백
대한의 파도여, 그날을 기억하라
서늘한 마산포 바람을 가르며
227척의 군선이
침묵을 깨고 닻을 올릴 때
장군 이종무는
백성의 눈물과 왕의 명을 싣고
동쪽 바다로 나아갔다
“대마도를 불태우라—
왜적의 숨통을 끊고
우리 포로를 구하라”
그 외침은 물결을 가르고
검은 산과 섬을 불꽃으로 덮었으니
129척의 적선을 가라앉히고
1,993채의 적진을 무너뜨렸다
대마도의 연기 속에서
장군은 말이 없었다
죽은 자들의 이름 앞에
구한 자들의 눈물 앞에
그는 묵묵히 칼끝만 세웠다
그러나 돌아온 후,
그에게 돌아온 것은
찬란한 승전도,
뜨거운 환호도 아닌
탄핵과 의심, 고요한 유배였다
장군이여,
그대의 칼은 파도를 가르고
그대의 충심은 나라를 지켰거늘
왜 사람들은 그 칼끝을 잊었는가
오늘 우리는 그 섬의 바람에 묻는다
대마도의 돌벽은 쓰러졌으나
이종무의 이름은 바다 위에 떠 있도다
이제는 부디 잠드소서
장군이여, 파도를 품은 혼이여
당신이 지킨 바다 대한해협은
지금도 고요히 당신을 부르고 있나이다
공격형 장군 30열전 23. 파도 위의 장군 – 이종무
장수현의 별
1360년, 전라도 장수현. 붉은 황톳길을 달리는 말 위에 한 소년이 서 있었다. 그의 눈빛은 매섭고, 활시위는 강하게 당겨졌다. 열 살이 채 되지 않은 나이였지만, 이미 그는 말과 활을 다루는 법을 몸으로 익히고 있었다. 이종무, 훗날 조선을 뒤흔들 전설적인 장군의 소년기였다.
그의 아버지는 말이 없는 사람이었으나, 나라를 위해 평생을 바친 무인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보며 이종무는 무인의 길을 선택했다. 검은 밤이 지나고, 이슬 맺힌 새벽이면 그는 활을 쏘고, 돌로 만든 허수아비를 향해 돌진했다. 아이들은 그를 두려워했다. 싸움을 잘해서가 아니라, 그의 눈빛이 너무도 진지했기 때문이다.
첫 전장, 그리고 불꽃
1381년, 고려 우왕 7년. 21세가 된 이종무는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로 향했다. 왜구가 다시 들이닥친 것이다. 바다 건너 일본에서 온 약탈자들은 불을 지르고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혼란한 마을, 울부짖는 아이들, 불타는 지붕 위에서 이종무는 칼을 빼들었다.
“아버지, 저는 이들을 두고 물러설 수 없습니다.”
젊은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리고 전투가 시작됐다. 이종무는 한 치의 두려움도 없이 적진에 뛰어들었다. 수십 명의 왜구가 쓰러졌다. 이 전공으로 그는 정용호군에 임명되었다. 그의 이름은 군부 안에서 천천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조선의 아침
1392년, 조선이 건국되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지는 격변의 시기. 혼란 속에서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충성은 한 인물에게 향해 있었다. 바로 정안대군 이방원.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이 발발하자, 이종무는 과감히 이방원의 진영에 가담했다. 회안대군 이방간의 군대는 그의 전략과 용맹 앞에 무너졌다.
이 전공으로 그는 익대좌명공신에 책봉되고, 통원군이라는 작위를 받게 된다. 그 후 의주, 안주, 함경도의 절제사와 병마사 등 각지의 군권을 맡으며 국가의 북방을 굳건히 다진다.
파도를 넘어
1419년, 세종 즉위 원년. 일본 쓰시마섬에서 왜구들이 다시 준동하기 시작했다. 세종은 깊은 고민 끝에 이종무를 삼군도체찰사로 임명한다.
"장군, 대마도에 조선을 건 건방진 자들에게 경고를 내려주시오."
이종무는 227척의 군함을 이끌고 마산포에서 출정한다. 6월 12일, 주원방포에 닻을 내린 그들은 작전을 준비했다. 6월 20일, 오시. 함대는 쓰시마섬에 도착했고, 작전은 개시되었다.
"화살을 당겨라! 전진하라!"
적선 129척을 격파하고, 가옥 1,993호를 불태웠다. 포로가 된 중국인과 조선인들도 구조했다.
“장군, 중국인이 있습니다! 인질로 잡혀 있던 자들입니다!”
이종무의 칼끝은 흔들림이 없었다. 대마도 정벌은 성공했고, 그는 장천군에 봉해졌다.
음모와 탄핵
그러나 그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박실 등 일부 장수의 전사와, 종군을 자원한 김훈과 노이를 추천한 것이 빌미가 되어 그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는다.
“불충한 자를 등용하다니, 이종무는 처단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세종은 단호했다.
“그는 나라를 위해 칼을 들었다. 그런 자를 함부로 모욕하지 마라.”
결국 그는 하옥되었다가 풀려나, 서울 밖에서 지내게 되었다. 1423년 명나라에 사은사로 파견되어 이듬해 돌아온 그는 숭록대부에서 보국숭록대부로, 찬성사에까지 이르렀다.
마지막 파도
1425년 음력 6월 9일, 병으로 쓰러진 이종무는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세종은 조회를 3일간 멈추고, “만리장성이 무너졌다!”는 탄식의 교서를 내린다.
그의 무덤은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 산 79번지에 자리하고 있으며, 지금도 장군의 무공과 충절을 기리는 이들이 이곳을 찾는다.
기억 속의 장군
이종무는 단순한 무장이 아니었다. 그는 혼란한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로 넘어가는 혼돈 속에서 나라를 지킨 방패였다. 그는 검으로 왜적을 막았고, 충심으로 왕을 지켰다. 강을 건너고, 파도를 넘으며, 그는 단 한 번도 등을 보인 적이 없었다.
오늘날 그의 이름은 역사책 속에 고요히 남아 있지만, 그가 남긴 울림은 여전히 바다를 타고 흐른다. 칼 대신 펜을 든 우리는 이제, 그 장군의 생애를 다시 불러내야 한다. 그가 걸었던 길 위에, 오늘의 우리가 서 있기 때문이다.
출처: https://www.facebook.com/ganghyobae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