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기는 백제가 야마토 왜의 속국인 것으로 조작

근초고왕의 열도 정복, 신공왕후 행위로 둔갑한 듯

신공왕후가 신라 정벌하고 임나 7국 정복했다고 날조

이를 삼국사기 기록과 맞추기 위해 120년 더하여 해석

▲야마토 왜의 신공왕후가 바다 건너 와서 고구려 백제 신라를 굴복시켰다는 것을 나타내는 그림. 일본서기의 날조역사를 바탕으로 그린 것이다. 자료: 삼태극


<일본서기>를 보면 왜왕이 황제처럼 백제 왕을 제후나 신하처럼 다루는 것이 나온다. 이것은 일부는 백제 사서를 인용해 적어놓고, 다른 일부는 백제와 왜가 교류했던 사실만 뽑아 입장을 완전히 바꿔 백제가 상국이 아닌 왜가 상국인 것처럼 조작하여 곡필한 것이다. <일본서기> 저술 시점에 망국이 된 백제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백제가 번국인 왜를 지배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러 후왕(侯王)이나 총독 형태로 보낸 백제 왕족이 왜의 통치자였다.

백제가 멸망하고 난 이후 <일본서기>가 쓰여지는 과정에서 근초고왕의 행적이 신공왕후의 행적으로 둔갑되어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역사 관점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일본서기>의 조작을 설득력있게 제시한 것이 김주인의 박사학위 논문 <왜(倭) 5왕과 왜왕제도에 관한 연구>에 있었다. 공감되는 역사해석이어서 발췌하여 소개한다.

김박사는 "<삼국사기>는 신라의 정통성을 부각하는 입장에서 근초고왕의 일본 정복을 기록하는 경우 백제의 해양 강국 위상이 도드라지기 때문에 삭제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하였다. 근초고왕은 백제의 전성기를 이끈 정복왕으로 평가받는데도 <삼국사기>에는 재위 2년 이후부터 21년 사이의 기록이 하나도 없다. 이 때문에 이 시기 나라를 어떻게 다스렸는지 알 수가 없다. 중국사서에 나오는 왜5왕을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알았을 텐데도 나오지 않는 것과도 통한다.

김 박사는 또 이같이 주장하였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근초고왕의 일본 열도 정복 활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것은 <일본서기> '신공기'의 기록이 근초고왕의 열도 정복 활동을 거꾸로 차용해서 작성했다고 보면 이해가 되고 수긍이 된다.

<일본서기> 편저자들은 히미코의 죽음 후 무주공산이 된 열도 상황을 호도하는 한편 천황제의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신공기'를 창작해 <일본서기>에 삽입한 것으로 보인다.

히미코가 266년 중국에 사신을 보내 금인과 동경 등을 하사받은 것을 끝으로 150여 년간 사라진 역사 공백을 메꾸기 위해 신공여왕을 등장시킨 것이다.

역사서의 기초가 기년인데 2주갑 인상이라는 기발한 편법을 동원해서 신공 49년, 즉 249년의 연대를 369년으로 해석하고 거기에 근초고왕의 열도 정벌을 차용하여 신공이 신라를 정벌했는데 그 결과 임나 7국을 정벌한 것으로 만들었다.

이를 기본으로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간사였던 스에마스 야스카즈 등은 야마토 왜가 4세기에 열도를 통일하고 한반도에 진출한 듯이 허위로 꾸몄다.

임나 7국의 위치를 한반도에 비정해서 왜가 369년 가야 지역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하고 나아가 충청도와 전라도까지 지배하다가 562년 가야가 신라에 의해 무너질 때까지 지속했다고 조작하여 이론을 구축했다.

이 망령은 <전라도천년사> 파동에서 보듯이 아직도 한국과 일본 학계의 머리 위에서 맴돌고 있으니 학문 이전에 개탄스런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지금도 가야사 학계는 임나 7국의 위치를 한반도에서 찾고 있다.

김주인 박사는 이어 "그러나 신공기의 실제 임나 7국은 한반도에 있는 국명이 아니라 일본 열도에 있었던 소국들의 이름이었다. 신공이 보냈다는 장군 황전별(荒田別 : 아라타와케)과 백제의 장군이 만나 동맹을 맺었다는 고사산(古沙山, 쿠사노부레)은 일본 기비지역 오카야마현의 북부에 있는 산 이름임이 밝혀졌다(조희승의 <조선단대사>, 244쪽)

신공의 삼한 정벌 기록은 허구이므로 그 자리에 정복 군주 근초고왕의 열도 정벌이 역사로 자리 잡아야 한다. 근초고왕의 열도 정복으로 소국들을 통할할 수 있는 기구가 필요하였다. 이것이 왜왕제도다."라고 하였다.

백제가 일본 열도에 처음 진출한 시기는 근초고왕(재위 346~375) 시대로 추측된다. 근초고왕 시대는 백제의 전성기로 해외 진출이 가능할 정도의 충분한 역량을 갖춘 시절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측은 <일본서기>에 364년 백제왕이 왜 진출로를 찾기 위해 신하들을 가야에 파견하여 2년 후 백제는 왜인들과의 접촉에 성공함으로써, 366년 백제와 왜간 공식적인 교류가 시작된 것(박효균 <칠지도 명문>, 88쪽)을 통해 가늠할 수 있다.

신공왕후조는 후대에 일어난 사건들을 끌어다가 120년 먼저 일어났던 사실인양 기록한 것이다. 왜곡되고 과장된 내용이 많은데다 시간적 오차까지 발생하는 것으로 보아, 신공왕후조는 가상의 인물인 신공왕후를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인 것처럼 꾸며낸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과 120년의 차이를 보이는 것은 우연한 시간 착오가 아니라 가상인물인 신공왕후를 비미호에 대입시키려고 일부러 앞당겼기 때문이다(박효균 <칠지도 명문>, 94~95쪽).

<일본서기> 편저자들도 신공왕후의 허구성을 인식하여 신을 등장시킨다. 신공이 재위 9년에 만삭의 몸으로 바다를 건너는데, 신의 도움을 받아 신라를 비롯한 삼한을 정벌한다. 재위 49년에는 신라를 정벌하고 가라 7국을 정복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이는 3세기 중반 신공의 남편으로 설정한 중애 이후의 역사 공백을 호도하기 위한 설정이었다.

19세기 대륙진출을 위한 구실을 찾던 일본의 관학자들은 이 기사를 활용하여 한반도 침략을 고대사의 복원으로 합리화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이를 위해서 연대를 조정해야 했다. 주목한 것이 <일본서기> '신공 55년(255)조'의 "초고왕이 죽었다"는 기사다.

255년은 너무 일러 야마토 왜가 열도를 통일했다고 우기기에는 무리가 있고 설득력이 부족하다. 그래서 초고왕 앞에 '근'자 하나 더 붙이고 120년을 더하였다. 이러면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근초고왕의 375년과 맞아떨어진다. 이리하여 이주갑 인상설이 탄생하였다고 김주인 박사께서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