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헌동(김해근대역사위원회 위원장)
광개토태왕비, 일본서기 열도 가야소국 역사 기록
이토시마지역에 진출한 가야인들 조선식 산성 축조
광개토태왕비의 임나가라는 대마도에 있는 고유 지명
▲ 이토시마에는 가야인들이 축조한 조선식 산성이 있다(편집인 주). 자료: 구글지도 갈무리.
큐슈 이토시마 지역의 가야 소국
일본 열도에 진출한 가야사람들은 이르는 곳마다 마을과 고을을 이루고 살았다. 가야 사람들이 만든 소국들 가운데서 대표적인 것이 가야와 가장 가까운 큐슈지역의 가야소국, 세토내해 기비지역의 가야소국들, 기이지방 와까야마현 일대의 가야소국 등이다. 일본열도 각지에 형성된 가야소국들은 광개토태왕릉비와 <일본서기> 등에 반영되어 있다.
광개토대왕비에는 고국 가야의 편에 서서 고구려와 싸운 가야소국이 반영되어 있다. 고구려 사람들은 이들을 왜 땅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여 왜라고 불렀다.
<일본서기>에 반영된 가야소국들은 주로 기비지방에 있던 가야 소국들이었다. <일본서기>에 기비지역의 임나를 비롯한 가야소국들과 고구려와 백제, 신라인들이 세웠던 소국들이 자주 나온다.
이것은 6세기에 있었던 야마토 정권의 일본 통합과정에서 가장 큰 난관이 바로 기비지방에 있던 이들 소국들이었기 때문이다.
가야 소국이 있었던 이토시마반도는 북쪽이 시마군이고 남쪽이 이토군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열도가 큐슈이고 큐슈에서도 우리나라쪽을 향해 삐여져나와 가장 가깝게 접근해 있는 곳이 바로 이토시마반도다.
가야사람들이 이 지역에 정착하여 살면서 자기들의 고유한 풍습대로 집을 짓고 살았으며 집에는 온돌을 놓았다.
그리고 조상의 장법을 그대로 이어서 무덤무지에 수혈식돌칸을 구축하고 거기에 묻히었으며 조선식산성을 축조하였다.
이토시마지역에 진출한 가야사람들은 산성을 축조하였다. 아라가야의 산성축성법은 같은 가야나라들은 물론이고 바다 건너 일본땅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현재 일본 서부에 있는 조선식산성, 특히 가야계통 소국으로 비정하는 이토시마의 라이산산성, 시코쿠 사누끼의 기야마산성, 기비 기노죠산성 등의 축성법이 아라가야의 산성축성법과 같다.
이것은 가야사람들이 일본에 진출할 때 기술집단과 함께 이 나라의 축성집단도 함께 건너갔다는 것을 보여 준다.
큰 산성은 막대한 재부와 노력을 동원할 수 있는 국가 권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래서 조선식 산성이 있는 곳은 어디에 있든지 조선계통 소국의 상징이라고 할수 있다.
가야사람들이 이토시마 지역에 만든 대표적인 산성이 라이산(雷山, 955m)에 있는 산성이다. 이 산성은 라이산의 가운데쯤(400~450m)에 산허리를 감을듯이 구축되었다. 라이산의 화강석을 네모나게 다듬어 쌓은 산성에는 수문이 남북 두 군데에 있으며 물도 비교적 풍부하다.
이 산성이 조선식이라는 것은 오래된 축조형식뿐만 아니라 라이산성에 있었던 고소신사가 옛적에 가라궁(加羅宮)으로 불리웠고 라이산성이 위치한 세부리산지 자체가 조선말에 어근을 두고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토시마반도에 있는 산성유적은 그 곳에 방어시설을 만들고 이용한 권력집단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한다. 그 권력집단이 바로 가야 이주민 집단이 만든 가야 소국이었다.
이 소국은 대마도와 이키섬까지도 통제권에 둔 광개토대왕비문에는 왜로 불린 것이다. 위의 글은 <북한학계의 가야사 연구> 책을 참고한 것이다
30여 년간 일본 고대 신화와 일본 역사서를 섭렵하고 현지 지명까지 조사해 이를 다시 어원과 음용학적 분석을 통해 결론을 내리는 이병선 부산대 명예교수는 "옛날엔 주민의 이주로 동일한 지명이 여러 곳에 생겨나곤 한다.
대마도와 일본 열도에서 한반도의 지명이 널리 보이는 것은 이곳이 고대 한반도 주민의 이주지였기 때문으로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고 한다.
광개토태왕릉비 '경자년조'에 나오는 임나가라는 대마도에 있는 좌효가라와 인위가라, 계지가라의 삼가라처럼 대마도에 있었던 고유명사라고 한다.
광개토대왕비문의 '至任那加羅' 앞부분 8자 정도 소실된 것에 고구려군이 왜를 뒤쫓을 때 바다를 건너라는 것이 있었다고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