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헌동(김해근대역사위원회 위원장)

 

일제식민사관 골수분자 이마니시류,

일본서기 임나를 한반도 남부 가야라고 우겨

임나와 가야는 시작과 끝이 전혀 다른 역사

▲ 현재 일본에서 사용되고 있는 일본역사서. 전라, 경상남도가 일본서기의 임나로 표기되어 있다 일제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우리역사 날조에 따른 것이다(편집인 주). 자료: 코리히스토리타임스.
▲ 현재 일본에서 사용되고 있는 일본역사서. 전라, 경상남도가 일본서기의 임나로 표기되어 있다 일제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우리역사 날조에 따른 것이다(편집인 주). 자료: 코리히스토리타임스.

임나와 가야는 같은 나라인가 다른 나라인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 식민사관으로 우리나라 고대사를 조작하고 왜곡했던 이마니시 류는 민족의 뿌리인 단군 말살, 고대 한반도 북부는 중국의 식민지였다는 낙랑군 평양설, 남부는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창하였다.

우리 역사의 출발이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마니시 류의 보조 역할을 한 사람이 조선사편수회 편수관보를 역임한 이병도였다.

이마니시 류는 임나는 가야라는 임나 가야설을 주창하고 임나관련 지명을 일본서기에 의거하여 우리나라에서 찾았다. 가야사 학계도 임나 가야설을 근거로 임나관련 지명을 일본서기에 의거하여 우리나라에서 찾는다.

임나 가야설이 성립되려면 임나와 가야는 같은 나라로 건국과 멸망이 같아야 한다. 가야는 서기 42년 건국이 되었다.

<일본서기>에는 숭신(崇神) 65년(기원전 33년) 임나국의 소나갈질지(蘇那曷叱智) 기사가 나온다. 최재석 박사는 <가야와 미마나[任那]는 동일국인가>라는 논문에서 임나의 개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논한다.

"임나에 관한 기사는 ≪일본서기≫ 崇神 65년조에 최초로 보이며, 그 후 수이닌[垂仁] 2년에 한 번 나타나며 그후 270여 년 동안 공백으로 있다가 진고와 오진조에 이르러 다시 네 번 나타난다. 그후 다시 60년 동안 공백으로 있다가 유랴쿠[雄略]조에 이르러 다시 임나 기사가 이어지면서 그후부터는 빈번히 나타난다.

오진[應神] 이전의 기년은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과 임나 기사의 공백 기간 등을 고려할 때 임나는 5세기 후반 유라쿠 때에 개국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이렇게 볼 때, 가야와 임나의 개국년도는 동일하지 않다. 설사 최초의 임나 기사가 나타나는 수진 65년을 임나의 개국년으로 간주하더라도 가야의 개국년과는 다르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는 가야와 건국년도가 다른 나라다.

김해의 금관가야는 532년, 대가야는 562년에 멸망하였다. <일본서기>에는 대가야 멸망 이후인 서기 600년대에 임나가 여러 번 나온다. 그래서 멸망의 시기가 다른 가야와 임나는 같은 나라가 아니다.

그런데도 2024.11.11 김해시사 가야사 토론자 이형우는 "임나[가야]는 562년 멸망 이후 신라의 부용국으로 640년대까지 존속하였다. 그 종말은 기록의 부재로 알 수 없다. <수서> <통전> <한원> 신라전에서 부용국임을 똑똑히 언급하고 있다.

신라의 한 지방으로 편제되지 않고 한동안 부용국으로 있었으므로 다른 나라에 사신을 보낼 수도 있고, 다른 나라에서 임나로 사신을 보낼 수도 있다. 기록의 해석에 아무 문제가 없다."

"일본서기 600년대에 나오는 임나 관련 기사 1) 신라와 전쟁을 여러 번 하고 2) 야마도왜에 사신을 여러 번 보내고 3) 야마도왜에서도 임나에 사신을 보낸다. 맞다. 기록에 분명히 임나는 전쟁을 수행하고, 사신을 파견하고, 사신 영접한다.

신라의 부용국이 된 임나(가야)는 전쟁을 수행하고, 사신을 파견하고, 사신을 영접한다. 뭐가 문제인가?"라고 한다.

서기 600년대에 우리나라에 가야라는 나라는 없었다. 없는 나라가 부용국이 될수 없다. 그런데도 임나를 우리나라 가야라고 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다. 없는 나라가 전쟁을 할수 없고 사신을 주고 받을 일도 없는 것은 상식이다.

가야는 562년 모두 멸망하여 신라의 한 지방으로 흡수되어 멸망 후 신라의 부용국이 된 적이 없다. 서기 600년대에 금관가야 왕족은 신라의 귀족이 되어 있었고 금관가야나 대가야는 신라에 흡수되어 신라의 한 지방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610년에 가야 마지막왕의 후손인 김유신은 신라의 화랑이 된다.

그런데도 이형우와 같은 주장을 하는 것은 임나 가야설이 무너지면 가야 시대 지명을 일본서기에 근거하여 관찬사나 향토사에 서술된 것을 시정해야 하기 때문인가?

식민사관으로 조선사편수회에서 만든 역사를 따르는 사람들이 고대사학계를 장악하여 식민사학이 극복되지 못해서 그런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