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헌동(김해근대역사위원회 위원장)
김해 다호리유적서 중국보다 우수한 붓과 칼 나와
식민사관, 우리 우수한 문화 유령 취급 중국 일본 높여
최고 절정 기술 집약된 다뉴세문경 무시, 일본 것 소개
철 제조기술도 없는 왜, 우리나라 휘저었다고 날조
▲ 김해 다호리 유적에서 나온 붓과 칼. 자료: 국가유산청 자료 갈무리.
가야지역의 발달된 제철 제강 기술
가야에서의 제철업 발전은 그대로 국력의 강화와 발전된 문화를 위한 바탕이 되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진조'에 "철이 나는데 한(韓), 예(濊), 왜(倭) 등지에서 이를 가져간다.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파는 것도 모두 쇠를 가지고 하여 마치 중국에서 돈을 가지고 쓰듯이 한다"는 기사가 있다. 가야지역의 철이 다른 나라에까지 널리 알려지고 교역을 통한 수출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교역시 글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 다호리 고분의 지도자급 묘인 1호분에서 출토된 붓 5자루와 손칼이다. 이 붓과 손칼은 연필과 지우개 같은 문방구 역할을 한 것으로 교역시 영수증 작성에 사용되었다.
다호리 출토 붓은 중국 붓과는 재질, 형태, 보관 방법이 달랐다. 붓대의 양 끝에 털을 부착하여 실용성을 높였고, 붓대의 재질도 옻칠한 나무로 독자적으로 붓을 생산하여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다.
기원전 1세기경 가야지역에 기록문화가 본격적으로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다호리는 대산만(지금의 창원 대산면과 동읍 등의 저지대는 만이었다)이 인접한 곳이고 김해도 지금의 대저와 명지, 가락 등은 바다였다.
그래서 다호리의 대산만에서 김해는 수로로 연결되어 쉽게 오갈 수 있었다. 교류와 교역이 가장 활발했던 김해지역의 지도자인 9간들도 글을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제는 식민사관으로 우리의 고대는 미개하였다는 역사관으로 단군조선을 인정하지 않고 청동기나 철기도 중국에서 받아들인 것만을 강조하여 우리나라의 우수한 독창적인 것은 인정하지 않았다.
BC 4~5세기경에 만들어진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은 잔무늬의 높이가 0.007㎜고 폭은 0.05㎜의 세밀한 무늬로 이루어진 작은 원 안에 만개가 넘는 선과 백여 개의 동심원이 새겨져 있다.
이처럼 뛰어난 청동 주조물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현대 최첨단 나노기술과 필적할 만한 초정밀 세공기술을 지닌 당대 세계 최고의 청동거울이었다.
그런데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만든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이 아닌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다뉴세문경을 소개하고 있고 역사교과서와 역사교육에서도 제대로 다루지 않는다.
가야의 철은 역사가 오래되어 가야 유역에서 철기가 출현하는 것은 BC 4세기부터다. 가야의 철 제품 품질이 중국보다 우수한 것은 양쪽의 끝부분에 탄소를 불어넣는 제련 공법인데, 이것은 고대 인도의 철 제련법과 같다고 한다. BC 1세기 김해 인근에서 철제품이 나온 유적지로는 창원 다호리 고분과 밀양 교동 고분 등이 있다.
이것은 가야사람들이 일찍부터 쇠돌캐기와 사철채취, 제철, 제강 및 철기가공 기술이 발전해 있었기 때문이다.
가야 지역에는 자철광과 적철강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고 사철도 많았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합천의 삼가와 산음, 야로, 김해와 창원 등지의 사철은 양적으로도 많고 질이 좋았다"고 한다.
'북한학계의 가야사 연구' 책에 '가야철정 출토 정형' 일람표가 있다. 무덤 이름, 시기와 양, 비고로 되어 있는데 무덤 이름이 25곳 나와 있다. 김해시 대성동 2호와 3호 무덤은 철정이 150여 개, 대성동 23호 무덤은 60여 개가 있다. 가야지역에서 발굴된 철정의 수는 그 시기 삼국에서 발굴된 것을 합친 것보다 더 많다.
가야지역에서 확인된 투구, 갑옷은 단갑 31개, 수신판 투구 40개, 채양 달린 투구 2개, 배머리모양 투구 3개, 괘갑(쇠찰갑) 24개 등이다. 이밖에 괘갑의 부속품으로서 나팔모양경(목)갑 16개, 괭다리갑 2개, 단갑의 부속품으로서 경갑 4개, 어깨갑 2개가 있다. 형식이 규정되지 않은 투구가 12개가 있다. 말의 장구류로는 말투구 9개, 말갑옷 5개가 있다.
가야의 철과 관련하여 반드시 언급해야 할 것이 "왜에 의한 조선반도 남부의 철 쟁탈전"이라는 궤변이다. 지난날 식민사관에 의한 임나일본부설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오늘날 일본학자들이 이 설에 집착하고 있다.
일본학자들은 이제는 광개토대왕비에 나오는 왜를 공공연히 야마토왜라고 부르지 못하게 되고, 임나일본부설이 붕괴되자 "왜 정권이 조선반도에 군사진출을 한 것만은 사실"이라면서 그 근거로서 "광개토대왕비문에 왜의 싸움기록이 나온다"고 한다. 이것은 왜 정권이 조선반도에서 철자원과 관련 기술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출병하였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황당무계한 왜의 조선 진출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광개토대왕비문에 나오는 왜는 가야의 철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모국인 가야를 지원하기 위해 전쟁에 참여한 큐슈에 있었던 왜라는 것이 타당하다. 광개토대왕비에 나오는 왜의 군사력은 철 제련술도 없었던 야마토왜의 군사력이 아니라 큐슈에 있었던 가야계통 왜의 군사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