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종성(지방분권포럼 대표)
▲ 유종성(지방분권포럼 대표)
고려는 고구려-발해 고토를 자국의 땅으로 인식
강동6주는 요하중류 이동에 위치
고려전기 실질적으로 해동천하 구축
▲ 유튜브 ‘진짜 역사’ 캡쳐 고려 당대의 영토인식을 반영한 1만리 고려강역도
현재 우리가 인식하는 압록강에서 원산만 일대의 경계선은 당대 고려인들에게는 생소한 지도이다. 고려인들은 자국의 영토를 다음과 같이 인식하고 있었다. “우리 해동은 삼면이 바다에 가리어지고 한구석이 육지에 연접하여 넓이가 거의 만리(萬里)나 된다...관할하는 주군(州郡)은 모두 580여 개였으니, 우리나라(東國) 지리의 융성함이 여기서 극치를 이루었다…서북쪽은 당 이래의 압록을 한계로 삼고, 동북쪽은 선춘령으로 경계를 삼으니 대저 서북의 끝은 고구려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동북은 그것을 넘어섰다<고려사 지리서문>”
우리가 알고 있는 통설은 부정확한 조선초기의 지리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그려진 것이다. 조선후기 실학자들도 <고려사> 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이 <고려사> 세가 및 열전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의문을 제기했다. 몽골제국의 고려 침략 이후 고려 영토 내의 지명 및 행정구역의 위치가 많이 변하게 된다. 양계의 주진인(州鎭人)이 해도로 입보하거나 남쪽지방으로 옮겨 임시로 거처하고, 출륙 후에도 여러 주진(州鎭) 사이에 병속관계가 진행되어 양계 지역의 지명 또한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고, 이러한 변화는 조선전기를 거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조선후기 실학자들과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조선 전기에 제작된 지리지들의 서술들을 비판없이 수용한 결과 고려인들에게는 너무나도 생소한 엉뚱한 고려 강역도가 나오게 된 것이다.
태조왕건은 고구려계승을 표방하면서 국초부터 북진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이러한 태조의 구상을 이제현은 다음과 같이 평(評)하고 있다. ‘태조가 삼한을 통일하기도 전에 서도(西都)에 행차하여 북변을 친히 순시한 뜻이 고구려의 옛땅을 내 집의 보배같이 여겨 반드시 석권하여 가지고자 한 뜻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 옛 신라 강역을 취하고 북으로 압록강까지 올라가는데서 그치고자 하였겠는가’라며 태조의 원대한 영토 구상이 고구려 고토의 완전한 수복에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강경구의 연구에 따르면 후기신라는 패강(=대동강)을 넘어 (현)압록강까지 진출하여 패서도(浿西道)를 설치하고 향수제(鄕戍制)로 통치했다고 한다. 후에 궁예는 그 지역의 호족들을 포섭하여 ‘패서13진’을 설치하였을 뿐만 아니라 발해를 공격하여 요동으로 나아갔다. <발해국기>상편 애왕조(907년)에는 “궁예가 우리(발해)의 남쪽을 치자 윤훤이 골암성을 들어 투항하였다. 발해 애왕(哀王 대인선)이 노하여 장군 달고적(達姑狄)으로 하여금 신라를 치게 하였으나 등주(登州)에서 대패하여 그 직을 상실하게 되자 변장(邊將)인 고자라가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이로부터 (발해가) *압록강(鴨淥江)의 남쪽 땅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한다. 신라가 이미 (현)압록강까지 점유한 상황이였으니 여기서 압록강(鴨淥江)은 요동에 있는 하천이 분명하다. 또한 고려사 홍유열전에는 “(궁예가)...셋으로 나누어진 요좌[遼左 요동]의 거의 절반을 점거하였습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서 요좌는 요동과 한반도를 포함하는 개념이니, 궁예의 태봉(泰封) 시기에 한반도를 넘어 요동까지 진출한 것이다.
이것을 이어받아 태조는 요동일대에 있던 "마헐탄"을 국경으로 정하게 된다. 제6대 성종 당시 최승로는 시무28조에서 “마헐탄까지로 경계를 정한 것은 태조의 뜻이고, 압강가의 석성으로 정한 것은 대조(大朝)의 정한 바입니다”라고 진언한다. 여기서 '대조(大朝)'는 <고려사>의 용례상 “거란”을 지칭한다. 고려가 요동의 마헐탄을 국경으로 정하자 이에 거란이 반발하며 (현)압록강까지만 인정하겠다고 한 것이다.
요동에는 고구려-발해시대 중국에 말을 팔려가는 교통로인 ‘마행도(馬行道)’가 있었다. 여진도 이길을 이용하였다. 요동일대는 철령, 무순, 개원지역을 중심으로 초원지대와 내륙산간지대로 구분된다. 초원지대는 말 생산지였고, 만주 철령 지역에는 말 시장이 번성하기도 하였다. 여기를 기점으로 하여 요하를 거쳐 요동 대련과 산동 등주를 연결시키는 묘도군도인 북선항로로 말이 운반되었다. 고려는 어느 시점엔가 이 마행도를 점거하였는데 아마도 이 길 중간지점에 마헐탄(馬歇灘 ‘말이 쉬어가는 여울’)도 있었을 것이다.
▲ 유튜브 대한사랑, 경제관점에서 본 고려서북계 위치고찰(신민식박사) 캡쳐, 우측 지도는 가탐도리기에 요하를 거쳐 발해황성과 신라황성을 가는 길을 표시한 것이다. 요동에서 산동으로 그려진 선 중에 위에 있는 선이 ‘마행도’이다.
서북계에 대한 경략은 태조 원년(918)에 *골암성(鶻巖城)의 호족 윤선의 귀부에 힘입어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된다. 윤선은 궁예의 북벌(北伐) 당시 그에게 귀부(歸附)했으나 말엽에 궁예의 폭정이 이어지자 배반하여 흑수인들을 끌어모아 변방에 해를 끼쳤고 왕건이 즉위하자 다시 거주지를 들고 투항해 왔다고 한다. 이에 골암성이 지닌 전략적 가치가 인정되어 ‘골암진’으로 개편되었고 북계의 전초기지가 된다. 그 후 북적(北狄 발해 속부 말갈인)이 골암성을 자주 침략하자 태조 3년(920)에 유금필이 개정군 3000으로 그 일대를 평정하고 대성(大城)을 쌓아 안정을 되찾았다.
*허인욱은 골암(Kor[g]am)이 골간(Korgan) 지역과 음이 비슷한 것을 들어 두만강 일대로 이해하나, 골암진이 북계에 소재했고, 윤선의 귀부이후 발해가 압록강(혼하) 이남을 상실했다는 기록을 보면 요동일대로 보인다. 이 부분은 강호제현(江湖諸賢)의 심도있는 연구가 요구된다.
태조 당시 국경선과 관련하여 다음의 기사가 눈길을 끈다. “(발해의) 부여성(扶餘城)은 고구려의 부여성이다. 당시 고려왕 왕건이 나라를 세워 혼동강(混同江)까지 차지해서 지켰다. 그러나 혼동강 서쪽은 차지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부여성은 발해에 속한 것이다. 혼동강은 바로 압록수이다” 이 기사에서 부여성과 혼동강이 함께 언급되고 있다. 두 지역이 인접한 거리에 있었기때문일 것이다. 또한 1075년 문종이 거란주 도종에게 보낸 글에서는 “...또한 압록강의 형성이 제잠(鯷岑 고려)의 한계를 그어 국경을 만든 것인데, (압록)강을 연(沿)한 여러 고지(故址)에 부여(扶餘)의 옛 성(城)이 아직도 남아 있다...(동문선 제39권 표전 上大遼告奏表)”라고 한다. 두 기사에서 압록강=혼동강(압록수)의 인근에 있던 부여성은 통설상 요령성 룡안일대로 비정되는 바, 이 압록강(=혼동강)은 그 주변의 하천들 중에 ‘혼하(渾河)’로 판단된다.
다음은 이 사실을 더욱 뒷받침하는 기록들이다. <고려사> 지리지는 고려의 서쪽 경계를 '압록'이라 하는데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요수(遼水)’라고 한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고구려때의 도읍은 안시성 일명 안정홀로서 요수의 북쪽에 위치했고 요수는 일명 압록(鴨淥)이고, 지금은 안민강(安民江)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여기서 안시성이 요수의 북쪽에 있다고 하는데 당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할 당시에 분명히 요하를 건넌 후 안시성으로 진격했기에 여기서 요수는 요하가 아니다. 따라서 안시성의 남쪽에 있던 요수는 혼하로 볼 수 밖에 없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혼하를 ‘소요수’로 기록하고 있다. 고수-고당전쟁 때 수군(隋軍)과 당군이 요하를 건넌 후 이어서 압록수를 건너고 있으니, 압록강으로도 불린 혼동강은 곧 소요수이고 오늘날 혼하이다.
▲ 유튜브 ‘진짜 역사’ 캡쳐. 윤한택의 연구에 따르면 고려사, 요사, 금사를 교차검증한 결과 두 개의 압록강이 확인되는데 요 .금시기에 요동에 있던 물수변의 압록강(鴨淥江)과 북한에 있는 실사변의 압록강(鴨綠江)으로 구분된다고 한다.
혼동강을 일명 압록수라고 하는 것은 바로 국경을 짓는 하천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허우범의 연구에 의하면 '압록'은 만주어 yalu를 음차한 것으로 토지의 구역을 가르는 경계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압록은 어느 특정한 강을 의미한다고만 볼 수 없고 경계를 마주하는 두 국가의 힘의 변동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강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제3대 광종은 태조의 유지를 받들어 북쪽으로 계속해서 영토를 확장하여 동왕(同王) 11년(960)에 안북부로부터 거란의 동경에 이르는 수백리의 땅에 ‘가주(嘉州)'와 '척주(拓州)'를 설치하여 실질적으로 영역화한다. 이러한 광종대의 영토확장을 바탕으로 하여 제6대 성종 10년(991)에는 현)압록강 밖의 여진족을 축출하여 ‘백두산 밖’에 살도록 조치하였다. 백두산지역은 고려 황실의 조상인 호경(虎景)의 발상지로서 성지(聖地)였기에 반드시 확보해야만 하는 곳이였고, 동북지역 강토를 수복하기 위한 그 기초를 닦는 정지작업의 일환으로도 필요한 일이였다.
이러한 고려의 북진책은 거란과의 충돌을 야기시켜 마침내 성종 12년(993)에 거란의 침입이 있게 된다. 이때 거란군의 진격로 상에 있던 요동의 여진인들이 고려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에 그 침략 사실을 보고 하는데 “여름 5월에 서북계의 여진이 고하기를 거란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침노할 것을 모의한다<고려사절요>”고 하였다.
요동으로의 진출을 꾀한 고려의 이러한 시도는 거란과의 충돌을 겪으면서도 지속적으로 추진되어 마침내 서희의 외교담판으로 요하중류 이동에 강동6주(江東六州)를 확보하는 결실을 맺게 된다(994년). 강동6주 지역은 거란이 넘겨주고도 뒤늦게 소금, 철, 말과 같은 경제적 이익이 산출되고, 군사적으로 전략 요충지라는 사실을 알고 후회하여 계속 반환을 요구하며 전쟁을 일으켰던 곳이다.
이 지역은 우리쪽의 기록보다는 거란의 지리 인식이 반영된 <요사(遼史)>를 통해서 볼 때 그 위치가 보다 선명해 진다. <요사>에는 강동6주의 정확한 위치를 서술하고 있는데 그 중에 하나인 철주(鐵州)의 위치와 관련된 기록을 보면 “철주는 남쪽으로 시하(柴河), 북쪽은 청하(淸河)가 있고 서쪽은 요하(遼河)가 있다”고 한다. 이 세 강은 모두 요동에 있다. 또 하나 통주(通州)의 위치와 관련하여 <요사>에는 “고려의 강조 부대는 통주의 서쪽편으로 세 강물이 모이는 곳에 웅거했다”고 하는데 평북지역에는 세 개의 강물이 모이는 곳(三水之會)이 없다.
▲ ▲좌측 유튜브 대한사랑, 경제관점에서 본 고려서북계 위치고찰, 신민식박사 캡쳐, 우측, 대한사랑 캡쳐. 강동6주 위치.
그리고 거란의 3차 침입 당시 거란장수 소배압이 요동에서 고려군과 전투하는 기록이 있다. <요사> 야율팔가열전 “개태7년(1018) 거란 성종이 동평왕 소배압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고려를 정벌하도록 하였고 야율팔가를 도감을 삼았다. 다하(茶河)와 타하(陀河)를 건너려고 할 때 고려군이 추격해왔다.” 또한 <요사> 소배압열전에는 “다하(茶河)와 타하(陀河)를 건널 때 고려군이 양쪽에서 활을 쐈다. 소배압은 갑옷을 벗고 도주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하와 타하는 요하의 지류에 있는 하천들이다. 따라서 여러 정황상 강동6주는 요하중류 이동에 위치했던 것이다.
▲ 좌측, 대한사랑 유튜브 캡쳐, 요하의 지류인 다하와 타하라는 하천이 보인다. 가운데, 유튜브 ‘진짜 역사’ 캡쳐, 우측, 요탑분포도. 거란국지의 거란에 속한 주요 지명과 요탑 분포도를 보면 혼하 이동과 길림합달령 이남을 넘어 서지 못하고 있다. 고려는 거란과 요하와 혼하 인근에서 진퇴를 반복하며 영토분쟁을 겪었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기록이 많은 중에 다음의 기사가 주목된다. "현종 17년(1026)에 거란이 어원판관(御院判官) 야율골타를 보내 동북여진(東北女眞)으로 가는 길을 빌려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고려사>" 고려가 수복한 강토가 거란과 여진 사이에 있지 않고서는 설명될 수 없는 기사이다. 거란이 고려에게 가도(假道)를 요청했으나 현종이 불허하여 그들의 여진행(女眞行)이 저지된 것은 실제적으로 고려 경계에 관방이 설치되고 수병(戍兵)이 배치되어 길목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17대 인종 원년(1123)에 송의 사신으로 온 서긍이 남긴 <고려도경>에서 “고려의 남쪽은 요해(遼海)로 막혀 있고 서쪽은 요수에 이른다”고도 한다. 이 요해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일단 현재의 발해(渤海)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세워진 나라(고려)는 바로 등주(登州), 래주(萊州), 빈주(濱州), 체주(棣州)와 서로 마주보는 위치에 있다”고도 한다. 이 네 지역은 중국 황하 입구와 발해쪽 산동반도 지경이다. 이들 지역이 마주보는 지역은 정확히 요동반도 일대이다. 그래서 <선화봉사고려도경>에서 고려의 강토가 '동서 2천여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반도를 넘어선 것을 확실하게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의 동북면 지역에 대한 기미주(羈縻州)의 확장은 국초부터 점진적이고도 온건하게 추진되었다. 발해 멸망 후에 발해유민들이 발해군현과 함께 지방의 여진세력들이 거란의 지배를 피해 자신의 거주지를 그대로 가지고 고려로 귀부하면서 귀순주 설치가 활기를 뛰게 된다. 고려 태조의 발해유민 수용이 단순히 고구려계 유민의 수용 차원을 넘어 발해유민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적극적인 포용책이였다. 그 결과 고려를 고구려의 부흥으로 인정하게 되었을뿐 아니라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인식하였고, 고려가 거란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그 위세를 보이자 고려로 귀부하는 사례가 현종~문종 연간에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강토가 크게 확장된다.
국초부터 동북여진의 귀부와 내투 기사가 계속 이어지는 중에 특히 현종 12년(1021)에 흑룡강성 가목사시로 비정되는 철리국(鐵利國)의 귀부(歸附: 영토를 가지고 와서 항복)가 주목된다. 문종 27년(1073)에는 동북 변방 15주(十五州) 밖의 원근각지 번인(蕃人)들이 잇달아 귀부와 군현(郡縣)되기를 간청하였다고 하니 고려의 북쪽 국경이 '양지무제(壤地無際)' 즉 영토의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넓게 확장되었던 것이다. 뿐만아니라 심지어 거란에 복속되어 있던 숙여진(熟女眞)까지도 일부가 거란의 관작을 버리고 고려로 내투하여 그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된다.
이렇게 누대에 걸쳐 강온전략으로 꾸준히 추진된 북진정책의 결과 강토(疆土)가 크게 확장되었으니, 선종5년(1088) 거란에 보낸 국서를 보면 "천황학주(天皇鶴柱)의 성(城)으로부터 서쪽의 언덕까지 거두고 일자별교(日子鼈橋)의 물(水)로 한정하여 동쪽을 우리의 강토로 할애하였습니다.<고려사>"라고 한다. 여기서 "학주(鶴柱)"는 거란의 동경요양부에 속하는 학야현에 내려오던 화표주(華表柱) 설화와 관련이 있는 이름이다. 정령위라는 자가 천년동안 집을 떠났다 학이 되어 돌아와 화표주(華表柱)에 내려 앉아 글귀를 새겼다는 것이다. "일자별교(日子鼈橋)"의 강은 주몽이 자라의 등을 밝고 건넜다는 하천 엄사수(=엄리대수)를 가르키니 고려의 경계가 서쪽은 학주의 성이 있는 요하 혹은 혼하에서 부터 엄사수인 송화강까지 이른 것을 확인시켜 준다. 또한 숙종 2년(1097)에 거란이 보내온 국서에서 “고려는 바다 모퉁이에 사직을 세워 그 영토가 북쪽으로는 용천(龍泉: 발해의 상경 용천부)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압록에 닿았다”고 전한다.
완안부가 흥기한 하얼빈 지역도 고려의 강토라는 인식이 보이는데 고려 예종 14년(1119)에 금주 아골타에게 보낸 국서에서 “심지어 네 근원은 내 땅에서 나왔다(况彼源發乎吾土).”란 구절이 있다. 금의 시조가 신라인이고 그 흥기한 땅이 고려의 경내임을 천명한 것이다. 또한 북송의 허항종이 1123년(인종 원년) 금에 사신으로 가면서 남긴 기행문 <선화을사봉사금국행정록>에서는 “함주(개원)에서 북쪽으로 가면 평야가 펼쳐지는데 동쪽으로 신라산(新羅山 길림합달령)이 있고, 고려와 경계를 이룬다”고 하였다. <금사>에는 고려 경계에서 해동청(海東靑)을 잡았는데 고려군이 금국 사람들을 공격하여 죽였다는 보고 내용이 있다(1124년).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해동청의 주산지인 오국부인데 이곳은 오늘날 목단강과 송화강이 합류하는 “의란(依蘭)”지역이다. 고려의 강토가 요시기 용천일대보다도 금시기에 더 북쪽으로 나간 것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고려의 세력권이 크게 확장되었기에 남북 만여리를 헤아리고, 동북의 끝은 고구려때보다 더 넘어섰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고려는 이때 명실상부하게 해동천자(海東天子)가 다스리는 해동천하를 구축한 것이다.
▲ 좌, KBS한국사탐, 중, 인하대고조선연구소, 위, 강효백,일본은 고려의 속국이였다, 고증한 고려 강역도
고려에 복속하여 귀화한 여진의 지역을 ‘화내(化內)’라고 한다. 당시 고려가 화내-기미주(覊縻州)를 지배한 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화내의 여러 지역에 주명(州名)을 설정해 행정구역으로 편입하여 주기(朱記 고신장)를 하사하였고, 호적(戶籍)에도 등록하고 주민 자치를 허용하여 생존권을 보장하였다.
②귀부한 수장들에게는 고려의 지방관들과 동일하게 무산계(武散階)와 향직(鄕職)을 내려 관료로 편입하였다. 태조와 현종시기 전쟁에 여진군이 동원되거나 변경 방비에 군사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걸 보면 이는 단순한 허직(虛職)이 아니었다.
③화내의 주민들 간에 약탈 행위가 금지됐으며 부족 간 전쟁은 고려 조정의 허락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④고려 조정의 허가 없이 거란 등 외국과 통교 및 외교관계 수립도 금지되었다.
⑤고려에서는 봉강(封疆)을 정하면 반드시 관방(關防)을 제지역에 설치하였고 또 군사상 필요한 곳에는 산성이나 장성을 쌓았다.
⑥고려의 화내지역에 대한 지배력은 비교적 강력하여 위법이 있을 경우 고려 형법으로 강제력이 집행되었다. 문종 10년(1056)에 마음대로 약탈을 자행한 동여진의 수장 유원장군 사복하(沙攴何) 등을 재판한 후 참형에 처하였고, 동번(東蕃)의 반란괴수 장향(張向) 등 14인을 산남도(山南道)의 먼 지역으로 유배를 보내기도 했다. 이러한 통치양상은 결코 명목상의 간접지배나 형식적인 번속관계가 아니었다.
제16대 예종 2년(1107) 윤관의 북정(北征)이 있게 된 것은 동북면의 기미주가 금의 흥기로 자주 침략을 당하고 번인(蕃人)들이 이탈할 기미를 보이자 그 지역을 평정하여 사민(徙民)을 통해 직접지배에 나서려는 차원에서 추진된 원정이였다. 두만강 이북 동북9성을 후에 평화교섭으로 인해 환부(還付)를 결정하게 되는데 이때 9성을 여진에게 되돌려 주었다고 해서 그 영유권까지 넘긴 것은 아니었다. 임의(林懿)의 묘지명에 의하면 예종 4년(1109) 7월 임의가 여진에게 9성을 돌려주면서 영유권이 어디까지나 고려에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켰고, 이에 여진인들은 끝까지 고려에 충성하며 다시는 침략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였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여진에 9성 환부는 주거권과 생존권을 부여한 것일뿐 고려의 영유권마저 포기한 것이 아니였다. 예종 14년(1119)에 *갈라전(曷懶甸)일대에 있던 장성을 증축하여 점유를 이어갔으며 원간섭기에 잠시 영토가 축소되긴 했으나 공민왕의 고토수복전쟁을 통해 고려의 만주경영은 국초부터 말엽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갈라전”은 만주 동부지역으로 송화강유역과 목단강(상류 수빈하) 학강시를 포괄한 연해주일대까지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가리킨다.
+인하대 고조선연구소(복기대 윤한택 남의현외 다수)와 신민식 강효백 김구진 방동인 허인욱 최규성 김창현과 유튜브‘진짜 역사’의 연구성과를 참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