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조선 30세 내휴 단군 때 흉노가 방물 바쳐
흉노의 군주 명칭인 단우와 단군은 같은 음가
용성대제, 대림대제 하늘 굿, 고려 팔관회 닮아
신단수 주위 도는 풍습, 무당 굿도 돌이 춤사위
▲ 내몽골 오르도스에 나온 흉노금관. 위는 새가 아래는 네발달린 동물로 만들었다.
“청구의 다스림을 둘러보시고 치우천왕의 공덕을 새겼다. 서쪽으로 엄독홀에 이르러 제후국의 여러 汗한들과 만난 뒤 병사들을 사열하고는 하늘에 제사 지내고 주나라 사람과도 수교하였다. 병진 5년, 서기전 905년 흉노가 공물을 바쳤다.”
이 기사는 단군세기 30세 단군 내휴 재위 54년에 나온다. 공물 바쳤다는 짤막한 기사지만 흉노는 우리 민족과 친연성이 아주 높다. 우리와 직접 관련된 역사는 단군세기 기록 외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다만 문화 측면에서 많이 닮았다.
먼저 흉노제국의 군주 칭호를 보면 單于단우다. 單于을 선우라고도 읽지만 기본소리 값이 단우다. 단우는 북방식 음가로 “타귀” 인데 흉노제국에서 보듯이 주로 왕의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뜻은 최고신의 대리자, 최고의 사제임을 나타낸다.
흉노를 포함하여 북방유목민족은 전통적으로 하늘을 “텡게리”라고 하였다. 이는 제정일치 시대의 샤먼 곧 무당의 최고신을 뜻한다. 음가가 단우와 함께 단군조선 군주의 명칭인 단군과 닮아있다.
흉노 군주의 좌우에는 각각 좌현왕, 우현왕이 있었다. 단군세기에는 단군이 우현왕을 임명하는 것으로 나온다. 흉노의 왕제도는 단군조선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 초기 왕을 차차웅이라고 했는데 이는 무당을 뜻한다고 하였다. 무당 중에서 국무는 고려 때까지만 하더라도 국궁 잔치인 팔관회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데 참가하였다. 이 유습이 강릉단오제에서 무당이 제사를 주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일종의 고을 굿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고을을 대표하여 하늘에 제사 곧 굿을 한다. 대관령에서 신단수를 모시고 와 제단을 차리고 굿을 한다. 단군조선도 단군은 무당의 한 기능으로써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흉노도 용성대제라고 하여 군주인 단우가 제천행사를 하는 장을 만들고 우리의 제천행사처럼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용성대제에서는 신단수 주위를 도는 행사도 있었다.
이 신단수는 하늘에서 나무위로 신이 내리는 장소로 보인다. 실제로 북방유목민족 사회에서 하늘의 최고신이 출현할 때는 산봉우리나 숲, 나무 꼭대기에 강림한다. 한웅천왕이 한인천제의 명을 받아 태백산 위 신단수로 내려온 것과 닮았다.
더 나아가 흉노는 대림대제를 하였다. 이는 푸른 숲을 중심에 두고 큰잔치를 벌이는 것인데 고구려의 동맹과 부여의 영고와 같은 국가의 큰 잔치였다. 더 구체적으로는 풍성한 수확을 가져다준 하늘과 대지, 우주 삼라만상에 감사를 드리고 수많은 놀이를 벌였다.
단재 신채호가 우리 국중대회에서 백희를 벌인다고 하였듯이 대림대제에서도 수많은 놀이가 있었다. 흉노가 씨름하는 그림이 발견되었는데 고구려 각처총의 씨름도와 똑 같다. 씨름도 대림대제에서 하는 놀이 중의 하나로 보인다. 대림대제에서 본질적인 행사는 신단수를 도는 것이 신성한 행위로 여겨졌다.
오늘 무당이 신당에서 춤을 추며 오른쪽이 아닌 왼쪽으로 돈다. 왼쪽으로 도는 것은 왼쪽은 신성한 곳을 뜻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오른쪽 세속에 속한다.
흉노도 대림대제에서 신단수를 돌았다고 하는데 아마도 왼쪽을 돌았을 것이다. 대림대제에서 신단수를 도는데 무작정 돌지 않고 3번을 돈다고 한다. 우리 역사의 시원을 알려주는 삼국유사 고조선기에는 3이라는 숫자가 여러 번 나온다. 천부인 3개, 3천의 무리가 그것이다. 신단수를 세 번 도는 것이 이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우리나라 절간에서 대웅전 마당 중앙에 있는 탑을 도는 것을 탑돌이라고 한다. 이것도 우리 고유의 전통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흉노의 휴도왕이 죽은 뒤에는 무속 신으로 승격된다고 한다. 단군도 나라를 다스린 후 성스러운 도읍인 아사달로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 오늘날 무당들은 산신을 중요한 신으로 모시고 있다. 굿 신당에는 소나무 아래 앉아 있는 산신 그림이 신당을 거의 차지할 정도로 크게 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