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종성 지방분권포럼 대표
▲ 유종성 지방분권포럼 대표

 

홍산문화 시절에 치우는 구이를 통합 제국을 설립

진국은 단군조선의 후신 또는 단군조선의 이명(異名)

진국의 통치범위는 만주와 한반도에 이르러

평양 최씨낙랑국과 경상도 진한6촌은 진국의 후신

▲ 조선과 진국의 위치. 서의식(前 서울대 역사교육학과 교수) 著 , 진국으로 표기된 곳은 전기진국을 주도하던 [북]진한의 세력권으로 이해할 수 있다.
▲ 조선과 진국의 위치. 서의식(前 서울대 역사교육학과 교수) 著 , 진국으로 표기된 곳은 전기진국을 주도하던 [북]진한의 세력권으로 이해할 수 있다.

동이와 구이, 예(濊)[새]. 맥(貊)[밝]. 한(韓)[환]으로 기록된 우리의 원 겨레는 BC8000년경 홍산문명을 꽃피우며 동아시아의 시원문화를 창조해 내었다. ​범엽은 <후한서> 동이열전 서문에서 이(夷)는 뿌리로써 만물의 근본이요. 생명의 기반이라고 말하면서 동아시아 시원문화를 군자(君子)-불사지국(不死之國) "구이(九夷)"가 창조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서기전 4000년경 홍산문화가 만개하던 시점에 동이족의 먼 조상으로 알려진 태호복희씨와 소호금천씨를 이은 현도씨 치우가 나타나 구이를 통합하고 황제(黃帝)무리와 대결하며 천하에 군림하였다.

치우현왕(蚩尤玄王)은 중국 역대 왕조에서 "군신(軍神)"으로 "승리의 화신"으로 숭배되었는데 후대 유가의 존화양이(尊華攘夷)론에 의해 치우는 폄하되어 악인으로 패자로 왜곡되었던 것이다.

치우가 다스린 나라이름(혹은 족명)이 중국 고대문헌 속에서는 구려국(九黎國), 여국, 현도국(玄都國) 등으로 나타난다. 심백강의 연구에 의하면 모두 "밝다" "환하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각나라별 치우상
▲각나라별 치우상

무신(武神)의 뜻을 지닌 치우는 「설문해자주」에서 '주루'라고도 하는데 고구려 추모왕과 대무신왕의 이칭인 대해주류왕과도 연결된다. 맥족의 영웅이였던 치우가 고구려에서도 기억되고 있었고, 그를 계승하려는 의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에서 제사의 대상이였던 '가한'이 사실은 단군이기보다는 치우였을 가능성도 있다.

기원전 24세기경에 이르러 구이에 새로운 구심점이 대두되었는데 예족의 일파인 신시의 환웅과 웅녀의 아들 단군왕검은 요서의 "하가점하층문화"에 기반하여 평양(현. 요령성 대전자)에 도읍하고 조선을 창건한다. BC14세기경 환경적 정치적 이유로 중심지를 현 요동과 서북한일대로 옮기며 세력권을 더욱 확대하게 된다.

▲ 대전자 마을. 윤내현 전)단국대교수는 에서 중국 요령성 적봉시 대전자일대를 단군의 도읍지로 비정한 바 있다.
▲ 대전자 마을. 윤내현 전)단국대교수는 에서 중국 요령성 적봉시 대전자일대를 단군의 도읍지로 비정한 바 있다.

서기전 5세기경에 이르러 신정정치의 한계가 노정되자 제정분리세력에 의해 정권이 교체되어 진국으로 발전한 것 같다.

이러한 사실은 사제의 기능만을 전담하는 소도(蘇塗)의 천군(天君)과는 다른 각 국읍의 정치적 수장인 신지와 그들 위에 총왕의 역할을 하는 진왕(辰王)의 존재를 통해서 확인된다. 또한 ‘고기’라는 책을 인용한 <삼국유사>는 단군의 수명을 언급하면서 BC426년에 단군조선의 해체 시기를 암시하고 있다.

▲ 대전자 성터. 윤내현 전)단국대교수는 에서 중국 요령성 적봉시 대전자일대를 단군의 도읍지로 비정한 바 있다.
▲ 대전자 성터. 윤내현 전)단국대교수는 에서 중국 요령성 적봉시 대전자일대를 단군의 도읍지로 비정한 바 있다.

진국(辰國)은 세 개의 칸국 즉 삼한으로 나뉘어 통치되었다. <후한서>에서 “삼한은 옛 진국이라” 했고, <삼국지>에서는 “진한을 옛 진국이라” 한다. 진국, 진왕, 진한은 모두 '진(辰)'자가 공통으로 들어가는걸 보면 진한이 진국을 주도하던 시절이 있었던 것을 능히 유추할 수 있다.

마한이 진왕을 배출하여 진국을 주도하기 이전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국내외 사서에 진한은 북방에서 이주한 세력이라 했으니 진한이 진국을 주도한 시점은 경상도로 남하 하기 이전이였던 것이다.

또한 진한유민을 조선유민이라고도 하는 것을 보면 진국은 조선의 후신이거나 조선의 또 다른 국호였던 것이다. 윤내현은 진국을 조선연방의 주도국으로 이해하고, 정인보는 조선을 국호가 아닌 "통치하는 관경(管境)"으로 해석했다.

위만조선 우거왕과 갈등을 빚던 조선상 역계경이 동쪽 진국으로 갔다는 기록이 있고, 중국 한나라와 교류하려는 진국을 위만조선이 가로막았다 했으니 진국은 분명 위만조선의 동쪽에 위치했던 것이다.

진국의 세력권은 매우 넓어 만주와 한반도였다. <삼국지>와 <후한서>에선 면적이 "방4천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인돌과 비파형동검을 비롯하여 공통의 복식장신구와 생활도구와 같은 고고학적 물적기반은 이 사실을 입증한다.

▲ 동일 복식문화에 근거한 고조선 강역. 박선희 교수의 동일 복식문화 지역으로 본 고조선 강역은 윤내현 교수가 비정한 강역과 거의 일치한다.
▲ 동일 복식문화에 근거한 고조선 강역. 박선희 교수의 동일 복식문화 지역으로 본 고조선 강역은 윤내현 교수가 비정한 강역과 거의 일치한다.

고조선의 서쪽 변경인 현 요서 일대는 서기전 12세기 경 상유민의 이동과 함께 기자조선이 세워지고 서기전 2세기 위만에 의해서 정권이 교체되었다가 BC108년 한군현(낙랑군)이 세워졌다.

위만조선의 팽창으로 인하여 근거지를 상실한 요동과 서북한의 진한세력은 경상도로 남하하고, 일부는 여전히 평양에 잔류하여 최씨낙랑국으로 대체되면서 서로 독자적인 길을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진한6국이 연합하여 세워진 신라가 평양의 낙랑인들을 "아잔(阿殘)“ 즉 ‘남아있는 우리’라고 표현하고 신라를 또한 낙랑이라 기록하고 있는 것은 두 세력이 원래 진국을 주도하던 같은 진한 세력이였던 것을 확인시켜 준다.

<삼국사기>에는 초기 신라를 낙랑국이 침략하는 사례가 많은데 상호 독자적인 길을 걸으면서도 재통합하려는 의지의 표출로 이해된다.

그런데 <삼국사기> 외에 중국사서에 낙랑국의 국명이 보이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대외적으로는 오래도록 진국으로 불리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양의 고분과 유물들은 낙랑조선으로 불렸던 진국이 남겨 놓은 것으로 볼 수 있다.

▲ 북한의 낙랑국 발견 유물.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는 지난 2003년 6월 1980년대 초부터 당시까지 평양시 낙랑구역 낙랑고분군에서 총 2,600여기의 고분을 발굴하고 금은 가락지 등 장신구와 생활용품, 쇠창, 무기류를 비롯한 마구류와 수레 부속 등 1만6,000여점의 유물을 출토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북한 역사학계는 낙랑국에 대해 한무제가 고조선을 멸하고 세운 낙랑군과는 별개로 고조선과 고구려 시기 한민족이 세운 독립국으로 평가하고 있다. 남한의 민족사학계도 북한 학계와 마찬가지로 평양의 유물유적은 한나라 낙랑군과는 무관한 것으로 발표했다.
▲ 북한의 낙랑국 발견 유물.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는 지난 2003년 6월 1980년대 초부터 당시까지 평양시 낙랑구역 낙랑고분군에서 총 2,600여기의 고분을 발굴하고 금은 가락지 등 장신구와 생활용품, 쇠창, 무기류를 비롯한 마구류와 수레 부속 등 1만6,000여점의 유물을 출토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북한 역사학계는 낙랑국에 대해 한무제가 고조선을 멸하고 세운 낙랑군과는 별개로 고조선과 고구려 시기 한민족이 세운 독립국으로 평가하고 있다. 남한의 민족사학계도 북한 학계와 마찬가지로 평양의 유물유적은 한나라 낙랑군과는 무관한 것으로 발표했다.

전기진국을 주도하던 진한이 쇠퇴하자 마한의 월지국이 진왕을 배출하여 후기진국(=한국)을 주도하게 되고, 경상도의 진한6국은 혁거세를 거서간(=진왕)으로 옹립하여 신라를 건국하게 된다.

신라의 기원이 되는 진한 6촌 선주민들을 <삼국사기>는 "조선유민(朝鮮遺民)" 혹은 “진한유민(辰韓遺民)”이라고 밝히고 있다.

신라의 초기왕호인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과 불구내 거칠부 이사부와 같은 인명들에서 토착어의 흔적이 많은 점, 홍산문화에서 발견되는 편두 풍습이나, 선인왕검의 선교(仙敎)와 연결되는 풍류도(風流道)와 산천에서 심신을 수련하는 화랑도와 같은 여러 문화요소들은 단군의 고조선과도 직결된다.

따라서 전기 진국을 주도하던 진한세력은 단군의 고조선의 후예가 분명하다. 후에 위만 조선유민 그리고 혼란을 피해 넘어온 중국 유이민들도 일부 잡거하고 있다고 <삼국사기>는 밝혀주고 있다.

<삼국사기>에 "진한6촌"은 원래 진한 6국이였는데 훗날 "국(國)"이 "촌(村)"으로 편제되면서 소급되어 촌으로 기록된 것이다. 이병도의 견해인 사로6촌은 사서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신조어이다.

경상도 일대에 산재한 진한 6국으로 보는 것이 역사적 사실에 근접한다. 혁거세가 거서간으로 즉위한 이후부터 사서에 등장하는 진한은 곧 신라이다. 신라의 삼한일통의식은 바로 옛진국의 영광을 회복하려는 진한세력의 의지의 표현이였던 것이다.

*신채호, 정인보, 리지린, 윤내현, 박선희, 심백강, 문성재, 서의식 학설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