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1927.01.18. 매일신보,
황해도 구월 산중서 4천 년 된 단군상 발견 보도
4천 년 된 단군상에 주목, 단군조선 실제 역사 증명
송호수 박사 개천 대학에 단군 석상 모셔져 있어
일제에 의해 2차례 수난을 겪으면서 얼굴 쪽 훼손돼
▲ 황해도 구월산 석굴에서 4천년된 단군상이 발견되었다고 보도한 매일신보. https://www.facebook.com/photo?fbid=7408669982529954&set=a.146288542101504
삼국유사 고조선기에 단군이 조선을 개국하였다고 중국 사서 위서와 우리의 고기를 인용하여 일연선사가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그는 자기 생각을 주석으로 달고 위서와 고기를 그대로 끌어와 소개하였다.
단군이 있기 전 환인과 환웅 시대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비록 신화 형태로 서술하였으나 신화 형태로 쓴 역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우리는 환인, 환웅은커녕 단군도 주류강단 식민사학 세력이 역사학을 장악하여 신화, 비역사,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주입받고 있다.
그런데 조선 시대도 아니고 대한민국도 아닌 대일전쟁기인 왜구 치하에서도 단군은 역사이고 실존 인물이었음을 알리는 단체가 있었다.
더구나 서기 1927.01.18. 매일신보는 북한 구월산 석굴에서 4천 년 된 단군상이 발견되었다며 발견된 단군상 사진과 함께 보도하였다.
신문은 조선 시대 조선왕조실록과 유학자들의 각종 문집 등에서 전해오는 것을 이어받아 단군의 역사를 짧게 소개하면서 단군교의 정훈모와 관련하여 단군상 발견 내막을 전하였다.
이 단군상은 안국동의 단군봉찬회 개천 대학에 모셔져 있는데 서기 2008.09.27. 송호수 박사가 소개를 한 바 있다.
당시 다음카페, ‘삼태극’에서 대표가 가서 취재하였는데 이 단군 석상은 2세 단군 부루로 보았다. 당시 취재 내용을 직접 옮긴다.
“-제2세단군 부루석상-
부루단군께서 '개묘 삼년(서기전 2238년) 조서를 내려 백성들로 하여금 머리카락을 땋아서 머리를 덮도록 하였다.' 는 기록이 단군세기에 보이는데 편발개수제도를 처음 만들어 온 생민에게 한겨레의 머리 모양으로 삼은 것으로 본다.
규원사화에는 '編髮蓋首之制'라고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 단군영정들은 모두 머리를 땋아서 두른 형상을 하고 있다.
위 단군 석상은 흐릿하게나마 이마 부분에 딴 머리를 두른 흔적이 보이고, 위 단군 석상이 제2세 단군 부루때 창건하였다는 북한 구월산 삼신궁에 모셔져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부루단군의 실물을 보고 조각한 것으로 추정한다.
부루단군으로 추정되는 이 단군석상은 언제인지는 모르나 북한 구월산의 삼신궁에 모셔져 왔던 것이다.
그러나 홍암 나철(나인영)대종사가 서기 1916년 구월산 삼신궁에서 기도를 통하여 절식 순교하자, 일제의 경찰들이 들이닥쳐 독립운동을 하는 본거지라고 하여 삼신궁을 폐문해 버리면서 함께 땅에 묻히는 수난을 겪는다.
이 단군석상은 홍암나철대종사와 초창기 함께 하였던 정단제가 서기 1925년 북한 구월산 삼신궁터에서 발굴하여 일제의 눈을 피해 남쪽으로 모셔왔다.
그리고 뜻있는 몇몇 분과 서울 종로교당에 단군 석상을 모셔놓고 부러진 국조 단군을 되살리는 운동에 들어갔다.
종로에 위 단군 석상을 모셔놓고 단군복원 운동을 하던 중, 서기 1926년 경기 시흥에 독지가의 지원으로 삼신궁을 짓고 거기로 모셔 갔다.
그러던 중 서기 1936년 일제는 다시 단군전은 조선족들의 구국운동의 본산이라고 하여 국조 전을 강압 폐문시키니 국조상을 다시 모시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고 일제 경찰 2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다시 땅속에 묻었다(2차 수난).
광복회 시흥의 삼신궁 국조전을 보수하고 다시 단군상을 모시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2차에 걸치는 수난을 겪는 동안 위 단군 석상은 얼굴 부분이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이다. 정부에서는 하루속히 국보 1호로 올리기를 강력히 촉구하는 바이다.”
단군 석상과 관련하여 대종교 민인홍 전리는 다음과 같이 매일신보 보도를 인용하여 단군상 관련 내용을 전하였다.
▲ 위 매일신보 보도의 단군석상이 안국동 개천대학에 서기 2008.09.27. 현재 모셔져 있다. 출처: 다음카페. '삼태극'. https://cafe.daum.net/mookto
-다음-
1927년에는 정훈모가 을축년(1925) 현몽했던 단군상과 그 소재가 나타난 뒤 황해도 구월산 속에서 단군 석상을 발견해 서울에 가져와 다옥정(현재의 다동) 3-3번지 교당에 봉안했고, 나아가 대성전을 세우고자 계획했다.
매일신보, 1927.1.18자에 따르면 「四千年된 檀君像 九月山中서 發見」.;일제강점기, 단군교에 모셔져 있던 단군 소상(아래 기사 내 사진 참조) 진본은 1943년 정훈모 선생 묘소 안장 시 함께 땅에 묻혀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묘소가 고향으로 이장하게 되는 과정에서 단군상도 다시 빛을 보았고, 이후 (사)단군봉찬회 측에 기증된 뒤 봉찬회 이사장이자 재야사가인 송호수 박사 안국동 자택으로 이전하였고 송호수 박사 가문에서 소장 중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