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정락(미학자)
▲ 수덕사 입구에 있는 수덕여관.
<수덕여관>
충남 예산군 덕숭산 자락에는 수덕사가 있다. 백제 위덕왕 때 창건한 절이고, 국보 49호에 등재된 오래된 목조건축인 대웅전이 유명하다.
미술 좀 아는 사람들은 수덕사보다는 일주문 지나 왼편에 자리 잡은 수덕여관을 찾는다. 절간 옆에 여관은 시주를 위한 먼 길을 온 사람들이 잠시 묵는 곳이었다.
산자락의 완만한 땅위에 초가로 지어진 여관은 ㄷ자 형태로 닫히고 열린 공간들을 교묘히 이어주며 산 속 쉼터의 은근한 편안함과 절묘한 공간감을 제공해 준다.
흥미로운 것은 이 여관의 주인이 한때 화가 이응로였다는 것이고, 애절한 사연들이 묵어간 곳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 사연은 나혜석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근대여성의 표상이자 오늘날 페미니즘 미술사에서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화가는 34년 수덕사를 찾아왔다.
프랑스에서 만난 최린과의 불륜으로 이혼을 당하고 사회의 손가락질에 지친 화가는, 2년 전에 먼저 비구니가 된 일엽을 만나 귀의를 부탁하였다.
일엽 또한 2년 전에 다사다난했던 문인으로서의 삶과 애정에 실패한 여성의 운명을 뒤로 하고 이 절에 들어와 머리를 깎았다.
만공선사가 계를 주었다. 하지만 일엽은 나혜석을 만류했고, 수덕사의 주지도 외면하였다. 이후 5년간 나혜석은 절 아래 여관에 머물며 그림을 그리고 가르치며 시간을 보냈다. 그녀에게 배운 제자 중에는 고암 이응로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엽의 아들(김태산)이 찾아왔다. 14살 소년은 오다 세이죠 사이에 낳은 사생아였다. 어린 소년은 모정이 그리워 현해탄을 건너 경성으로 왔고, 거기서부터 걸어서 수덕사를 찾았다.
그러나 모친은 냉랭했다. 이 아들을 안아준 사람은 나혜석이었다. 이미 세 아이들의 엄마였지만, 이혼 후 볼 수 없었던 그리움이 슬픈 소년에게 향했다.
한동안 나혜석은 일엽의 아들과 동거하면서, 일엽을 대신해 팔베개를 해주고 가슴을 내주었다. 김태산은 커서 모친을 따라 스님이 되었고, 또한 나혜석을 닮아 화가가 되었다. 사회와 남자로부터 상처를 입었던 두 여인은 냉정하거나 다정하였다.
나혜석에게 배운 이응로는 44년에 이 여관을 사들였다. 그리고 한국전쟁 때에 피난처로 삼았고, 50년대 말 프랑스로 출국하기 전까지 여기서 살았다.
그의 결행에는 나혜석의 영향이 컸다. 그리고 그는 프랑스에서 ‘문자추상’이란 스타일을 개척하여 국제적인 예술가로 입지를 다졌다.
그러던 그가 다시 한 번 수덕여관을 찾은 때는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동백림 사건’(1967)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른 후였다. 부서진 몸을 추스르는 동안, 자기 대신에 여관을 지켰고 옥바라지를 치렀던 부인(박귀희)에게 2개의 암각화와 현판을 새겨 남겼다. 그러나 화가는 곧 프랑스에서 기다리던 여인(박인경)에게 돌아갔다.
수덕여관은 여인들의 비극이 처연히 터를 잡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