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종근(역사연구가, 의사)

 

백제, 가야인들이 세운 일본,

부모의 나라를 정복했다고 거꾸로 왜곡하여 가르침

3백년간 백제, 가야 역사를 일본 역사로 둔갑

고구려, 백제, 신라가 일본 신공황후에 복속됐다고 날조

임진왜란과 일제의 정한론에 따른 조선 침략은

허구의 <일본서기>를 사실로 믿고 실행했기 때문

 

▲ 이른바 신공황후의 삼한정벌 그림. 일본은 학생 교과서에서 야마토 왜의 신공황후가 우리나라 남쪽 해안으로 쳐들어오자 우리나라 삼국이 항복했다고 날조하여 쓴 일본서기를 사실로 가르치고 있다.
▲ 이른바 신공황후의 삼한정벌 그림. 일본은 학생 교과서에서 야마토 왜의 신공황후가 우리나라 남쪽 해안으로 쳐들어오자 우리나라 삼국이 항복했다고 날조하여 쓴 일본서기를 사실로 가르치고 있다.

 

신생국 일본의 탄생과 <일본서기>라는 새로운 역사의 편찬

새로운 역사의 편찬

697년 새로운 일본(日本)이라는 국가 수립에 따라 역사편찬도 이루어졌다. 720년경 <일본서기(日本書紀)>가 만들어졌는데, 300년간 일본열도에서 있었던 백제와 가야의 역사를 1350년간으로 늘여 일본의 역사로 꾸미고, 40인의 가상인물을 천황으로 만들어 적당히 집어넣었다.

다시 말하자면 41대 문무(文武) 천황이 실제의 인물로 일본의 건국시조인 셈으로 그 이전의 일본 역사는 백제와 가야의 역사인 것이다. 이를 요약한다면 300년간 열도에서 있었던 백제ㆍ가야의 역사가 완전히 일본의 역사로 둔갑한 것이다.

일본의 역사기록이 한반도와의 관계를 단절하는데 그쳤다면 그 후 한일간의 역사가 피로 점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역사를 만들면서 단절은 고사하고, <일본서기(日本書紀)>라는 책 제목과는 달리 일본말고도 고구려ㆍ백제ㆍ신라 삼국의 이야기를 반 이상 집어 넣은데다가, 끊임없이 한반도를 저주하고 증오심을 부추기는 내용으로 채워넣었다.

특히 '신공황후(神功皇后)의 전설'이 그것이다. <일본서기>와 <고사기>에는 신공황후에 대해 신라를 정벌하라는 신의 계시를 받고는 임신한 몸을 돌로 눌러 출산을 막고 배를 타고 신라로 건너갔다.

바닷물이 신라를 삼키자 신라왕이 나와서 항복하였고 이어 고구려, 백제의 왕도 그 소식에 기절하여 삼한(三韓)이 항복하여 그 땅에 '임나일본부(任那日本部)'를 세우고 300년간 삼한(三韓)을 종으로 삼아 통치했다는 황당한 기록을 넣었다.

▲ 백제, 가야역사를 일본사로 바꿔버린 일본서기.
▲ 백제, 가야역사를 일본사로 바꿔버린 일본서기.

 

신공(神功) 전설의 끈질긴 생명력

이렇게 하여 <일본서기>는 천 년이상 일본인들의 정신적인 지주로 전해졌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키면서 "조선은 신공황후(神功皇后)의 삼한(三韓) 정벌 이래 일본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고토(故土)를 회복한다"라는 전쟁의 명분을 내걸었다.

에도시대 중기에 들어서는 신공(神功)의 삼한정벌과 이를 대의명분으로 삼은 임진왜란에 대해 긍정하는 국학(國學)의 기운이 널리 퍼졌다. 국학계의 거두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맹목적으로 숭상하고 이에 근거한 국수주의 운동을 발전시켰다.

이 경향은 계속되어 정한론(征韓論)으로 발전했으며, 한일합방으로 조선이 멸망했을 때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이 생겨나 외지에 대한 동화정책(황민화교육 등)이 진행할 때도 사상적 바탕을 이루었다.

일제강점기에는 황국사관(皇國史觀)에 의한 제약으로 <일본서기>의 기록을 의심하는 것조차 터부시되어 신공황후(神功皇后)의 존재는 역사적 사실로 강요되었다.

지금도 신공황후 전설은 진행형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일본의 역사서 첫머리에 신공황후의 전설이 엄연히 차지하고 있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한번도 폐기된 적이 없었던 데 있다. 또 신공(神功)의 전설은 이미 오랫동안 전세계에 소개되어 왔고 지금도 책으로 또 인터넷으로, 마치 역사적 사실인양 보급되어 있는 중이다

일본 에도시대 때 국수주의 운동이 퍼져나갈 때 고증학자 토데이칸(藤貞幹)은 그의 저서 '충구발(衝口發, 1781)'에서 <일본서기>에 대한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의 맹목적인 신앙을 모두 부정하였다.

토테이칸은 "일본의 역사와 언어는 한반도에서 기원하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이에 대해 모토오리는 "미친 자의 목에 칼을 씌우자(鉗狂人)"라고 격렬히 비난하였다.

출처: <오사카의 여인>, 곽 경,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