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종성 지방분권포럼 대표

▲유종성 지방분권포럼 대표


대진의 또다른 국호는 ‘고려’

왕건의 선대 출자는 ‘대진국(大振國)’

대신라(大新羅) 지방민의 염원이 고려의 북진으로 달성

▲1993년 고려태조의 현릉에서 출토된 왕건상(像), 황제가 쓰는 通天冠(통천관)을 착용하고 있다.


<고려사>에 인용된 「편년통록」에는 왕건의 선대(先代)를 소개하는데, ‘이름이 호경(虎景)이라는 사람이 있어 스스로 성골장군(聖骨將軍)이라고 불렀다. 백두산(白頭山)에서부터 두루 돌아다니다가 부소산(扶蘇山) 좌곡에 이르러 장가를 들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위에 내용 중 '백두산(白頭山)'이라는 지명이 우리의 시선을 끈다. 여기 백두산은 요서지역 의무려산(醫巫閭山)이거나 혹은 현 백두산일터이다. <고려사> 성종10년(991년) 기사에 ‘압록강 바깥에 거주하는 여진족을 백두산(白頭山) 너머로 쫓아내어 그 곳에서 살게 하였다’는 기사와 관련지어 생각할 때, 지금의 백두산으로 보인다.

당시 호경이 살던 8세기 초반 백두산 일대는 *대진국(大振國 발해)의 영토였다. '호경'이 백두산에서부터 인근 고장들을 두루 거쳤다하니, 오늘날 간도 방면에서 나고자라 잠시 대진에서 활동하던 인물로 보이고, 어느 시점엔가, 어떤 이유로 신라로 이주했던 것이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에서 발행한 <온국민을 위한 대한민국 역사교과서>의 용례에 따라 발해(渤海)를 "대진국(大振國)" 혹은 "대진(大振)"으로 표기하고자 한다. <구당서>에 대조영이 건국하여 스스로 '진국왕(振國王)'에 올랐다고 하였으니, 발해의 정식국호는 "진국(振國)"이였던 것이다.

​또한 왕건의 조부였던 작제건을「'고려인(高麗人)'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그가 신라에 살면서도 “고구려유민”이라는 정체성을 간직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당시 대진이 고려로도 불리웠고, 호경의 출자가 대진인 것을 감안할 때 여기서 “고려인”이라는 기록은 “대진(大振) 출신”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리라 본다.

고구려는 장수왕 시기 국호를 정식으로 '고려(高麗)'로 변경했다. 그래서 한적(漢籍)과 왜적(倭籍)에는 고구려를 “고려”로 표기하고 있다. 대진도 제3대 문왕 대흠무 시기에 국호를 “고려”로 바꾼 적이 있었고, 스스로 ‘고려국왕(高麗國王)’을 표방하기도 했다. 이에 일본에서는 대진의 사신을 ‘고려사신(高麗使臣)’으로 기록하였고, 고구려인의 종족명인 "맥인(貊人)"으로도 표기한다. 대진(大振)의 또다른 국호가 발해(渤海) 뿐만 아니라 고려(高麗)로도 불리웠던 것이다. 따라서 왕건의 선대는 고구려유민으로서 대진과도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었던 것이다.

송(宋)의 서긍이 찬술한 「고려도경」에서는 왕건의 가문을 '고려대족(高麗大族)'으로 소개하면서, 고려왕조의 전신을 ‘부여->고구려->발해’로 연결 짓고 있다. 여기서 '고려대족'의 "고려(高麗)"도 대개 고구려로 이해하나 대진(大振)으로도 볼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서긍은 고려왕조의 전신을 곧바로 고구려로 연결짓지 않고, 발해(渤海)로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계승의식은 서긍의 연구에 따른 인식이라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고려도경>이 여행견문록의 성격을 띄는 책인 것을 감안할 때, 당시 고려인들의 역사인식을 반영한 서술로 여겨진다.

▲서긍(徐兢, 1091~1153)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40권은 그가 송 휘종(宋徽宗)이 파견한 고려에의 국신사(國信使) 일행에 제할인선예물관(提轄人船禮物官)으로 개경에 다녀간 경과와 견문을 그림을 곁들여서 엮어 낸 사행보고서다.


왕건의 선대(先代)가 대진과 관련되어 있었다면 고려왕조가 인식한 삼한(三韓)과 삼한통일은 단순히 후삼국통일만으로 제한하여 볼 수 없게 한다.

왕건의 선대 기사를 살펴보면 호경의 아들 강충(康忠)과 왕륭(王隆)의 이야기 속에서 '삼한을 통일할 자가 나올 것이다‘라고 예언되어 있고, 보육(寶育)과 그의 딸 진의(辰義)는 꿈에서 소변을 보니 천하와 삼한산천을 덮는 꿈이었다고 한다.

예언이나 꿈은 당대 개인의 간절한 기대나 시대적 염원이 반영된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 예언과 꿈은 훗날 송악 왕씨가에서 제왕이 출현하고, 그 제왕에 의한 후삼국통일이 이루어질 것을 내다본 것으로만 이해될 수 없다.

왜냐하면 강충과 보육이 활동한 시기는 대신라(大新羅)의 안정기였고, 진골귀족들이 자신들의 업적을 과시하려는 차원에서 "삼한통일(三韓統一)"을 운운하던 시기였다. 왕륭의 젊은 시절도 아직 후삼국이 태동하기 전이였다.

따라서 신라의 난세를 수습하고 분열된 나라를 통일할 인물을 고대할 이유가 없는 시기였다. 그러매도 불구하고 그들은 삼한통일을 꿈꾸고 있다. 따라서 이 예언과 꿈이야기는 당시 남북국의 분열 상황을 전제로 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왕륭이 궁예를 만나 ‘조선(朝鮮 요동), 숙신(肅愼 대진), 변한(卞韓 신라)의 왕 되기’를 주청한 발언을 상기할 때, 신라의 팔원(八元)과 도선(道詵)이 예언하면서 언급한 삼한은, 대진을 포괄하는 삼한이요. 일차적으로 남북국의 통일을 이룩할 제왕의 출현을 예언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 두 사람뿐만 아니라 이 당시 한주(漢州), 삭주(朔州), 명주(溟州)와 이도(二道)의 대신라 지방민들은 누대에 걸쳐서 당시의 상황을 남북국(南北國)의 분열로 이해하고 있었고, 이 상황이 그 누군가에 의해 언젠가는 극복되기를 염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순천 선암사 선각국사 도선(道詵, 827~898 3. 10) 진영. 그는 신라 말기의 승려이며 풍수설의 대가, 속성(俗姓)은 김(金)씨이다. 남북국시기 김천 지역의 청암사를 창건한 승려로 도선국사(道詵國師)로 널리 알려져 있다. 송악의 호족 왕륭에게 장차 삼한(=남북국)을 통일할 아들이 날 것을 예고해 주었다고 한다.

선대의 영향으로 태조왕건은 누구보다도 대진(大振)에 대하여 동족적 친연성을 뚜렷하게 지녔던 제왕이다.

그는 대진을 멸망시킨 거란에 대하여 극도의 적의(敵意)를 표출한 바 있는데, 후진(後晉)에서 찾아온 서역 승려 말라에게 '발해는 우리의 친척의 나라로써 후진과 동맹하여 거란에 포로된 그 왕 대인선을 구출하여 원수를 값겠다'고까지 한다.

또한 거란이 보내온 사신을 먼 섬으로 유배 보내고, 그들이 가지고 온 낙타도 만부교에 묶어 굶겨죽임으로써 반거란정책을 확고히 했다. 후세 제왕들에게 내린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거란은 짐승과 같은 무도한 나라인즉 그들의 풍속을 본받지 말고 멀리하라'고까지 당부 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과도한 반응은 그가 단순히 고구려 고토를 수복할 목적에서 취한 외교적 수사로만 볼 수 없게 한다.

자신의 선대가 대진에서 기원했다는 정체성의 발로와, 삼한의 범주에 속하는 대진(大振)을 거란이 앞서 멸한 것에 대한 분노와 안타까움에 대한 반응으로밖에는 해석되지 않는다.

고려후기 이제현은 왕건의 이러한 조치들을 이해할 수 없다며 부정적으로 보았지만, 그가 왕건의 선대 출자(出自)를 알고,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를 헤아렸다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대진국의 역사주권과 관련하여 대진인들이 남겨놓은 기록이 부재한 탓으로, 그 대진(大振)의 고지를 점유하고 있는 우리와 중국, 러시아 간에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다.

특히 중국은 대진을 오래전에 당(唐)에 예속된 지방정권으로 규정하고, 중국 모든 교과서에 그 영역을 당의 판도로 그리면서 한국사적 의의를 말살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본 것처럼 전근대 송(宋)의 서긍과 같은 중국인들은 대진의 역사가 고려왕조의 전신이라고 밝히고 있고, 근현대에 와서 보다 객관적인 입장에 놓여있는 일본이 대진사(大振史)가 한국사의 범주에 속한다고 인정하고 있다.

현재 한중일 여러 문헌과 고고학은 대진이 한국사의 정통왕조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입증해 주고 있다.

①대진의 창건자 고왕 대조영을 <구당서> 발해말갈전에는 고구려의 지파라는 뜻에서 '고려별종(高麗別種)'으로, <무경총요>에는 '부여별종(扶餘別種)'으로, <삼국유사>에는 신라고기를 인용하여 '고구려장군(高句麗將軍)'으로, <고려사>에는 '고구려인(高句麗人)'으로 기술하고 있다.

②<삼국유사>에는 ⌜신라고기(新羅古記)⌟를 인용하여 '고구려 잔얼(殘孼)들이 태백산에 웅거하여 발해를 세웠다'고 기술되어 있고, 최치원은 당주(唐主)에게 감사 표문을 올리면서 '고구려가 지금의 발해가 되었다'고 적고 있다.

③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제2대 무왕은 “고려의 옛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의 풍습을 가지고 있다(‘復高麗之舊居 有夫餘之遺俗’ 『속일본기』)”라고 천명하였고, 제3대 문왕은 스스로를 '고려국왕(高麗國王)'이라 칭하며, 고구려왕들처럼 '천손(天孫)'이라고 자임하고 있다. 일본 문헌에는 대진을 소개할 때 항상 서두에 “고구려(高句麗)”를 우선 언급한다.

④일본주(日本主)의 생일잔치에 각국의 사신들이 인사하는 그림이 발견되었는데 대진의 사신 바로 뒤에 일본어를 배우기 위해 파견된 신라유학생인 ‘신라학어(新羅學語)라는 인물이 서 있다.

당시 신라 유학생이 대진사신과 일본인들 간에 통역을 담당했던 것이다. 이것은 대진과 신라의 언어가 상통(相通)했고, 방언적 차이 밖에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⑤대진 지배층의 성씨 중 왕족인 대씨(大氏) 외에 고구려 왕족의 성씨인 고씨(高氏)가 지배층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피지배층인 말갈(靺鞨)도 국내의 한규철, 권오중과 중국의 손진기는 흑수말갈을 제외한 속말말갈과 백산말갈 등은 “부여예맥계(夫餘濊貊係)”라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⑥국내외 문헌들에는 대진 멸망이후 대진인(大振人)과 흑수말갈의 후예인 여진인(女眞人)으로 분명하게 구분하여 표기하고 있다.

⑦문화요소에서 고구려의 것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제3대 문왕의 딸 정효공주묘는 고구려양식의 “굴식돌방무덤” 형태이고, 정혜공주묘의 천장구조도 역시 고구려양식인 “모줄임” 형태를 하고 있다. 보통 토광묘(土壙墓)는 말갈계 무덤이라 주장하나, 일반 서민들의 묘제로 보아야 한다.

지금도 흙구덩이무덤은 조성되고 있다. 옥저 고구려의 전통적인 난방시설인 “온돌”이 대진 황궁과 집터에서 어김없이 나타나고 있으며, 연꽃무늬 기와랑 성곽의 치구조 등과 같은 문화 요소도 고구려의 것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정효공주묘(貞孝公主墓)는 발해의 3대왕인 문왕(文王, 재위 737~793)의 넷째 딸이 묻힌 곳으로서, 현재 길림성 화룡현 용두산(吉林省 和龍縣 龍水鄕 龍海村 龍頭山) 고분군에 위치하고 있다. 벽면에 인물들이 그려져 있다.


▲러시아 연해주 중북부의 평지성곽인 콕샤로프카-1성 유적에서 발견된 고구려 양식의 쪽구들 유적. 대진


⑧전근대 중국의 25사에는 중국사로 볼 수 없는 요사(遼史), 금사(金史), 원사(元史)까지도 포함하고 있으나, 대진사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중국인들 스스로가 대진의 역사를 자국사로 보질 않았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러나 조선후기 실학자 류득공은 "발해고(渤海考)"라는 책을 저술하여 발해를 우리나라 역사로 소개하면서 신라와 더불어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로 규정하고 있다.

⑨대진 멸망 후 고려의 태조왕건은 발해를 ’친척지국(親戚之國)‘으로 인식하여 태자 대광현이 귀순해 오자 왕계라는 성씨를 하사하며 종실로 받아드렸고, 백주를 식읍으로 내려 조상제사를 받들도록 배려했다.

또한 대광현을 따라온 관료들에게도 차등있게 집과 전답을 내려주었다. 이에 후당의 명종이 보내온 국서에 '고려가 옷을 나누고 밥을 덜어서 홀한인(忽汗人 대진인)을 구제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태조왕건의 여러 후비들 중 출신지와 성씨 미상의 '서전원부인(西殿院夫人)'이 등장하는데, 대진의 황녀일 가능성이 있다. 왕건이 인도 승려 말라에게 ‘발해는 우리와 혼인한 사이’라는 기록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그 후에도 대진 유민들의 귀부가 계속되어 약 70만명 정도 되는 많은 수가 고려로 넘어왔다. 대신라 지방민들의 남북국 통일에 대한 오랜 염원이 고려의 적극적인 북진책으로 이루어졌으니, 영토적으로 보면 고려 중기에 서쪽으로는 요하선에 이르고, 길림합달령(新羅山)을 지나, 동북쪽은 두만강이북 700리에 이르는 고구려-대진의 고토를 수복하게 된다.

▲ 좌)KBS한국사探, 중)인하대고조선연구소, 우)강효백<일본은 고려의 속국이였다>이 새롭게 고증한 고려 강역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