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종성(지방분권포럼 대표)

▲ 유종성 (지방분권포럼 대표)
▲ 유종성 (지방분권포럼 대표)

 

 

 

왕요형제는 왕식렴과 함께 정변모의

왕규가 시해하려한 대상은 사실상 왕요

혜종정권의 입장에서는 ‘서적찬위(西賊簒位)’

 

창업군주로써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녔던 태조왕건이 붕어(崩御)하고 혜종이 즉위하면서, 지방호족을 외가로 둔 황자들이 황위를 엿보게 된다. 그중에 대표적인 도전자들이 태조 당시 *‘충주원부인(忠州院夫人)’으로 불린 신명순성태후 유씨(劉氏)의 소생인 왕요, 왕소 두 형제였다.

▲ SBS 달의여인 보보심경 려에 *신명순성태후 유씨, 그녀는 태조 당시에 왕후(王后)의 위(位)에 있지 못했던 고로 다른 후비들의 경우처럼 출신지 '충주'라는 지역명에 '원(院)'이라는 저택을 지닌 '부인(夫人)'이였다. 정종이 즉위하여 태후로 높혀졌고, 사후에 "신명순성태후(神明順成太后)"로 추시되었다.
▲ SBS 달의여인 보보심경 려에 *신명순성태후 유씨, 그녀는 태조 당시에 왕후(王后)의 위(位)에 있지 못했던 고로 다른 후비들의 경우처럼 출신지 '충주'라는 지역명에 '원(院)'이라는 저택을 지닌 '부인(夫人)'이였다. 정종이 즉위하여 태후로 높혀졌고, 사후에 "신명순성태후(神明順成太后)"로 추시되었다.

왕건은 자신의 사후에 혹여나 있을지 모르는 황위 분쟁을 우려하여, 세력 기반이 약한 정윤(正胤) 왕무(王武)를 위해, 광주(廣州)의 호족인 왕규와 무력을 쥔 당진의 박술희(朴述希)를 후견인으로 삼아 주었다. 하지만 이 둘은 각자 성향과 기질이 달라 조화를 이루지 못했고, 서로를 경계하며 반목하다가 정적들의 도전에 직면하여 모든 것을 잃고 몰락했던 것이다.

혜종의 즉위와 동시에 정국을 주도한 인물은 고명대신 왕규였다. 그는 첩보망을 가동시켜 왕요, 왕소 두 형제의 반역 움직임을 포착하고 혜종에게 보고한다. <고려사>에는 왕규가 두 황자를 '참소(讒訴)'했다 하나 승자 쪽의 표현일뿐이다.

혜종은 고변을 전해 듣고도 미온적으로 대처한 듯 보인다. 그는 장자로써 후계자가 되었고, 삼한통일의 공훈까지 지닌 제왕이었기에, 정통성에 있어서 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쳐지지 않는다는 나름의 자신감과, 또 장남으로서 동기들을 잘 돌봐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인해, 아우들의 딴마음을 전해 듣고도 수세적으로만 대응한 것 같다. 중국 고사의 *'송양지인(宋襄之仁)'의 우를 범한 것이다.

▲ 宋襄之仁(송양지인)은 “송나라 양공의 어짊”이라는 뜻. 전국시대 송군(宋軍)이 강을 두고 초군(楚軍)과 마주했을 때, 신하 목이가 초군이 강을 반쯤 건너오는 이 때에 공격해야 한다고 간했다.그러나 양공은 이것은 ‘인(仁)’이 아니라고 물리쳤다. 초군이 도강하여 미처 진용을 갖추지 못한 것을 보고, 또 목이가 이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간했으나, 양공(襄公)은 이번에도 남의 곤경을 이용하는 것은 ‘義(의)’가 아니라며 역시 물리쳤다. 불리한 형세를 벗어난 초군은 송군과 싸워 이기게 된다. 이때 양공은 부상을 입어 이듬해 죽고 만다.이 고사성어는 실질적으로 아무런 의미도 없는 대의명분, 혹은 쓸데없이 인정을 베풀다가 타격을 받는다는 의미로 쓰이는 말이다.
▲ 宋襄之仁(송양지인)은 “송나라 양공의 어짊”이라는 뜻. 전국시대 송군(宋軍)이 강을 두고 초군(楚軍)과 마주했을 때, 신하 목이가 초군이 강을 반쯤 건너오는 이 때에 공격해야 한다고 간했다.그러나 양공은 이것은 ‘인(仁)’이 아니라고 물리쳤다. 초군이 도강하여 미처 진용을 갖추지 못한 것을 보고, 또 목이가 이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간했으나, 양공(襄公)은 이번에도 남의 곤경을 이용하는 것은 ‘義(의)’가 아니라며 역시 물리쳤다. 불리한 형세를 벗어난 초군은 송군과 싸워 이기게 된다. 이때 양공은 부상을 입어 이듬해 죽고 만다.이 고사성어는 실질적으로 아무런 의미도 없는 대의명분, 혹은 쓸데없이 인정을 베풀다가 타격을 받는다는 의미로 쓰이는 말이다.

혜종은 다른 마음을 품은 두 아우들을 회유하고자 했다. 특히 신주원부인 강씨의 양자로 들어가 있던 왕소(王昭)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공주(公主)를 그에게 재가시키는 한편, 변란에 대비하기 위해 시위대를 증강시키고, 동향출신들을 측근으로 많이 기용하였다.

이러한 혜종의 소극적인 조치에 안심할 수 없었던 왕규는 왕요측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보다 공세적으로 행동에 나선 것 같다. <고려사>에는 마치 왕규가 자신의 외손인 광주원군(廣州院君)을 옹립하고자, 혜종을 암살하려고 했던 것처럼 기술되어 있지만, 왕규의 외손 옹립은 왕요측의 흑색선전일 가능성이 크다.

왕규(王規)는 태조로부터 유언를 받은 고명대신이요. 혜종을 보위하는 후견인으로써 정국의 주도권을 이미 쥐고 있었기에, 서열에서도 한참이나 뒤쳐지는 외손(外孫)을 옹립하려는 무리수를 둘 이유가 없었다.

만약 자신의 뜻대로 혜종을 폐위하고 외손을 옹립할 경우, 다른 황자들과 호족들의 반발을 사게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였거니와, 또다른 후견인인 박술희나 혜종의 장인인 임희까지도 적으로 돌려야 하는 부담에 직면하게 되어, 왕규로써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였다.

▲ 경기도 하남시 춘궁리에 위치한 3층 및 5층 석탑. 1988년 발굴 결과 10세기에 건립된 2층 높이의 대형 사찰터가 확인되었다. 고려 초기의 호족인 왕규와 관련된 사찰로 추정된다.
▲ 경기도 하남시 춘궁리에 위치한 3층 및 5층 석탑. 1988년 발굴 결과 10세기에 건립된 2층 높이의 대형 사찰터가 확인되었다. 고려 초기의 호족인 왕규와 관련된 사찰로 추정된다.

<고려사>에는 왕규가 혜종을 시해하고자 여러 차례 자객을 보내거나, 본인이 직접 칼을 빼어들고 침전에 잠입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사실상 암살의 대상은 혜종이 아니라 왕요(王堯)였다. <고려사> 최지몽열전에는 "혜종 2년(945) 왕규(王規)가 왕의 아우를 해치려는 계획을 세웠을 때..."라는 기록은 이러한 추측에 힘을 실어준다.

"왕규가 또 자신의 무리에게 벽에 구멍을 뚫고 왕의 침전(寢殿)에 들어가 난을 일으킬 것을 꾀하였으나, 왕은 거처를 옮겨 피하였을 뿐이고 그들의 죄를 묻지 않았다" <고려사> 혜종2년(945)

위에 기록은 문자 그대로 신뢰하기 어렵다. 혜종(惠宗)은 자신을 시해하려던 범인이 왕규라는 사실을 알고도 그냥 덮어 두었다라고 한다. 동서고금에 대역을 범한 신하를 그대로 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거니와, 설령 혜종이 묻어두고자 하여도 주변의 측근들이나 같은 고명대신인 박술희가 묵과하지 않았을 것이다. 반역을 꿈꾸던 왕규의 정적들도 이것을 빌미로 그를 탄핵하려고 나섰을 것이다. 따라서 왕규가 시해하려고 든 대상은 혜종이 아니라 왕요가 분명하다.

<고려사>에는 사천공봉 최지몽(崔知夢)이 혜종에게 아뢰기를, “유성이 자미궁(紫微宮)을 침범하였으니, 나라에 반드시 역적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고, 이에 혜종은 왕규가 왕요, 왕소를 해치려는 징조로 보았다고 기록한다.

이 기록의 경우도 상식 밖의 얘기이다. 자미궁은 황제(皇帝)를 상징하는 별자리인데, 이 예언을 전해 들은 혜종이 왕규가 두 형제를 해치려는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부터가 말이 되질 않는다. 마치 왕요와 왕소는 처음부터 혜종을 대신하여 황제로 세워질 운명이고, 혜종도 그 사실을 알고 인정했다는 식의 기록이다.

이것은 정변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던 왕요측이 의도적으로 윤색한 내용인 것으로 생각된다. 실상은 예지력을 지니고 있던 최지몽이 혜종에게 전한 말이 아니라, 왕요에게 전해 준 말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왕요는 미리 피신하여 왕규가 파견한 자객의 칼날을 여러 번 벗어날 수 있었다.

훗날 왕요가 즉위하여 최지몽을 포상하면서 변고를 미리 알려 여러 번 위기를 모면케 한 공이 있다고 언급한 부분을 통해서도 이러한 사실은 뒷받침된다. 따라서 사건이 벌어진 장소는 황제가 거처하는 대내(大內)가 아니라, 왕요의 황자궁이였던 것이다.

여기서 당시 상황을 합리적으로 재구성해 보면 왕요측은 정변을 치밀하게 계획한 듯 보인다. 먼저 혜종정권을 지탱하는 두 기둥인 왕규와 박술희를 이간시키기 위해 그들은 암암리에 가짜뉴스를 유포하며 여론전을 펼쳤다.

왕규가 자신의 외손을 옹립하려 한다는 소문을 퍼트려, 혜종정권을 보위하는 진영의 결속력을 약화시키려고 한 것이다. 그리하여 왕규가 딸의 처소인 궐 밖 광주원(廣州院)을 내방하거나, 외손과 접촉하는 일이 있을 경우, 이것을 부풀려 의심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이에 점차로 신료들과 호족들은 왕규를 의혹의 눈초리로 지켜보게 되었고, 특히 박술희은 왕요뿐만 아니라, 왕규까지도 경계의 대상으로 보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무장한 갑사 100명을 데리고 다니며 항상 비상시를 대비했다.

왕요형제는 일찍히 서경총관이였던 왕식렴과 은밀히 내통하고 있었다. 아마도 왕요는 왕식렴에게 서경 천도와 권력 분점을 약속했을 것이다. 이 사실이 왕규의 첩보망에 걸려들었고, 초조해진 왕규는 적극적으로 왕요를 처단하려고 나섰던 것이다.

왕요는 이러한 공세에 위협을 느껴 혜종 2년 9월에 실체가 없는 왕규의 역모를 빌미삼아 왕식렴의 서경군을 개경으로 불러드려서 자신을 보위케 하고, 양진영이 얼마간 무력으로 대치하게 된다.

<고려사> 왕식렴열전에 “왕식렴이 평양에서 군대를 거느리고 들어와 지켰으므로 왕규가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라는 기록을 통해서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서경군의 개경 진주(進駐)를 반란으로 규정하고 왕규와 박술희가 적절한 연대를 통해 이들을 제압해야 했다. 그러나 둘 사이가 원만하지 못한 관계로 공동 연합전선을 펼치지 못하고, 서로 반목하다가, 오히려 역공을 당하여 각개격파당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박술희는 반군과 싸우는 와중에 생포되어 일단 유배에 처했고, 왕규의 당여가 숙청 된 후 그도 은밀히 암살된 것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정종이 박술희를 갑곶(甲串)에 유배보냈다고 하였는데, 정작 그를 사사(賜死)한 자는 왕규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변 진압의 실패로 이미 주도권을 상실한 왕규가 무슨 여유가 있어 귀향 가 있는 박술희를 사사할 수 있었겠는가? 따라서 박술희를 유배보내고, 사사한 사람은 바로 정종이었던 것이다.

<고려사>에는 혜종이 병환으로 인해 국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다가 창졸간에 자연사하여 평화적으로 황위가 왕요에게 승계된 것처럼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훗날 최승로가 성종에게 <시무28조>를 올린 소(疏)에서 ‘정종, 광종이 즉위할 시기에 양경(兩京)의 문무양반의 절반이 살상되었다’는 표현에서 대대적인 숙청이 있었던 것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왕요가 선양(禪讓)을 받거나, 황실 윗어른의 교지에 따라 승계하는 형식이 아니라, 신료들의 추대에 의해 보위에 올랐다라고 하는 것을 볼 때, 혜종의 시해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혜종이 자연사하고 왕요측이 반역한 왕규를 제압한 것이 사실이었다면, 당시 혜종의 모후인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가 황실의 웃어른 ‘태후(太后)’로써 역할이 있어야 할 것이고, 대보(大寶)를 전하는 과정에서 혜종의 적자인 흥화궁군(興和宮君)과 관련된 얘기도 있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림자도 보이질 않는다. 따라서 혜종은 정변의 어수선한 상황에서 몰래 암살당한 것이 분명하고, 혜종의 모후와 후비들은 사가로 폐출되고, 흥화군은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혜종의 묘호에 붙은 '혜(惠)'자나 시호인 '의공(義恭)'과 능호인 '순릉(順陵)' 등은 대의(大義)에 공손히 순응하여 선위했다는 뜻을 담고 있으니, 정변을 일으킨 세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부여된 것들이다.

선례로 후기 신라때 김지정의 난으로 피살된 혜공왕은 분명히 정변과정에 시해당하여 왕위를 빼앗겼으나, 정변을 주도한 세력들은 '혜공(惠恭)'이라는 시호를 부여하여, 마치 대의를 받들어 은혜로써 공손히 선위한 것처럼 보이게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혜종에게 부여된 묘(廟), 시(諡), 능(陵)의 이름들이 혜공왕의 사례와 매우 닮아 있어 참고가 된다.

▲고려 제2대 혜종과 의화왕후 임씨의 順陵(순릉). 북한은 2019년도에 개성시에서 혜종(912∼945년)의 무덤을 발굴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통신에 따르면 가장 윗구획에는 직경 13m, 높이 3m 규모의 봉분과 표식비가 있고, 중간 구획에는 좌우에 각각 1상의 문관상(文官像)이, 아래 구획에는 제당터가 확인됐다. 특히 "무덤칸(묘실) 규모는 길이 4m, 너비 3.4m, 높이 2.2m로서 지금까지 발굴된 고려왕릉들 가운데서 제일 크다"고 소개했다. 또 "발굴 과정에 '高麗王陵'(고려왕릉)이라고 새긴 비석과 청자 새김무늬 잔 받침대, 꽃잎무늬 막새기와 용 모양의 치미 조각들을 비롯한 유물들이 발견됐다"고 전했다.
▲고려 제2대 혜종과 의화왕후 임씨의 順陵(순릉). 북한은 2019년도에 개성시에서 혜종(912∼945년)의 무덤을 발굴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통신에 따르면 가장 윗구획에는 직경 13m, 높이 3m 규모의 봉분과 표식비가 있고, 중간 구획에는 좌우에 각각 1상의 문관상(文官像)이, 아래 구획에는 제당터가 확인됐다. 특히 "무덤칸(묘실) 규모는 길이 4m, 너비 3.4m, 높이 2.2m로서 지금까지 발굴된 고려왕릉들 가운데서 제일 크다"고 소개했다. 또 "발굴 과정에 '高麗王陵'(고려왕릉)이라고 새긴 비석과 청자 새김무늬 잔 받침대, 꽃잎무늬 막새기와 용 모양의 치미 조각들을 비롯한 유물들이 발견됐다"고 전했다.

정종 즉위 후에 사실상 정국을 주도한 인물은 태조왕건의 사촌동생이였던 왕식렴(王式廉)이였다. 이것으로 볼때 정변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은 왕식렴과 그가 이끄는 서경군이였다.

정종이 왕식렴을 표창하며 내린 조서(詔書)를 보면 그의 역할이 지대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공(公)의 죽음을 무릅씀이 아니었다면, 내 어찌 오늘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 이른바 ‘정국(政局)이 혼란스러울 때 진실한 신하를 알아보고, 거센 바람이 불 때 굳센 풀을 알아본다.’라는 말을 옛날에 들어보았는데, 오늘에야 그러한 사람을 만났도다.

비록 만석(萬石)의 봉작을 주고, 아울러 구주(九州)의 관리에 임명하여도, 어찌 충분히 이 공훈을 보답하고, 그 공명을 갚겠는가?’”라며 상찬하고 있다. 사실상 왕식렴이 정변을 적극적으로 주도하여 왕요를 옹립하였고, 서경천도(西京遷都)를 추진했던 것이다.

혜종의 측근 중에 명나라의 *방효유(方孝孺)와 같은 인물이 있었다면, 왕요와 왕식렴이 일으킨 변(變)을 가리켜 서경의 도적이 대위를 찬탈한 '서적찬위(西賊簒位)'로 평했을 터이다.

*방효유는 명나라 초기 대학자요. 명의 제2대 건문제의 측근으로써 연왕(燕王) 주체(朱棣)가 조카를 축출하여 제위를 찬탈하고 자신에게 즉위 조서를 쓰라고 명하자 그는 종이에 연나라 도적이 제위를 찬탈했다고 하는 “燕賊簒位(연적찬위)”라는 네 글자만 적었다고 한다. 이에 분노한 연왕이 그의 허리를 자르고 10족을 멸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