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 사용에 소극적인 조선, 도로도 최소화
이전의 왕조보다 수레 사용 저조로 나라 쇠락
제도는 고칠 수 있겠으나, 풍속은 바꾸지 못해
▲ 고구려 무덤 벽화에 보이는 수레.
고구려는 수레의 나라라고 할 만큼 고구려 무덤 벽화에는 수레를 숭상하는 그림이 있다. 또 행렬에는 커다란 수레가 등장한다. 고구려가 강성하여 동아시아를 호령한 것도 말이 끄는 수레를 통한 기동성이 주효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도 수레가 발달하여 물류 수송이 활발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상업이 발달한 것으로 보면 보부상이 걸어 다녀서가 아니라 대규모 수송을 가능하게 한 말이나 소가 끄는 수레 때문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리조선에서도 소가 끄는 수레를 생각해 볼 수 있겠으나 수레가 작아 도로 폭이 좁아 고려시대보다 뒤떨어졌고 유득공이 살았던 서기 18세기 후반을 놓고 볼 때 수레가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득공은 고운당필기, ‘용거用車’ 편에서 당시 수레가 거의 사용되지 못한 것을 지적하였다.
사람들이 수레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하지만 수레를 사용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일갈하였다.
여러 가지 핑계를 대 수레를 이용하기 어렵다고 이유를 말하지만, 유득공은 그것은 관에서 한 번만 명령하면 다 될 것이라며 그러한 불평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박하였다.
그는 당시 수레가 활용되지 못한 이유를 조선의 고질적인 체면에서 찾았다. 강고한 신분제에서 나오는 체면과 형식 그리고 위선적 사회 분위기가 수레 사용을 가로막았다고 진단하였다.
예를 들어 2품 이상 차이가 나는 문무 관료가 서로 수레를 이끄는 말을 타고 가다 마주치면 그 중 하급 관원이 말에서 내려야 하는데, 좁은 골목으로 피해 버린다고 한다.
이는 신분이 낮은 사람은 높은 사람을 만났을 때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춰야 하거나 피해야 하는데 이것을 일일이 지키다 보면 말을 타지 않느니만 못하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 조선 수레 풍습과 청나라의 풍습을 비교하여 조선이 얼마나 폐쇄적인가를 보여주며 개선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는 수레 이용 제도는 고칠 수 있겠지만 신분사회의 이러한 풍속은 바꿀 수 없다고 절망한다.
아래는 그의 ‘용거’글 전문이다.
-아래-
[ 사람들은 모두 수레 사용의 편리함을 말하지만, 끝내 그들이 수레를 사용하는 것은 본 적이 없다. 설자(說者)는 “도로를 닦기가 어렵고 나루와 배에 널빤지를 깔기 어려우며, 객점에서는 문을 높이거나 마당을 넓히기가 어렵다.”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는 한번 호령하면 될 일이니,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다만 우리나라는 체면을 매우 중시한다.
서로 2품 이상 차이 나는 문무 관료가 마주치면 그중 하급 관원이 말에서 내려야 하니, 갑자기 맞닥뜨리면 좁은 골목으로 피해 버린다.
지금 수레를 탄 사람에게 말에서 내리는 예를 요구하여 불편하게 부랴부랴 피하거나 일일이 수레에서 내리게 한다면 수레를 타지 않느니만 못할 것이니 어찌 수레를 타는 자가 있겠는가.
내가 연경을 유람할 때 보니 수레를 끌고 가는 자가 먼저 골목 어귀에 들어서면서 큰 소리로 신호를 보내면, 비록 귀한 사람이라도 반대편 입구 밖에서 수레를 멈추고 잠깐의 기다림을 아까워하지 않았으니 이는 선후의 구별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풍속은 조급하고 남을 깔보기를 좋아하여 선후를 따지지도 않고 좁은 골목 안에서 충돌하거나 말이 놀라고 굴대가 부러져 낭패를 당하고야 마니, 어찌 수레를 끌고 다니는 자가 있겠는가. 제도는 고칠 수 있지만 풍속은 급히 바꿀 수 없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