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강효백(경희대 전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수나라 교훈삼아 고구려 침략한 이세민 또 대패

안시성에서 승기 잡으려다가 한쪽 눈에 화살 맞아

연개소문 여세 몰아 당나라 본토까지 추격전 벌여

목표는 당나라를 고구려의 부용국으로 만드는 것

이세민 강소성 까지 쫓겨가 몽롱탑에 숨어 생존

▲ 당나라 임금, 이세민은 대막리지, 연개소문에 강소성까지 쫒겨 죽을뻔 했으나 몽롱탑에 숨어 목숨을 건졌다(편집인 주). 자료: 삼태극


연개소문 ― 북경·하북·산동·강소성까지 진격

1. 불의 제국을 향한 칼날

고구려 말, 나라 안팎은 격랑에 휩싸였다. 당 태종 이세민은 천하를 통일했다는 오만으로 고구려를 노렸다. 645년, 요동에 천자의 깃발이 들어섰을 때, 세상은 모두 고구려의 멸망을 예견했다. 하지만, 성문 위에 선 장수의 눈빛은 달랐다. 대막리지 연개소문이었다.

안시성. 여름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던 그 성벽 위에서, 고구려 군은 죽음을 각오했다. 당 태종은 거대한 토산을 쌓아 성을 무너뜨리려 했지만, 고구려 병사들은 피로 그 토산을 허물었다. 화살이 빗발치고 돌이 하늘을 가르며 떨어졌으나, 성문은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 안시성 방어는 세계 전쟁사에 길이 남을 승리였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단순한 수비 지휘관이 아니었다. 그는 칼끝을 돌려 당의 심장을 향해 반격했다. 북경과 하북성 일대까지 진격하여 제국을 떨게 했다. 그에게 방어는 출발점이었고, 공격이야말로 완성점이었다. 대륙의 수도를 향한 고구려의 창끝은, 연개소문이라는 이름으로 불탔다.

식민사학은 그를 폭군으로 폄훼했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그는 내부적으로 불안을 잠재우고, 외부적으로 제국을 제압한 ‘공격형 실권자’였다. 고구려의 마지막 불꽃을 피운 것도, 바로 그의 공세적 전략 덕분이었다. 고구려는 연개소문을 통해 한 번 더 대륙을 향해 도약했다. 비록 그의 죽음 이후 국운은 기울었지만, 그가 남긴 공격의 정신은 꺼지지 않았다.

2. 연개소문, 중국 본토를 침공하다

1931년 《조선일보》에 연재된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71~74회 가운데 “연개소문의 중국 내지 침공”은 단순한 연대기가 아니다. 그것은 고구려가 망국의 벼랑에서 자존을 걸고 제국을 정면으로 찔렀던, 한 편의 전쟁 서사다. 단재는 이 사건을 ‘변방의 저항’이 아니라 ‘중국 심장부를 겨눈 창끝’으로 묘사했다. 고구려는 제국의 울타리를 뚫고 들어가, 누가 누구의 속국인가를 중국 수도 한복판에서 되묻는 존재였다.

이 서사의 심장부에는 장수가 아닌 혁명가,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있었다. 그는 서역을 유람하며 정보망을 짜고, 수나라의 멸망과 당나라의 전략을 냉철히 분석하여 단 하나의 비전을 품었다. “중국을 고구려의 부용국으로 만든다.” 왕을 폐위하고 호족을 숙청해 병권을 장악한 그의 결단은 국가의 생존을 걸고 체제를 재편한 혁명이었다.

3. 삼국 연합 좌절과 동맹의 재편

연개소문은 먼저 삼국 연합을 꾀했다. 신라 김춘추와 담판을 벌이며 “사사로운 원한을 버리고 하나 되어 중국을 치자”고 설득했으나, 김춘추는 백제에 대한 증오를 놓지 않았다. 결국 신라는 당과 손을 잡았고, 고구려는 백제와 밀약을 맺었다. 전략은 간명했다.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면 고구려는 당의 지원선을 끊고, 고구려가 당을 압박하면 백제가 신라의 배후를 찌르는 방식이었다.

연개소문은 돌궐·설연타까지 끌어들이려 했지만, 당은 이미 이들을 제압하고 회유한 상태였다. “남진만 고집하다 천재일우를 잃었다”는 그의 탄식은 후회의 독백이 아니라, 고구려 내부의 분열이 불러온 구조적 한계를 냉정히 짚은 것이었다. 한편 당태종 이세민은 수나라의 패인을 교과서 삼아 네 가지 전술을 준비했다. 정예병 20만 양성, 평양 직공 대신 요동부터 잠식, 가축에 군량을 실어 나르는 병참 실험, 그리고 신라와의 공수동맹. 제국은 ‘속도전’이 아닌 ‘보급선과 동맹망’으로 전쟁의 지평을 재설계하고 있었다.

4. 장기 소모전, 안시성의 기적

이에 맞선 연개소문은 교과서를 찢어버렸다. 건안·안시·가시성만을 방어하고 나머지는 초토화해 약탈할 것을 없애고, 당의 가축병참을 겨울의 굶주림으로 전환시키는 역용 전략을 택했다. 양만춘에게는 “절대 성문을 열지 말고, 적이 지칠 때 기습하라”고 명령했다.

안시성 전투는 이 명령의 교과서였다. 성 안의 풍부한 식량과 철저한 방어, 기습 돌격으로 당군의 흙산을 탈취한 순간, 전황은 역전됐다. 요택에 널린 수나라의 백골은 복수를 다짐하는 맹세로만 남았고, 북방의 계절과 지형, 인내의 문법을 읽지 못한 제국은 서서히 지쳐갔다. 전쟁은 숫자의 곱셈이 아니라, 의지와 지형의 함수임을 입증한 전투였다.

▲ 붉은색 방형 표식은 연개소문 진격의 유적지. 자료: 강효백


5. 북경까지 번진 불길

결정적 반격은 연개소문이 직접 주도했다. 그는 3만 정예군으로 장성을 넘어 상곡을 기습해 북경 인근 어양의 태자 이치까지 위협했다. 안시성 포위선은 혼란에 빠졌고, 당군은 퇴각을 결심했다. 그러나 추격군과 양만춘의 성문 돌격이 겹쳐 대열은 붕괴했고, 헌우란에서 날아온 화살이 당태종의 눈을 꿰뚫었다.

설인귀가 목숨을 걸고 황제를 구하지 않았다면, 당 제국의 황제는 북방의 설원에서 쓰러졌을 것이다. 눈보라 속 퇴각은 제국의 위엄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도피였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의 불길은 베이징 외곽 고려진, 하북성 고려성, 황량대 등 고려 관련 지명으로 남았다. 《발해사》에 기록된 고구려 정규군 30만과 말갈 연합 40만의 전력은 단순한 수치가 아니라, 제국을 압도한 군사적 실체였다.

6. 염성의 밤, 당태종을 삼킬 뻔한 칼날

전쟁의 말미, 강소성 염성의 밤은 고구려 침공의 절정을 증언한다. 『복녕현지』에 따르면 당태종은 해안 순시 중 연개소문에게 발각되어 추격을 받았다. 진흙탕에 말이 빠지고, 황제는 걸어서 달아나 잡초에 덮인 마른 우물에 몸을 숨겼다. 연개소문은 주변을 수색했으나, 거미줄로 뒤덮인 우물은 죽은 공간처럼 보였다. 황제는 그렇게 목숨을 건졌다.

이후 그 자리에 몽롱보탑과 정혜사를 세우며 살아남은 기적을 기념했다. 이 장면은 경극 무대에서 설인귀를 영웅으로, 연개소문을 위풍당당한 추격자로 각색했다. 그러나 본질은 분명하다. 연개소문은 단순한 장군이 아니었다. 그는 전략으로 시간을, 지명으로 주권을, 전술로 제국의 신화를 바꾸려 한 기획자였다. 그가 당태종을 쓰러뜨릴 뻔한 그 순간, 고려는 변방이 아니라 제국의 심장을 두드린 주체로 역사의 무대 위에 섰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