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민인홍(대종교 전리)
백사 이항복 선조 지시로 이순신 평가
공명정대, 개인보다 공적 생애 드러나
이순신 사당, 관과 민생들 자발적 기부
영웅화 작업, 박정희 이전에 이미 있어
▲ 이순신. 부산 동아대학교 박물관 소장
병조판서 이항복이 평가한 이순신
"공은 7년 동안 군중에 있으면서 심신을 困苦히 하여 일찍이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고 승전하여 상을 받았을 경우에는 반드시 여러 장수에게 나누어 주었고 조금도 남겨 둔 것이 없었다. 일찍이 원균이 군사로 인하여 둘이 말다툼한 일이 있어 감정이 쌓여서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공은 항상 자제들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만일 누가 그 일에 관해서 묻는 사람이 있거든 너희들은 의당 저 사람에게 공이 있음을 말하고 단점은 말하지 말라.' 하였다." 또한 "장부가 세상에 태어나서 나라에 쓰이면 몸을 바쳐 보답할 것이요, 쓰이지 못하면 초야에서 농사나 지으면 만족할 것이다. 그러니 권귀(권세가)에게 아첨하여 일시의 영화를 훔치는 것에 대해서는 내가 매우 부끄럽게 여긴다."
선조 34년(1601년), 이항복은 임금 선조의 명을 받는다. 선조는 " 고 통제사 이순신은 왕실에 마음을 다하다가 끝내 王事에 죽었으므로, 내가 그를 총애하여 가엾게 여긴다. 그러나 아직껏 사당을 세우지 못했으므로 이 때문에 그대를 명하여 그의 공적을 밝히게 하는 바이다."
선조의 명을 받은 이항복은 역마를 타고 바닷가에 이르러 여러 장수와 함께 그의' 충'을 표하고 '덕'을 기록하여 후세에 길이 보일 것을 의논하였는데 모두가 승낙하였다. 이순신 휘하에 있었던 병사들의 도움을 받아 사당 건립공사를 마친 이항복은 조정에 이 사실을 고하고 '묘액'을 청했다.
위의 글은 이때 이항복이 이순신의 世系와 이력 그리고 일의 시종을 서술한 것으로 백사집 제4권 <故 통제사 이 공의 유사>에 나온다.
본래 긴 글인데 이순신 사당을 세우는데 자발적으로 관민이 협력했고 이순신에게 꾸중을 많이 들었던 전라 병마절도사 '안위'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 공사를 도왔다.
글에 의하면 이순신은 부하 장졸은 물론 고을의 남녀노소 모든 백성이 공을 따르고 흠모하며 존경하였다. 이는 동서고금에 드문 일이다.
이순신의 지도력은 오늘날 연구해 봐도 놀랄 만큼 탁월하다. 그것은 그가 공평무사한 성품을 가졌고 또 그렇게 처신했기 때문이다.
글은 이순신이 통제사였을 때 병조판서로 그의 상관이기도 했던 이항복이 쓴 이순신 일대기이기에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가끔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이순신 이야기가 해방 후 영웅 사관에 의해 미화된 것이 아닌가 의심되기도 한다. 물론 군인이었던 박정희에 의해 '현충사'가 성역화되고 동상을 세우고 교과서에 가장 많이 이름이 나오고 유일하게 그의 출생일을 기념일로 정하는 등 그를 성웅으로 미화한 감은 있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의 현창(顯彰)의 첫 번째 주동자는 박정희 이전에도 있었다. 그는 '정조대왕'이다.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고 '영의정'으로 추존하는 등 이순신을 좋아한 정조는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다.
두 번째 이순신을 영웅에서 아예 성웅으로 높인 인물은 일제강점기 대종교인 단재 신채호이다. 이순신을 민족 구국의 영웅으로 격상시킨 것이다.
그럼 진짜 이순신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다행히 국왕 선조도 처음엔 이순신을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했으나 이순신이 죽은 후 그의 공을 인정하고 그를 추모하는 사당을 건립도록 했다. 그 사당 건립 추진 책임자가 백사 이항복이었다.
이항복은 곧 이순신이 전투했던 바닷가로 달려가 그곳은 주민들과 휘하 병졸들을 면담하여 생전의 이순신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사당의 사액을 청하면서 이순신의 일생을 정리해서 국왕에게 보고했다.
앞의 글은 그 보고서의 일부이다. 정부 관리가 쓴 이순신에 대한 첫 공식 보고이기에 그에 대한 첫 평가이기도 하다. 이순신의 신화를 걷어내고 참 군인이자 애국자 이순신에 대해 알고 싶으면 이 백사집에 수록된 이항복의 글을 읽어보시면 좋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해군 참모총장이었다면 이항복은 국방부 장관이었으니 상하 지휘 관계였다. 그럼에도 매우 공정한 기록을 남긴 이항복의 인품의 훌륭함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