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정락(미학자, 서울대 미학과)

 

‘서당’ 풍속화를 김홍도는 다양한 각도에서 그려

실내는 없지만 인물들을 통해 실내를 연상하게 해

훈장은 가장 멀리있음에도 가장 크게 그려 비논리

가장 앞에 있는 왜소한 학동을 가장 작게 그려

왜소한 이 학동이 시선을 끌고 공간을 왜곡해 놔

▲ 김홍도의 풍속화 서당(편집인 주).
▲ 김홍도의 풍속화 서당(편집인 주).

 

<그림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아래의 그림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정조 때 최고의 화원이었던 김홍도가 그렸다는 풍속화첩의 하나인 <서당>이다.

A4에 해당하는 이 작은 그림은 당시 일반 백성의 삶을 묘사한 것이고, 풍속화로 분류하고 있다. 장르의 분류나 그림의 용도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살펴볼 기회를 갖겠다.

이 그림은 서당 내에서 벌어질 만한 사건을 그리고 있다. 예컨대, 한 학동이 나이가 지긋한 훈장에게서 벌을 받는 혹은 받으려는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여러 다른 학동들은 이 광경을 주시하고 있으며, 동료의 난처한 상황을 오히려 즐기는 듯한 양태를 보여준다.

위에서 바라본 (실내의) 정경은 그저 암시만 되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그곳이 방안이라는 명시적인 근거는 그림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인물들의 군집 형태가 실내를 연상케 한다는 뜻이다.

원근법적인 논리는 매우 중층적, 좋게 말해 다원적이다. 원근의 축은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위로 진행하는 사선으로 놓여있다.

그래서 왼쪽이 가깝고 오른쪽이 멀어야 하지만, 그림은 그 반대다. 물론 인물의 병렬적 겹침으로 인해 공간의 깊이를 만들어내지만, 위로 갈수록 커지는 인물 형상으로 인하여 모순으로 된다.

그 모순의 정점에 있는 것이 훈장의 몸집이다. 가장 멀리 있음에도 가장 크다. 이런 비논리적 상황을 인지하기 쉽지 않다. 보는 여러분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것은 화가가 그림 속에 마련한 여러 의미론적인(혹은 시각 유희적인) 장치들로 인한 것이다.

1. 이 그림을 영화 포스터라고 보면 이해가 쉬워진다. 포스터의 콜라주식의 배치는 주역을 다른 조역이나 장면에 비해 크게 설정한다.

이 맥락으로 다시 해석하면, 이 그림은 상황의 사실적 전달보다는, 의미와 가치의 크기순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그래서 공간을 기하학적 그리드로 쪼갠 방식이 아닌, 대상의 중요도에 입각한 원근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의미원근법(perspective of meaning)’이라 하는데, 유아들의 그림에는 매우 자연스럽게 이 방식이 적용된다.

2. 그림은 한 눈에도 읽히지만, 시선은 어느 곳에 집중되기 마련이다. 그것을 유도하는 방식이 이 그림에서는 작위적인 인물의 크기로 이루어졌다.

이런 의도에 의해 사람들은 가장 먼저 훈장과 혼나는 학동에 먼저 시선을 두게 된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주위를 살피며, 두 주인공 사이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한 조역들의 정서적 그리고 신체적 반응을 확인하고, 이를 통해 서당 내에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3. 그려진 인물 중에 매우 특별한 인물이 있다면, 가장 앞쪽에 자리 잡았지만, 가장 작게 그려진 인물이다. 딴 머리를 한 왜소한 아이다.

그래서 이 인물은 가장 크게 그려진 훈장과 대칭(혹은 대립)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심지어 이 어린아이는 유일하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존재다.

유일하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는 의미다. 얼굴을 보이는 다른 학동들은 모두 혼나는 학동에게 시선을 둔다. 유일하게 훈장을 바라보는 존재가 바로 이 왜소한 첫 번째 아이다.

4. 그래서 훈장의 크기는 이 작은 아이가 바라보는 심리적, 그러니까 그 아이를 압도하는 크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아이는 자기도 혼날까 봐 겁을 먹은 상태다. 원래 매 맞는 놈보다 그것을 기다리는 놈의 공포가 더 큰 법이니까.

그러니 비 원근법적인 표현은 이 아이의 시선과 심리를 드러내려는 방법이었다고 애써 눙칠 수 있다. 그만큼 아이의 시선은 외부 관객의 시선과 거의 일치한다.

그래서 이 작고 왜소하고 불쌍하며, 얼굴도 보이지 않는 친구가 정작 시선을 유도하고 공간을 왜곡시킨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