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오세훈(씨알소리 편집위원)

폭압의 일제치하, 박정희 시대에 저항한 언론인

현재 언론, "기레기" "절도" "매춘" 등 부정 평가

사상계와 씨알소리, 한국 언론이 나가야할 표본


1. 씨ᄋᆞᆯ사상과 만나다

저는 저널리즘 전공자입니다. 젊은 날을 그 연관 분야에서 보냈습니다. 독재자 박정희가 최측근 심복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은 날이 1979년 10월 26일이었지요. 그 해, 저는 고민 많은 대학 1학년생이었습니다.

입학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학교를 계속 다녀야 하는가’, 자문하며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휴교와 휴강이 빈번했습니다만, 도서관은 열렸습니다. 수업에는 거의 들어가지 않고 주로 도서관에서 보냈습니다. 사서들과 금세 친해졌습니다.

그곳 청소부 아저씨들하고도 친하게 지냈습니다. 건방지게도 나이 한참 많은 그분들과 맞담배질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때는 그들과의 관계가 제게 참 편했습니다. 저의 1학년 평점은 1.2였습니다.

그 해 4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운명적이었습니다. 이렇게 거창하게 말할 수밖에 없는, 참으로 특별한 날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선배나 교수들하고 관계 맺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어떤 책을 읽어보라고 권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누구에게든 유쾌한 일이라고는 없을 때였습니다. 그렇게 불안하게 방황하는 청년들에게 오늘은 우울하고 슬픈 시간이었으며, 내일은 천지사방에 먹구름 가득한 오리무중의 시간이었습니다. 젊은 사람일수록, 가슴이 뜨거운 사람일수록, 자신과 가족을 넘어서 세상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무거운 절망에 가두리 당한 신분이었습니다.

다시 1979년 4월 어느 날, 그 도서관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날 시장통에서 점심밥 대신 막걸리 몇 잔 마셨습니다. 물론 혼자였습니다. 사서과장이 저를 보더니, “한 잔 했구나!”,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인사를 나눈 직후였습니다.

2. 소경, 눈 뜨다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서 특별한 제목이 달린 역사책 한 권을 발견하였습니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

‘역사를 뜻으로 보다니……!’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지?’

‘뜻으로 보다니……!’

‘뜻으로……!’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제가 그전까지 푹 빠져서 읽은 유일한 책은 중2때던가, 《삼국지》였습니다. 그때, 중고생들에게 인기가 높은 《학원》이라는 잡지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독후감 공모를 했는데, 시골 소년이 상으로 그 책을 받았습니다. 그 후로는 고교, 대학입시 준비한답시고 교양을 높여주는 독서를 별로 하지 못했습니다.

자퇴하고 재수할까 자원입대할까, 를 놓고 재던 고민은 이미 사라졌습니다. 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날 역사책을 ‘뜻으로 보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깊게 파고들었습니다. 그때까지 나왔던 함석헌의 단행본은 19권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말만 들었던 ‘독서삼매경(讀書三昧境)’의 진수를 경험했습니다. 짧은 시간에 전 권을 독파했습니다. 그 기쁨은 과장 없이 ‘무지막지(無知莫知)’였습니다.

“예술(문학·음악·미술 등)의 효용은 감동과 쾌락에 있다.”

문덕수(1928-2020)의 명저 《문학작품의 심리적 메커니즘 분석》의 예술론 1장 1절입니다.

저는 ‘함석헌(1901-1989) 읽기’의 그 엄청난 감동과 쾌락을 ‘함석헌 쇼크’라고 말합니다. 선물도 많이 하고 권하기도 많이 했습니다. 지금도 종종 선물합니다. 제 고교시절 절친은 일찍 호주로 유학이민을 갔습니다. 그 나라에 이민 오는 사람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했습니다.

그 친구가 지난 2008년 씨알재단의 영문 홈페이지를 자원봉사로 만들었습니다. 제가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읽게 만든 최초의 인물이었습니다. 2008년부터 2012년까지 대학생들에게 씨알사상을 강의한 적이 있습니다. 자식뻘의 그 젊은이들은 20대 초반에 씨알사상 공부한 것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습니다.

열락(悅樂)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전은 정신적, 도덕적 만족감에 이르는 기쁨이라고 풀어놓았습니다. 2천 년 전, 이스라엘 여리고 사람 바디매오나 300년 전, 조선 사람 심학규가 눈 떴을 때 가졌을 충격적인 기쁨을 상상해봅시다.

그들이 그 특별한 존재, 초인(超人) 앞에서 보였을 충일감(充溢感)과 외경심(畏敬心)을 생각하면 마냥 행복해집니다. 저만이 아니라, 지금 70 넘으신 선배들이나 세상 뜨신 1세대 제자들도 저의 ‘충격’과 별다르지 않은 ‘초월적 힘’을 입어 소경 신세를 면했을 것입니다.

3. 함석헌과 박종홍

제 또래는 물론, 저의 선배세대 가운데 정의롭고,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 뜨거웠으며, 연약자들에게 측은지심 넘치는 청년기를 보낸 사람들은 대부분 《사상계》나 《씨알의 소리》를 통하여 세례를 받고 ‘소경 눈 뜬 자’들이었습니다.

요즈음도 그때 감격적인 세례를 받았다고 고백하는 분들을 종종 만납니다. 그 소경들도 우리들처럼 눈 떴던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앉아계신 분들은 모두 마음속으로 소경 눈 뜬 처지로,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우정을 느끼며 마음속으로 이미 연대하고 있을 겁니다.

제가 어렸을 때, 1968년 12월5일, 박정희의 국민교육헌장이 선포되었습니다. 내남없이 달달 외웠습니다. 그거 외우지 않은 분들은 연세가 한참 위이거나, 한참 아래입니다. 그 국민교육헌장 선포기념식이 2002년까지 지속되었던 것을 확인하고 놀랐습니다.

박정희가 1979년에 죽었는데 말입니다. 전두환이 1987년까지 해먹었고, 노태우가 1992년까지, 김영삼이 1997년까지 했지요. 김대중 때 없애지 못한 것은 사실상 ‘적대적인’ TK지역 민심의 눈치를 본 탓이었을 겁니다. 노무현이 취임하자마자 없애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헌장은 1969년부터 1993년까지 초중고 교과서의 첫머리에 실려 있었습니다. 김영삼이 임기 2년차에 없앴습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그렇게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은 박정희가 종신집권을 위하여 쿠데타로 집권한 지 8년 만에 선포했습니다. 소위 유신이 1972년 10월에 선포되었으니, 헌장 선포는 그보다 4년 전이었습니다. ‘한일국교정상화’로 구데타 콤플렉스를 벗어나 자신감을 갖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읽어봤습니다. 시시했습니다. 모욕적이었습니다. 그 헌장의 초를 잡은 집필자는 서울대학 철학과 교수 박종홍(1903-1976)이었습니다. 안호상(1902-1999. 이승만 정권 초대 교육부 장관)도 거들었다고 합니다.

그 반철학적, 반인간적, 반인권적, 반민주적, 반문명적 문장을 만드는 일에 박종홍과 안호상 이외에도 30여 명, 검토요원으로 100명 정도의 교수들이 참여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반지성적입니까?

겨우 그 정도의 프로젝트(총391자)에 상상을 초월하는 비효율적 인해전술을 펼친 것입니다. 독재자의 특징입니다. 모택동의 주치의단은 300명이었고, 주은래 쪽은 100명이었습니다. 최후까지 최측근 주치의였던 이지수(李志绥. 1919-1995)의 <毛澤東의 私生活>에 나오는 증언입니다.

일제가 메이지 유신 때(1890년) 선포했던 천황 교육칙어(敎育勅語)는 1)천황에 대한 절대적 충성과 헌신을 요구하고, 2)효도, 우애, 준법정신 등 유교적 덕목을 강조하면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억압했으며, 3)학교에서 암기하고 낭독하게 하고, 일상에서 실천케 하여 천황제 국가에 맹종케 하는 것이 궁극적 목적이었습니다. 박정희의 교육헌장은 천황 교육칙어의 복제품이었습니다. 박정희도, 헌장도 참으로 갸륵한 아류였습니다.

박종홍은 우리 씨알공동체와 무관치 않은 인물입니다.

함석헌과 박종홍은 이북의 명문 평양고보(이하 평고)의 동기생이었습니다. 3·1만세운동 때 두 소년은 거리로 뛰쳐나갔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 모두 그 시절이라면, 당장 거리로 뛰쳐나가서 다치거나 죽거나 영웅적으로 살아남아 역사책에 실렸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함군’은 형식적인 반성문 몇 줄을 쓰면 복교시켜 주겠다는 학교의 방침을 거부했습니다. 퇴학당했습니다. ‘박군’은 학교로 돌아갔습니다. 그 후 두 사람은 각각 남하하여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갔습니다.

박종홍은 평고를 나와서 교사 임용시험에 합격하여 1921년 18세 나이에 전남 보성초, 대구 수창초, 대구고보 등에서 교사를 하다가 경성제국대학 철학과에 들어가서 공부하고 평생 교수로 일하다가 1968년에 정년퇴직하였습니다.

세상 떠날 때까지 박정희의 교육문화특보를 지냈습니다. 박정희는 박 교수가 과로로 거동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망가져서 출근하지 못하게 되자, 자신과 청와대 비서들에게 유선전화로 자문하도록 했습니다. 내일이면 폐계가 될 노계에게서 마지막 알을 빼먹으려는 지독한 주인을 연상케 합니다.

그는 일제 때는 “모두가 하나다”, 라며 황국신민 사상을 설파했고,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청의 도움으로 미국에서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 친미반공주의로 무장한 철학자로 우뚝 섰습니다. 1961년 5.16 군사정부의 국가재건위원회 사회분과 위원으로 임명되면서, 그의 위상은 더욱 대단해졌습니다.

아, 여기서 박종홍은 잘난 개인이자 독재권력에 부역한 지식인들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박정희와 함석헌의 대결을 설명할 때 지식인 박종홍은 매우 특별한 재료입니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


4. 함석헌의 길

함석헌은 평고를 자퇴하고 2년간 수리조합 사무원으로, 소학교 교사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대부분 그 대단한 명문학교로 돌아가는 길을 택할 겁니다. 스무 살도 안 된 청년이 부모는 물론, 학교와 교사들까지 모두가 원하는 길을 마다하고, 언제일지 알 수 없는 때를 기다리기로 결심한 것이 제게는 참으로 특별합니다.

그 가치는 그가 3·1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 못지않습니다. 그 선택에 대하여 용기보다 깊이가 먼저 느껴집니다. 그 고독한 시간 동안, 함석헌은 치열하게 하늘과 소통했다고 합니다.

그 속 깊은 청년이 1921년 사촌형 함석규 목사(1881-6.25 내전 때 납북 이후 사망연도를 알 수 없음)의 권유로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민족사학 오산학교(五山學校)로 편입했습니다. 오산은 함석헌을 낳은 모성이었습니다.

함석헌은 오산을 마치고, 동경고등사범학교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1924년에 입학, 1928년에 졸업하였습니다. 남강 이승훈은 함석헌이 편입해왔을 때 감옥에 있었습니다. 다석 유영모 교장이 면회 와서, 특별한 제자 이야기를 특별하게 보고했다고 합니다. 남강이 출옥하여 함석헌을 지켜본 시간은 7개월이었습니다. 남강은 둘째 아들을 미리 동경에 보내어 제자가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될 수 있는 여건을 갖추어 주었습니다.

아들은 친형처럼 6개월 동안 함께 지내며 일상이 안정되는 것을 보고 돌아왔다 합니다. 100년 전, 민초들 대부분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던 때, 어떤 어른은 특별한 제자를 이렇게 키웠습니다. 다석과 남강이 얼마나 위대한 스승입니까. 재학 중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1861-1930)의 성서연구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무교회주의 신앙서클을 조직하여 김교신(1901-1945), 송두용(1904-1986) 등과 기독교사상과 민족주의를 결합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1927년 동인지 《성서조선》 창간에 참여하여 식민지 조선의 역사왜곡을 비판하며 역사를 올바르게 알리는 글을 발표하였습니다.

1928년에 오산학교 교사로 돌아와서 10년간 역사를 가르쳤습니다. 오늘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원전이라고 할 수 있는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는 1934년 2월부터 1935년 12월까지 성서조선에 연재한 글을 바탕으로 쓰여진 것입니다.

33세에 쓰기 시작하여 34세에 그 불후의 거작을 탈고했다는 것은 우리 지성사에서 실로 놀랄 만한 사건이었습니다. 오산학교의 역사교사로서, 미래의 동량이 될 제자들에게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기 위하여 썼던 강의록이었습니다.

함석헌은 1938년에 오산학교를 떠났습니다. 조선어와 조선역사 교육을 못하게 하고, 일본말과 일본역사를 가르치도록 강요하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산을 떠난 함석헌은 학교 근처에 있던 송산농사학원을 인수하여 학생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공부도 하며 생활을 이어나갔습니다. 고당 조만식 선생의 뜻을 받드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1942년, ‘성서조선 사건’이 벌어집니다. 김교신의 글 <復活의 春>과 〈조와(弔蛙)〉를 문제삼았습니다. 특히 <조와>가 빌미를 주었습니다. ‘겨울잠을 자다 얼어죽은 개구리를 통하여 일제의 식민지 억압 속에서도 살아남아 희망을 이어가는 조선민중을 은유했다!’, 이렇게 어거지를 쓰면서, 일제는 《성서조선》을 폐간시켰습니다.

이 사건으로 김교신, 송두용, 함석헌은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넘게 감옥살이를 하였습니다. 막내딸 함은선이 1940년 생이니 이미 7남매의 가장이었습니다. 빈 쌀독을 바라보며 한숨지었을 부인과 철든 아들딸들의 우울한 표정들이 떠오릅니다.

함석헌은 출옥한 뒤 평생 농사 짓기로 결심했습니다. 농사 지으면 적어도 집안의 쌀독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기대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1945년 평북자치위원회 교육부장을 맡았는데, 소련군에 의하여 또 수감되었습니다. 해방되고 나서도 오산학교 학생들의 반정부 전단살포 사건으로 또 수감되었습니다.

1947년 3월, 자당께서 등을 떠밀어 남하했습니다. 곧바로 YMCA 일요집회에서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남쪽으로 내려오는 일부터, 오자마자 정착하는 일까지, 재정지원을 포함, 모든 것을 오산학교 후배이자 무교회 신앙공동체 운동의 동지인 최태사(1909~1989)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훗날 최태사는 함석헌의 신앙에 대해서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함석헌은 예수의 십자가 덕을 본다는 대속신앙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십자가를 지어야 한다, 며 자신의 삶 안에서 고난과 책임을 감수하는 실천적 신앙을 강조했습니다. 인간의 자주성, 인격성, 우주적 생명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함석헌은 과거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함석헌(오른쪽)과 장준하 선생.


1957년, 천안에서 씨알농장을 시작했습니다. 1958년 《사상계》 기고문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로 또다시 수감되었습니다. 1961년 《뜻으로 본 한국역사》 개정판이 나왔습니다. 1965년 한일회담 반대 단식투쟁을 했습니다.

1970년 4월 19일, 역사적인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였습니다. 연세 70에 모든 것을 쏟아부은‘ 구국의 저널리즘’이었습니다. 그 특별한 언론이 2호를 내고 폐간을 당합니다. 소송에서 이겨 1971년 8월호부터 복간되었습니다. 그 후 1980년 또다시 전두환에 의하여 강제 폐간되었다가 민주화 열기 속에서 1988년 12월 복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함석헌 전집(한길사. 전 20권)도 같은 해에 완간되었습니다.

1979년과 1985년, 두 차례 퀘이커회의 추천으로 노벨평화상 후보가 되었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평화대회 위원장을 맡았습니다. 1989년 2월 4일,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참으로 비범하고 위대한 생을 마쳤습니다.

5. 함석헌이 만난 창공의 성좌

함석헌은 오산에서 우리 민족의 사상사와 독립운동사의 거인들과 사제간으로 인연을 맺습니다.

다석 유영모(1890~1981) 선생을 가장 먼저 만났습니다. 학생과 교장이었습니다. 함석헌이 일생 동안 어느 자리에서든 ‘선생님’이라고 부른 대상은 다석이 유일합니다. 우리 공동체 사상의 핵심 개념인 씨알은 다석 선생이 유교 경전 《대학(大學)》 1장, ‘재명명덕 재친민 재지어지선(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에서 ‘在親民’의 ‘民’을 우리말로 바꾼 것입니다. 제자 함석헌이 '씨알'의 개념을 높고 깊고 넓게 진화시켰습니다.

11살 차이의 사제관계는 상하관계라기보다는 실제로 교학상장(敎學相長)하는 사이였습니다. “내 뒤에 오는 자가 나보다 앞선 자라, 내 뒤에 오는 이가 할 것입니다.” 다석이 제자 함석헌을 두고 한 말입니다. “내가 오산에 온 것은 함군 자넬 만나러 온 것”이라며 운명적 인연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 제자의 ‘실덕(失德)사건’으로 스승이 ‘도부동 무거래(道不同 無去來)’라, “가는 길이 다르면, 오고갈 일이 없다”며 사제간의 인연을 끊었습니다.

다석 1주기 추모자리에 참석한 제자는, “무조건 잘못되었으니, 용서를 구합니다. 제가 잘못이 많으나, 이만큼이라도 된 것도 모두 선생님을 만났기 때문”이라며 참회하였습니다. 다석은 인연을 끊고 나서도, “벗이여 갔는가. 오랜 벗이여 아주 갔는가. 다시 돌아올 길 없는가. 참으로 허전하다”, 하며 제자에 대한 그리움을 자신의 일기에 썼던 것이 훗날 밝혀졌습니다. 참으로 특별한 사제지간입니다.

남강 이승훈(1864~1930)은 1907년 평양 쾌재정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18세 소년 연사 도산 안창호(1878~1938)의 연설을 듣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감동으로 술 담배를 끊고 머리를 잘랐습니다. 남강은 도산보다 15살이나 많은 삼촌뻘이었습니다. 이후, 남강의 마음속에는 늘 도산이 큰 스승으로 들어앉아 있었습니다.

“나라가 없는데 내 집이 있으면 뭐하나. 혼을 빼앗겼는데 이 몸이 호의호식하면 뭐하나.” 늘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 마음으로 1907년 12월 오산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기독교 정신 아래, 다양한 교과목(수신 역사 지리 영어 산술 물리 생물 등)을 폭넓게 가르치며, 애국애족 정신으로 민족교육과 신교육을 펼치는 것이 오산교육의 핵심가치였습니다. 신민회의 민족운동 노선을 실천한 것입니다.

남강은 16살에 남의 가게 점원으로 들어가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이후 사업을 시작하여 지역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 재산을 모두 학교운영과 독립운동에 봉헌했습니다. 소위 ‘105인 사건’(1911년)은 일제가 서북지방의 유력인사들이 테라우치 총독 암살을 모의한다고 조작하여 민족지도자들을 대거 투옥한 사건입니다. 이 일로 남강은 유일하게 제주에 유배되었고, 2년 6개월간 옥살이를 했습니다.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은 당연히 최고형의 대상이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남강은 일제에 가장 당당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증언들이 다수입니다. 동지들은 그러한 남강을 정신적 지주로 존경했습니다.

가장 마지막에 출소한 것은 어떤 협박이나 회유도 단칼에 물리치는 남강의 강고한 자주독립의지 때문이었습니다. 함석헌은 《성서조선》에 “남강은 조선에서 가장 참된 사람”, 이라며 추모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춥고 외로운 겨울 방안에 등촉(燈燭)이 꺼진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남강이 없는 시대를 걱정했던 것입니다.

고당 조만식(1883~1950)은 함석헌이 오산으로 편입(1921년)하기 전 교장직을 사임했습니다. 선생은 1913년부터 지리 역사 영어를 가르치고, 1915년에 교장에 취임, 1919년 2월 독립운동에 헌신하기 위하여 오산을 떠났습니다. 평양으로 돌아가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던 중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습니다.

이후, 물산장려회를 조직하여 회장을 맡아 국산품 애용운동을 펼쳤습니다. 평양 YMCA 총무가 되어 지역사회의 지도자로 활동하며, 농촌계몽운동과 생활개선운동을 추진했습니다. 이러한 활동을 책임지고 펼치던 고당의 나이는 30대 중반이었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평안도 책임을 맡았으며, 몽양 여운형(1886~1947)의 남하(南下) 권유를 거부하고 4대강국의 신탁통치와 북쪽이 공산화되는 것을 막는 데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역부족이었습니다.

김일성은 6·25 내전 때, 눈엣가시 같았던 고당 조만식을 총살했습니다. 유엔군과 남쪽 병력이 북진할 때 그쪽 편을 들 것으로 의심한 것입니다. 열등감도 작용했습니다. 고당은 북한 인민대중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습니다. 김일성은 소련을 등에 업고 권력을 쥐었으나, 조만식을 협력자로 두지 못하면 정권도 흔들릴 정도였습니다. 늘 ‘선생님’으로 예우하면서, 소련사람들과 고당을 죽일 날만 기다렸던 것입니다. 김일성의 진면목이었습니다.

고당은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동지들이 경고하며 강하게 남행(南行)을 충고했으나, “나는 여기서 이 땅을 지키다 죽겠다”며 응하지 않았습니다. 함석헌은 “하나님은 해방 후 북한을 조만식에게 맡겼다”고 말했습니다. 스승 다석 유영모의 친구이기도 한 고당 선생을 진정한 민족지도자로 존경했습니다. “그는 어떤 큰 권력의 부당한 지시에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드문 사람”이라고 떠받들며 평생 본받았습니다.

도산 안창호(1878~1938)는 15살이나 많은 남강 이승훈의 스승이었습니다. 소년 지도자 도산의 연설을 듣고, 감명받아 거듭났던 것입니다. 그 이후 남강의 인생은 상술한 바, 그대로입니다.

“백성들은 사또가 좋은 정치를 베풀어 잘살게 해주기 바라지만, 관리들은 서로 싸움질이나 하고, 세금 거두어 배 터지게 먹기나 하니 나라꼴이 제대로 되겠는가. 백성의 안위를 책임지는 친위대장은 죄 없는 사람들 족쳐서 재물을 빼앗아 가니 장차 나라가 어찌 되겠는가.”

요즈음으로 치면 100만 명쯤 되는 군중이 소년 지도자 도산 안창호의 연설에 열광했습니다. 그 에너지는 그가 미국에 있든, 상해에 있든 그 어디에 있든 간에 도산을 추동하는 힘이었습니다. 그토록 강력한 기운을 가진 도산이 가장 높이 치는 가치는 정직과 성실이었습니다.

유학을 떠났던 젊은이가 미국 이민 1세대 교포들의 처참한 생활을 목격하고는 학업을 포기하고, 야만족 취급을 받고 있는 동포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도산은 곧바로 교포사회를 계몽하고 지도하는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각 가정을 방문하여 청소도 해주고, 눈 오면 가장 먼저 나와서 거리를 쓸고, 쓰레기 처리하는 일을 솔선수범했습니다. 동포사회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도산은 일제가 가장 경계하는 인물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4차례나 옥살이를 하고, 고문을 당했습니다. 마지막 투옥되었 때는 음식에 유리가루를 섞었다는 설이 나돌았습니다. 간경화, 폐렴, 만성기관지염, 위장병 등의 합병증으로 말할 힘조차 없었을 때, 두 가지 말을 남겼습니다.

첫째, 천황을 강력하게 규탄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 얘기를 회고조로 편하게 주고받지만, 그 당시 일제의 군인들이나 관헌들 앞에서 했던 그 발언은 경천동지할 큰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신성모독이었으니까요. 그 기백이 하늘을 찌릅니다. 보초병이 흉포한 젊은이였다면, 총을 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둘째, 상해 시절부터 부자관계처럼 끈끈한 사이로 지낸 비서이자 독립운동과 계몽운동의 혈맹동지 유상규(1887~1936)의 옆에 묻어달라는 말이었습니다. 그 유언대로, 1973년, 도산공원으로 이장할 때까지 두 사람은 망우리 공동묘지 바로 옆에 누워 있었습니다.

유상규는 그 후 현충원으로 이장했다고 합니다. 유상규는 경선의전(서울의대 전신) 출신의 외과의사로 독립운동에 참여했습니다. 환자에게서 감염되어 멀쩡하던 사람이 죽었습니다. 39살. 요절이었습니다. 그리고, 도산의 애기애타(愛己愛他)는 씨알사상의 자기주체성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6. 운명

함석헌이 평양에서 정주 오산학교로 갔을 때, 22살의 청년이었습니다. 1남1녀의 자녀를 둔 가장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미 다석 유영모, 남강 이승훈, 고당 조만식, 도산 안창호 등이 저 높은 창공에 성좌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제자는 그 거인들과 직접, 간접으로 인연 지어진 이후, 이 땅 어느 곳에서도, 그 누구로부터도 얻기 어려운 가르침과 배움, 그리고 깨달음을 이어갔습니다. 그 결과, 너무나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제자도 성좌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한편, 교명(校名)이 오산(五山)이어서 학교를 둘러싸고 있는 다섯 산이 있을 것 같아 찾아봤습니다. 다섯 산은 남산(南山), 천주산(天柱山), 제석산(帝釋山), 황성산(荒城山), 연산(䳣山)이었습니다. 학교이름과 다섯산, 그리고 네 분의 큰 스승들과의 제자의 운명적 관계를 종합하면 함석헌과 오산의 관계는 더욱 놀랍습니다. 제자는 네분 거인들의 가르침을 받고 하늘로 날아오른 솔개(䳣山)였던 것입니다. 오산으로 편입한 것은 하늘의 인도였습니다.

가정이지만, 함석헌이 부모의 소망대로, 평고로 돌아가고 이후 경성의전을 다녔으면, 박종홍과 다정하게 지내며 박정희의 주치의를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을 하게 됩니다.

7.《씨알의 소리》저널리즘

1) 《사상계》 폐간

1970년 《사상계》 5월호는 우리나라 언론사에서 잊을 수 없는 역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박정희 독재정권이 김지하의 시 〈오적(五賊)〉을 게재한 것을 문제삼아 발행인과 편집인을 구속하고, 《사상계》를 폐간했기 때문입니다. 박정희에게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쓴소리를 도맡아 해온 장준하와 《사상계》에 대한 야비한 보복이었습니다.

장준하는 일제와 목숨 걸고 싸운 광복군 출신으로서, 일제의 만주군관학교 출신 일본군 장교로서 독립군을 사냥하던 박정희를 향하여,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대통령이 될 수 있지만, 박정희만은 예외다”, 라고 외치며 항상 반독재 투쟁의 선봉에 서 있었습니다. 그 강경한 신념과 태도는 《사상계》에 고스란히 반영되었고, 끝내 폐간된 것입니다. 장준하는 그로부터 정확히 5년 뒤, 1975년 8월 17일, 박정희의 하청을 받은 K의 테러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난 4월10일, 《사상계》가 55년 만에 복간되었습니다. 잘되기를 기원합니다.

▲씨ᄋᆞᆯ의소리 창간호 표지.


2) 《씨알의 소리》 창간

《씨알의 소리》는 박정희 독재정권이 《사상계》에 가하는 폭압으로 위축되는 상황에서, 70 노인 함석헌이 그야말로 ‘모든 것을 걸고’ 창간했습니다. 모든 것 가운데 목숨이 1번이었습니다. 1970년 4월 19일이었습니다.

이 특별한 날짜를 창간일로 잡은 것에서 우리는 그 10년 전, 그날의 순수성과 혁명성, 그 가치를 승계하려는 엄숙함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할 말은 하자”는 결의는 사실상 죽음을 각오하고 벌인 일이라는 뜻입니다.

창간사, 〈나는 왜 《씨알의 소리》를 내나?〉는 200자 원고지 70매가 넘는 큰 문장입니다. ‘함석헌 저널리즘’입니다.

“신문이 무엇입니까? 씨알의 눈이요, 입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씨알들이 마땅히 알아야 할 것들 가리고, 보여주지 않고, 씨알들이 하고 싶어 못 견디는 일을 입을 막고 못하게 합니다. 정부가 강도의 소굴이 되고, 학교 교회 극장 방송국이 다 강도의 앞잡이가 되더라도 신문만 살아있으면 걱정 없습니다.

사실, 옛날 예수 석가 공자의 섰던 자리에 오늘의 신문이 서 있습니다. 오늘의 종교는 신문입니다. 신문이 민중을 깨우고 일으키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민중이 정말 깨면 정치강도 무리 집어치우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50년 넘게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언론환경이 특히 그 규모와 다양성 측면에서 너무나 심하게 바뀌었습니다. 그 결과, 신문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윗글을 ‘뜻으로 보고 읽으면’ 단순명쾌합니다. ‘언론이 바로 서야만 진정으로 살기 좋은 나라가 된다.’ 바로 그 말입니다.

얼핏 보면, 참으로 순진무구한 소년의 꿈처럼 읽힙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그 청정한 정신의 소유자만이 목숨을 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는 낭만파 노인의 객기가 아니라, 그 미덕이 유일한 대항력이라는 뜻입니다. 그 외에는 어느 누가, 어떤 모습으로 대치하든 곧 무릎 끓습니다. 만고의 진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무도한 독재자도 군주민수(君舟民水:임금은 조각배, 백성은 강물이니, 나쁜 정치를 하면 씨알들이 배를 전복시킨다는 뜻)의 진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씨알들의 눈치를 봅니다.

그 대표적 사례가 윤석열이 출근시간에는 빈차를 보내고, 술 깬 뒤에 씨알들 눈을 피하여 몰래 사무실에 나가는 짓을 지속한 것입니다. 포악무도한 자도 씨알들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씨알의 소리》 창간 55주년을 맞아 이 땅의 모든 언론사, 대학의 언론학도들, 연구자와 교수들이 ‘씨알의 소리’ 창간사를 읽고 깨우치는 바 있기를 기대합니다. 똑똑한 사람들이 비판도 할 것입니다. 환영합니다. 거부감을 느끼는 신세대도 있을 것입니다. 그 비평을 회피하지 않을 것입니다.

보수적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비판적일 것입니다. 우리는 고마워할 것입니다. 저하고 생각이 같은 지식인들도 적잖이 있을 것이며, 소셜 미디어에서 활동하는 재야 지식인들도 그 논쟁에 합류하여 특급 저널리즘의 뿌리를 추적하면서 상상력을 높이고, 이 시대에 딱 들어맞는 고품격 저널리즘을 위한 해결책의 근거로 삼을 것입니다.

이처럼 다양한 소통으로 인하여 ‘함석헌 저널리즘’에 더 좋은 의견과 통찰이 얹혀질 것입니다. 그로써 고품격 저널리즘, 정론직필의 정통 저널리즘이 회복되는 전기를 마련하는 것이 우리의 꿈입니다. 그 일이 얼마나 시급하고 절실하고 간절한 사회적 과제인가를 환기시키는 운동으로 발전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 사명이 우리 제자된 사람들에게 지워진 소임이 아닐까 합니다.

3) 대한민국 저널리즘의 실상

(1)기레기 저널리즘

《씨알의 소리》 저널리즘’(‘함석헌 저널리즘’)의 대칭점에 대명천지 21세기 대한민국의 저널리즘을 가장 적확하게 통찰한 ‘기레기’가 있습니다. 그 특별한 개념의 지적 소유권자는 씨알들입니다. 기자+쓰레기=기레기!

저는 기레기와 그것들이 모여서 비굴하고 사악한 상술로 생산한 결과물을 세상과 거래하는 언론계 전체를 뭉뚱그려서 ‘기레기산업’이라고 정의합니다. 2022년 9월 7일.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신조어로 올라갔습니다. 스펠링은‘giregi’입니다.

이 나라 기자들과 언론계가 이토록 모욕적이고 부끄러운 사태를 말기암과 같은 중환을 선고받은 것으로 여겼다면, 그래서 후속으로 총체적 혁파(革罷)의 계기로 삼았다면, 우리 사회는 분명히 지금도 위대한 숙정(肅正)의 과정에 있을 것입니다. 그랬어야 합니다.

그러나, 기자협회 등 소수 언론단체의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상투적이고 일회적인 대꾸가 전부였습니다. 낱개의 기자들은 집단과 산업에 대한 멸칭이지 ‘나’를 호칭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합니다. 그래서 속이 편한 겁니다. 어느 기자가 심하게 화를 냈다거나, 사표를 던졌다는 얘기를 들은 적 없습니다.

참으로 추레하고, 시시합니다. 그래서 ‘기레기’입니다. “비교적 양질이 10%는 되지 않을까?”, 이렇게 말했다가 합석했던 친구들로부터 심한 지청구를 들었습니다. “잘해야 1%쯤일 것이다.” 실은 10이 1의 열 배가 아닙니다. 치유불능의 말기암이라는 뜻에서 1과 10은 동의어입니다.

우리가 늘 다니는 길에 치우지 않은 온갖 쓰레기들이 쏟아진 채 그대로 널려 있다면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기레기들의 작태는 그보다 백 배 천 배 악성입니다. 펜으로 세상을 속이고,그로써 두 종류의 사익(私益,社益)을 취합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에 독극물을 쉬지 않고 살포하거나 방출합니다. 길바닥만이 아니라, 천지사방을 모조리 오염시킵니다.

(2) ‘사악하고 낡은 체제’의 진상

우리가 아는 유력 언론사들 대부분은 우리가 모르는 자회사와 관계사들을 수십 개씩 가지고 있습니다. 그냥 신문 팔고 광고협찬만 받아서 호의호식하며 거들먹거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자들이 취재하다가 돈이 될 것 같으면 기사 쓰지 않고 주인에게 보고합니다. 그러면 소액 자본금으로 설립한 왕초 지분 100%짜리 회사가 생깁니다. 기자가 사장으로 자리를 옮겨 영업을 합니다. 이 창업방식은 여러 경우들 가운데 한 종류에 불과합니다.

지방으로 내려갈수록, 언론사의 경영난은 일상입니다. 예외가 일부 있기는 하겠지만, 이 산업의 본질은 펜을 칼처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언론자유라는 헌법적 가치가 이 시대에 그토록 천박하고 옳지 않은 방식의 돈벌이를 돕고 있는 것입니다.

90년대까지만 해도, 적어도 10대 일간지 정도에서는 기자가 광고를 따오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편집국에서 광고국으로 발령나면, 사표를 냈습니다. 마감시간까지 광고국이 표4(맨 뒷면 전면광고)를 막지 못하면, 경제부장이 10대 그룹 가운데 한 곳의 홍보책임자에게 전화를 합니다. 그러면 ‘10초 만에’ 거래가 완료됩니다. 머지않아 떳떳치 못한 방식으로 은혜를 갚아야 합니다.

기자가 광고영업을 하는 매체가 2000년대 이전에는 드물었습니다. 축에도 끼지 못하던 3류 매체(실제로는 5류)들이 대놓고 광고영업에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하여 형편이 좋아지자 거의 모든 매체들이 앞다투어 제도화했습니다. 수당 지불과 승진에 반영합니다. 예외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됩니다.

저는 그 현상을 한손으로 기사(약점)를 쓰면서(pen), 다른 손에는 칼(knife)을 쥐고 필요에 따라 흉포하게 휘두르며 사익을 추구하는 무장강도짓이라고 부릅니다. 사전에 아직 ‘penknifer’라는 단어는 없습니다만, 제가 ‘giregi’의 영어표현으로 적절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이번 칼럼에서부터 쓰려고 합니다.

영어로 ‘penknife’는 우리가 흔히 보는 스위스 육군 주머니칼 같은 크기로 손에 쥘 수 있는 도구를 말합니다. 제4부 권력인 언론이 공동선(pen으로 정론직필의 정의로운 기사를 쓰는 일)을 수행한답시고 가장 먼저 흉기를 들고 발호(跋扈)하며 사익을 취하는 조폭산업의 일원이 된 것입니다. 특히 사랑하는 우리나라, 대한민국에서 부끄러움 없이 노골화하고 통제불능으로 약동하는 중입니다. 영국인들은 그 의미심장한 낱말에 아직 정치사회적 의미를 얹어주지 못했습니다.

한국의 기레기산업은 이처럼 “돈은 성실한 노동으로 버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위선(僞善)과 탐욕과 포악성, 후안무치와 비굴과 맘모니즘을 에너지로 하여 버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는 일타강사입니다.

(3) ‘함석헌 저널리즘’, ‘리영희 저널리즘’

말기암 환자를 살리는 것보다 100배 또는 1000배 고난도 과제인 기레기 시대의 종식을 위하여 희망적인 해결책이 등장했습니다. 자존심 높고, 양식 있는 자들로서, 처자식에게 덜 부끄러운 기자로 살고 싶은 소수가 《씨알의 소리》 창간정신을 귀감 삼아 정론직필 저널리즘 노선으로 가는 것입니다.

‘리영희 저널리즘’을 표방하며 크게 성공한〈뉴스타파〉의 사례를 주목합니다. 지하 1층 대회의실 이름을 ‘리영희홀’로 부릅니다. 리영희 재단의 주요행사들을 그곳에서 합니다. 이 매체는 기업과 정치권의 갑질로부터 100% 자유롭습니다. 2012년 1월, 해직기자들과 자존심과 ‘곤조’가 쎈 여러 언론사의 기자들이 뭉쳐 출범했습니다. 창립 13년차입니다.

기업의 광고와 협찬 없이, 오직 개인후원자들의 월1~2만 원 십시일반 후원금이 매월 4억 원 이상 들어온다고 합니다. 기자들의 자존감은 최고입니다. 보수와 복지 등 대우 또한 종합적으로 유력매체들과 비교하여 별로 꿀리지 않는 언론사로 우뚝 섰습니다. 지금 계엄정국에서 뉴스타파 기자들이 보여주는 성취들은 감동적입니다. 이는 마치 조난당한 조각배에 타고 있는 씨알들 앞에 나타난 등대와 같습니다.

그들은 충무로에 사옥도 마련했습니다. 출범한 지 7년 만이었습니다. 인터넷매체 부문에서 언론신뢰지수1, 2위에 올라 있습니다. 경쟁사 〈오마이뉴스〉는 2000년에 창립되었습니다. 시간이 더 지나면, 〈뉴스타파〉가 1위로 굳어지거나, 선의의 경쟁에서 앞선 또 다른 후발주자들 가운데 하나가 1위가 될 것입니다. 이는 혁명의 조짐입니다. 비굴하고 사악한 한국언론, 더럽고 부끄러운 ‘기레기 산업’은 이미 이런 시도들이 하나씩 성공하면서 균열이 나고 있습니다. 그 위대한 힘은 《씨알의 소리》 창간정신이 시원(始原)입니다.

(4) ‘절도 저널리즘’

이 저질산업의 수준이 온 세상에 알려진 상징적인 뉴스가 있었습니다. 뉴스 보도로 알려진 것은 2021년입니다만, 발행부수를 과대보고하여 정부 지원을 더 받아가던 도둑질 관행은 최소 30년쯤 되었습니다. 정부의 언론통제 기술들 가운데 하나로 시작된 나쁜 관행입니다. 인쇄하자마자 포장도 뜯지 않은 상태로 폐지로 수출하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개망신을 당했습니다.

이는 기자들과 언론사 경영진이 자신의 노동으로 만든 제품을 쓰레기로 여기는 처사입니다. 그 자세가 스스로를 기레기로 여기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자기멸시는 지금까지 시정되지 않고 지속되고 있습니다. 기레기들과 그 산업은 저널리즘의 문제가 아니라, ‘폐지유통에 관한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쓰레기나 다름없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렇게 유통되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는 것입니다. 이 흉측한 사태의 본질은 사기절도입니다. 한겨레신문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나마 그 ‘비적떼’ 가운데 유일하게 사과하고 그 짓을 멈추었습니다.

(5) ‘매춘저널리즘’

그래서 이 산업은 그런 점에서 매춘업과 속성이 똑같습니다. 돈을 위해서는 무슨 짓도 합니다. 기사의 침소봉대와 봉대침소는 기레기들의 일상입니다. 큰 사건을 마치 없던 일로 할 수도 있습니다. 굴욕적인 거래를 하면서, 저널리즘 윤리는 어느 쪽 누구의 머릿속에도 없습니다. 기자가 받아먹는 촌지(寸志)와 매체에 배정할 광고와 협찬의 액수만 유의미합니다. 술/골프/해외여행/연수는 접대라는 점에서 사촌간입니다.

정치인과 고위관료도 때로는 발주자로, 때로는 거창한 향응과 두터운 뇌물의 대상으로 암약합니다. 유력언론사의 사장이 말했습니다.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촌지가1/10로 줄었다.”, “100만 원 담긴 봉투 받았다가 준 놈이 인터넷에 올리면 망신당하고, 중징계를 받으면, 짤릴 수도 있으니 다들 조심한다.”, “그래도 오랫동안 거래하여 신뢰가 쌓인 회장이나 정치인들 돈은 받는다.” 그렇게 받아먹기만 하지는 않을 겁니다. 소금물을 먹으면 물을 키게 되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그래서 ‘매춘 저널리즘(prostitution journalism)’이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영국 미국에서는 19세기 말, 한국에서는 20세기말(1980년 10월), 한국외대 신방과 정진석 교수(1939~ )가 《신문연구》에 쓴 논문에서 처음으로 등장했습니다. 1990년대 말부터는 많은 용례들이 있습니다. 언론이 날이 갈수록 더욱 심각하게 타락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도 전두환의 죄악이 가장 컸습니다.

(6) 군계일학

이상은 제가 직접 겪은 기레기들의 역겨운 작태들 가운데 1/100도 안 되는 정도입니다. 오늘은 제가 마음속에 오랫동안 담고 있던 ‘기레기떼’ 가운데 군계일학 같은 두 기자의 실명을 밝히려 합니다. 제 또랩니다. 둘 다 은퇴자들입니다.

한 사람은 sbs의 환경전문기자 출신 박수택 선생입니다. 그가 동경 특파원 시절, 당시 제가 다니던 회사의 회장이 동경에서 우리나라 특파원들 불러놓고 대형 프로젝트를 발표한 뒤, 식사대접하고 나서 홍보자료 담긴 대봉투를 돌렸습니다. 그 안에 두툼한 돈봉투도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다음 날, 바로 회사 홍보담당을 불러 돌려주었습니다.

또 다른 기자는 《한겨레신문》 경제부 기자였던 신현만 선생입니다. 그 일을 잊을 수 없습니다. 특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두 기자 말고도 유사사례는 여럿 있을 겁니다. 그들에게도 경의를 표합니다.

또 한 그룹이 있습니다.

《씨알의 소리》 2호(1970년 5월호)를 정독한 박정희 정권은 한마디 협의도 없이 폐간을 명했습니다. 당연히 소송을 걸었습니다. 1년 넘게 진행된 소송의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1971년 7월 6일이었습니다. 대법원이 진시황 같은 박정희를 향하여, “당신, 너무 지나치오!”, 라며 만장일치로 복간을 명했습니다. 그 최종심에 참여한 대법관을 명단을 공개합니다.

재판장 김치걸(1909-2004), 판사 사광욱(1909-1983), 판사 홍남표(1916~1975), 판사 김영제(1915-1979), 판사 양병호(1918-2005) 선생이었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위인들이며, 소중한 역사의 한 페이지입니다.

4) 《씨알의 소리》가 나아갈 길

투자시장에 ‘검은 천사’(black angel)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천사의 옷을 입고, 가난한 벤처기업가들에게 돈을 대주면서 나중에 기술이나 회사를 빼앗아가는 악성 자본가를 말합니다. 중세시대에는 타락한 천사를 일컬었다고 합니다. 이 시대는 사실상 그들이 모든 분야를 주도하고 지배합니다. 이 현상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화되고 악화될 것입니다.

이 지옥에서 살아남을 유일한 길은 칼 야스퍼스(1883-1969)가 말한 ‘기축시대’의 정신문화를 기풍삼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 길 역시 진실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맹자(孟子)의 4단(仁義禮智/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惻隱之心 羞惡之心 辭讓之心 是非之心)), 즉 인의예지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공자 석가 소크라테스 예수의 가르침이라고 해도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이 가치관이 《씨알의 소리》가 나아갈 길이며, 우리 씨알공동체와 그 뜻을 함께하는 족속의 정신이라면 어떨까요? 그 정신에 부합하는 생각과 말과 행동이 우리들 실존의 일부이며 사명이라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일 ‘조중동’이 사운을 걸고〈뉴스타파〉와 오마이뉴스, 시민언론 《민들레》처럼, 소망컨대 그 이상으로 정통 저널리즘을 추구하겠다고 선언하고 실천한다면, 우리는 단기간에 이 우울하고 분통 터지는 일상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지옥을 벗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개과천선(改過遷善) 비율이 100이면, 우리나라는 1년 안에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가 됩니다. 1,000% 확신합니다.

함석헌 선생이 순진무구한 소년처럼, ‘신문이 이 시대의 종교’라고 단언한 것은, 50년 후를 내다본 예언이었습니다. 무시할 수도, 죽일 수도 없는 상대 아닙니까? 차기 정부 책임자가 성공하려면 그 ‘밤의 대통령’들과 세기의 딜을 청하여 성공하면 됩니다. 저라면 그 큰 협상을 하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희망적으로 말합니다만, 저널리즘을 위시하여, 흡족하고 듬직한 고품격의 문명현상들이 마치 맑은 공기처럼, 푸른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90입니다. 99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 하여, 포기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