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지승룡(목사, 전 민들레영토 대표)

 

김일성 아버지 김형직의 신앙은 조국 독립을 위한 것

김형직 투옥후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8개월 뒤 사망

아내 강반석에 손정도 목사에 김일성 신앙지도 유언

빌그레함 목사 평양방문, 김일성 집안 기독교와 인연

▲ 김일성 부친, 김형직.
▲ 김일성 부친, 김형직.

 

일산에 연세대 삼애캠퍼스가 있다. 하나님 사랑 농민사람, 농민사랑에 온 힘을 다한 독립운동가 배민수 목사(1896~1968) 유가족이 5만5천 평을 연세대에 기증해서 만들어졌다.

배민수가 20살 때인 1913년 여름 어느 일요일이었다. 늘 그러하듯 뜻을 깊이 나누는 동지들과 독립과 신앙을 위해 깊이 기도를 마쳤는데 김형직 동지에게 뜻밖에 제안을 듣는다.

"우리 오는 혈서를 씁시다" 이 말을 듣자마자 그 자리에서 배민수가 동의하고 노덕순과 장일환도 동의하였다. 김형직(1986~1926)부터 준비한 칼을 들어 손을 베어 <대한독립>이라고 쓰기 시작하고 이들은 조국과 신앙을 위해 목숨을 던지기로 다짐한다.

이들은 이승만의 외교전을 반대하고 무장투쟁을 지향하는 청년들이 만든 조선국민회의 활동도 겸한다. 이 단체는 후에 발각되어 장일환은 구속되어 고문을 받다 두 달만에 옥사를 하고 김형직도 십 개월 옥에 있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1926년 사망을 한다.

김형직은 사망 직전 유언을 아내 강반석에게 아들 김성주가 (후에 김일성으로 개명) 손정도 목사에게 신앙지도를 받고 두루 도움을 받으라고 한다.

이문세의 광화문연가에 '눈 덮인 작은 교회당'이란 가사는 정동제일교회 구건물이다. 이 교회 6대 목사였던 분이 손정도로 이후 그는 평양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한다.

김형직의 아버지 김보현은 농민투쟁을 하다가 병사하였고 김형직은 그때 넬슨 벨 선교사의 감화를 받아 신앙심을 키우고 애국심을 고양시킨다.

그는 목사를 준비하기 위해 평양 숭실중학교를 마치는데 신앙심 좋은 김형직은 넬슨 벨이 주는 용돈을 모두 헌금한다.

이런 그를 좋게 본 넬슨 벨 선교사는 중매를 서는데 칠곡교회 장로인 강돈욱의 둘째 딸인 강신희(후에 강반석으로 개명)를 소개하는데 이때 김형직은 16살 강반석은 18살이었다.

강반석은 (1892~1932) 권사였고 그의 동생 강신석은 목사였고 아버지 강돈욱은 장로로 있다가 목사가 되었고 칠곡교회를 맡았다. 6촌 동생 강량옥 목사는 김일성의 신앙지도를 했다.

특이한 것은 이 김형직과 강반석을 중매한 넬슨 벨의 딸은 평양에서 의학을 공부하는데 그녀와 결혼한 사람이 바로 빌 리그에 함 목사이다. 빌 리그에 함 목사가 1992년, 1994년 북을 방문하고 김일성 주석이 평양에서 부흥회를 허락하고 빌 리그에 함과 깊은 이야기를 나눈 것은 이런 연유이고 그가 북과 오랜 소통을 한 이유도 이런 과거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옛날 양 가정이 이렇게 일찍 기독교 신앙을 갖고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는 것은 특별한 섭리가 있지 않을까? 김일성 주석은 청년 시절까지 교회 청년회 활동을 하며 장기려 박사랑 기도를 즐기고 조기철 목사를 존경하고 오정모 사모에게 지원도 했다.

훗날 미국과 일본이 조약을 맺고 기독교가 독립운동을 반대하며 친일적인 기독교가 될 때, 즉 사명을 잃어버린 기독교가 될 때 이 오랜 단절이 주는 아픔을 우리가 받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