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종성(바른역사알기운동 대표)
정종의 빚진 마음은 성실한 국정 챙김으로 이어져
“삼한(=남북국)통일”은 왕건 선대의 염원
정종과 왕식렴은 북진을 위하여 서경천도 추진
왕요와 왕식렴의 정변은 명분과 정당성이 취약했다. 혜종은 태조왕건의 장자로써 공식적으로 정윤(正胤)에 책봉되고, 오래도록 후계자의 위(位)에 있으면서, 부황(父皇)을 도와 후삼국통일을 이루는데 공훈까지 지닌 제왕이였기에, 이러한 형황(兄皇)을 내몰고 황위를 찬탈한 일은 당시 민심이 쉽게 용납하지 못했다.
그래서 정종정권은 사실관계를 변개하며, 정변의 정당성을 선전하였고, 역사의 기록마저 윤색했던 것이다. 그들은 혜종을 보위해야 할 책무를 지녔던 고명대신 왕규를 혜종의 정적으로 둔갑시키는 한편, 오히려 자신들이 혜종을 보위하려 한 것처럼 꾸몄다.
당시 왕규는 태조에게는 두 명의 딸을, 혜종에게는 한 명의 딸을 후비(后妃)로 바친 황제의 장인이였고, 혜종(惠宗) 정권 하에서 정국의 주도권을 이미 행사하고 있었기에, 혜종을 배반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따라서 사료의 기록 그대로 "왕규의 난"이 아니라, 실상은 "왕요와 왕식렴의 정변"이였던 것이다.
정종(定宗)이 즉위한 후에 민심이 쉽게 가라앉지 않고 흉흉하자, 정변 과정의 사실관계를 뒤바꾼 정보를 유포하는 일 외에도, 정종의 정통성을 확립하고자 다각도로 노력을 기울였다. 즉위 원년을 맞아 태조의 현릉을 참배하려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정종은 신이(神異)한 체험을 했다고 한다.
'원년(946) 봄 정월 왕이 장차 현릉(顯陵)을 배알(拜謁)하려고 재계(齋戒)하고 있던 날 저녁에, 어전(御殿)의 동쪽 산 소나무 사이에서 왕의 이름을 부르면서 “너 왕요(王堯)는 백성을 가엾게 여겨 구휼(救恤)하는 것이 임금의 중요한 일이다.”라고 하는 것 같은 소리를 들었다' <고려사 혜종일대기>
이 기록을 보면 마치 태조왕건의 혼령이 나타나 정종의 즉위를 승인하며, 왕도(王道)를 가르친 것처럼 느껴진다. 이런 주관적인 신비 체험까지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될만큼 민심의 동요가 컸던 것이다.
▲출처. SBS드라마 ‘달의 여인’, 정종 왕요는 정변 과정에서 형황과 신료들을 참살한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내적갈등을 겪다가 건강이 나빠졌고, 황권이 뒷받침되지 않는 상황에서 성급히 서경 천도를 추진하다가 민심을 잃고, 재위4년, 향년 27세로 붕어하고 만다.
정종은 두려움이 많고, 종교심이 깊은 인물이였던지라, 찬위(簒位)의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살상한 것에 대하여 죄책감을 지녔다. 그래서 단순한 기상의 변화에도 그는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는데, 즉위년에 뇌성이 울리자 자신의 잘못에 대한 경고로 여겨 사면령을 내렸고, 자신의 죄업을 참회하려는 의미에서 종교적 고행과 희사(喜捨)를 마다하지 않았다.
'왕이 의장(儀杖)을 갖추고, 불사리(佛舍利)를 받들고 걸어서 10리 떨어진 개국사(開國寺)에 이르러 봉안(奉安)하였다. 또 곡식 70,000석을 여러 큰 사원(寺院)에 바치고, 각각 불명경보(佛名經寶)와 광학보(廣學寶)를 두어 불법(佛法) 배우는 자들을 장려하였다'<고려사 정종일대기>
이렇게 불도에 귀의(歸依)하는 행위에도 불구하고, 자책으로 인한 내적갈등은 쉽게 해소되지 못했다. 한번은 동여진의 소보개가 공물을 바치며 조회하려 왔을때, 인견하는 장소에 갑자기 비가 내리고 번개가 관원들과 전각의 서쪽 모퉁이를 내리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이것을 보고 크게 놀란 나머지 병을 얻고 말았다.
현대인의 시각에서 이러한 자연현상은 대수롭지 않은 것이나, 전근대인의 시각에서 보자면 자연의 재이(災異)는 천명과 관련된 징후로 해석되었기에 천덕전 벼락사건은 가뜩이나 죄의식에 시달리고 있던 정종에게 심신을 타격하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고려후기 이제현은 ‘(정종이) 하늘의 책망을 만나자 상심하여 병이 나게 되었다’고 진단하고 있다.
정종은 보위에 오른 후 태조에 대한 미안한 심정과 혜종에 대한 빚진 마음으로 인하여 항상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열심히 정무에 임했다고 한다. 최승로의 증언에 따르면 '정종은 임금의 형제로 왕위를 계승하시고 밤낮으로 부지런히 노력하시어, 나라 다스리는 도리를 정밀하게 구하셨습니다. 때로는 촛불을 밝혀가며 조정의 선비를 접견하셨고, 또 어떤 때는 정사에 바빠서 늦게 식사하면서까지 모든 정사를 듣고 결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즉위 초에는 사람들이 모두 서로 기뻐하였습니다'<고려사 최승로열전>
그는 스스로를 다그치며 신민들에게 성실한 군주의 상을 심어주려고 애썼고, 치적(治積)을 통해 자신이 제왕(帝王)이 되어야만 하는 이유를 증명해 보이려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에 힘입어 조금씩 민심을 얻어가며 정국을 안정시켜 나갔다.
하지만 이러한 안정도 오래가지 못했으니, 섣불리 서경천도 계획을 발표하게 되면서 정변 과정에서 연대 했던 세력들 사이에 갈등이 촉발되었고, 내부적으로 분열하게 된다. 잠저(潛邸)때부터 정종을 후원하던 세력은 왕식렴의 서경세력 뿐만 아니라, 외가(外家)인 유긍달의 충주가(忠州家), 처가(妻家)인 후백제 진훤(甄萱)의 부마였다가 두 딸을 정종에게 바친 박영규의 승평가(昇平家 순천), 김긍률의 청주가(淸州家), 그리고 박수경의 평주가(平州家)와 매형이 되는 경순왕 김부를 필두로 하는 구신라계(舊新羅系) 등이었다.
이 당시 황권이 호족들을 압도할만큼 강하지 못한 상황이였기에, 천도(遷都)라는 중대사를 두고 공론의 과정을 충분히 거쳐 제(諸)세력의 동의를 순차적으로 얻어가야 했으나, 정종과 왕식렴은 일방적으로 뭔가에 쫓기듯 천도 계획을 발표하고, 무리하게 인력을 동원하고, 공역을 다그치면서 큰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서경천도(西京遷都)는 정종의 전적인 뜻이라기 보다는 정국을 주도하고 있던 왕식렴(王式廉)의 의지가 크게 작용한 것이다. 왕식렴은 정종에게 서경천도를 강권했고, 정종은 그의 도움으로 황위를 얻었기에 그가 내미는 서경천도라는 청구서를 외면할 수 없었다. 왕식렴은 도참설(圖讖說)을 내세워 서경의 지세(地勢)가 성(盛)하니 도읍을 서경으로 옮겨야 왕업이 흥왕하고, 태조께서 추진하던 북진을 온전히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호족들로 하여금 천도를 결의하도록 강요했다.
왕식렴은 일찍이 태조왕건의 명을 받아 평양을 재건하는데 진력했고, 서경(西京)을 다스리며 고토수복에 큰 뜻을 둔 인물이였다. <고려사> 그의 열전에 따르면 '왕식렴은 오래도록 평양을 다스렸고, 항상 사직(社稷)을 지켰으며, 영토[封疆]를 개척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다'라고 한다.
▲왕식렴은 왕륭의 동생 왕평달의 아들로 태조왕건의 사촌동생이었다. 그는 정변을 통해 정종을 추대하였고, 서경 천도를 추진하여 ‘삼한(=남북국)’의 고토를 수복하고자 했다. 하지만 천도반대파들이 결집하여 일으킨 ‘왕소의 정변’에 의해 실각된 듯 보인다.
이러한 그였기에 정변 후 정국을 주도하게 되면서, 조속히 자신의 근거지로 천도하여, 보다 더 적극적으로 북진(北進)을 단행하여 고토를 수복하고자 했다. 정종과 왕식렴은 이러한 대업을 성취하는 일이야말로 정변의 정당성을 인정받는 지름길이요. 훗날 열성조(列聖朝)를 지하에서 뵈올 낯이 있을 것으로 여겼을 터이다.
태조왕건은 후삼국을 수습하는데 바빠 고토 수복은 미완으로 남긴체 붕어(崩御)하고 말았다. 그래서 정종과 왕식렴은 태조의 유지를 받들어 자신들이 그 일을 이루어내기를 원했다. 고려 황실의 선대(先代)는 누대에 걸쳐 단순히 후삼국통일을 꿈꾼 것이 아니였다.
왕건의 조상인 호경(虎景)은 고구려유민으로써 직간접적으로 대진(大振 발해)과도 인연이 있었고, 그의 후손인 강충(康忠)과 보육(寶育), 보육의 딸 진의(辰義)의 설화를 보면 이들은 대신라의 안정된 시기에 살면서도 "삼한통일(三韓統一)"을 꿈꾸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삼한”은 후삼국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대진(大振)을 포함한 남북국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사실은 왕건의 부친인 왕륭(王隆)의 발언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그는 궁예를 만나 '조선(朝鮮 요동), 숙신(肅愼 대진[발해]), 변한(卞韓 신라)의 왕'이 될 수 있는 방책을 논하면서 남북국의 통일을 얘기한다.
이러한 생각은 왕륭에게 영향을 끼친 도선(道詵)의 인식이기도 했다. 궁예도 이러한 주청에 대하여 이의를 달지 않았고, 그의 뜻을 그대로 수용했으니, 이러한 삼한관(三韓觀)은 그 당시 신라지방민들의 공통된 인식이였던 것이다.
이 꿈을 정종과 왕식렴은 서경천도를 통해 이루고자 했다. 이미 대진(大振)은 거란에게 망하고 없었지만, 여전히 그 고지에는 대진유민들이 남아 있었기에 그들과 그 강토를 고려의 질서 속으로 포함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서운사 요오화상 비편. 왕건의 조부 작제건은 평주 호족의 딸인 원창왕후와 혼인하여 왕륭을 낳았고, 원창왕후와 왕륭은 평주출신의 선사 요오화상을 후원하며 그에게 서운사를 희사하였다. 당시 왕건집안이 불교의 선종세력과 밀착된 모습을 보여준다. 이 비문에서 태조가 조모를 '元昌王后(원창왕후)'로, 부친을 '威武大王(위무대왕)'으로 시호를 올렸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왕륭은 선대와 도선대사로부터 받은 “삼한(=남북국)통일”의 꿈을 왕건에게 심어주었다.
고려초기 북방경계를 살펴보면, 이미 태조대 고려 서북계는 현)압록강(鴨綠江)을 넘어서고 있었다. <고려사>에 최승로가 성종에게 올린 소(疏)를 보면 '(태조는) 요패(遼浿)의 놀란 파도를 진정시키고, 진한(秦韓)의 옛 땅을 얻어 열아홉 해만에 천하[寰瀛]를 통일하셨으니'라고 한다. 여기서 “요패(遼浿)”라는 표현이 주목되는데, 요하(遼河)와 패수(浿水)를 의미한다. 태조대에 고려의 영향력이 요동에까지 이른 것이다.
▲遼河(요하, 중국 요령성 랴오허). 윤한택의 연구에 의하면 고구려 말기에는 鴨淥江(압록강)으로 불리웠다고 한다. 광종대 잠시 이곳까지 진출했다가 거란의 침입으로 상실하면서 소요수로도 불리운 渾河(혼하)가 고려와 거란의 경계가 되었을 터이다.
▲(좌)태조~광종시기 고려의 강역(출처. 대한민국영토사 조현관著, 보고사) (우) KBS 한국사 探에서 고증한 최소한의 고려강역
일찍이 태조는 유금필을 보내어 서북계를 침탈하는 여진인들을 복속시켜 북계를 안정시킨 적이 있었다. <고려사>에 최승로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신라 말기부터 우리나라[고려] 건국 초기까지 서북 변방 백성들은 늘 여진(女眞)의 번기(蕃騎)가 종종 내려와 침략과 도적의〈피해를〉 당하였습니다. 태조는 마음속으로 결단을 내리셔서 한 사람의 훌륭한 장수를 보내어 그 곳을 지키게 하셨으니, 작은 칼을〈휘두르는〉 수고도 없이 도리어 오랑캐들이 귀순하도록 하셨습니다'
926년 대진의 멸망 전후로 많은 대진(발해)유민과 여진인의 귀부(歸附)가 있었고, 북방으로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936년 후백제와의 일리천전투에서는 흑수, 달고, 철륵 등 ‘제번(諸蕃)’의 기병 9,500명이 동원되고 있다. 태조이래로 고려에 귀화하여 귀순주로 편입된 화내(化內) 지역이 동만주일대로 넓혀지고 있었다. 고려에 입조하려 온 동여진의 대광 소무개는 고려의 관계(官階) 중 최고위에 속하는 '대광(大匡)'을 지니고 있다. 아마도 그는 많은 수의 여진부락들을 설득하여 귀순주(歸順州)로 편입되게 하는데 공로가 있었기에 최고위직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고려의 영향력이 점차 요동과 동만주에까지 이르자, 거란이 자극을 받아 이를 저지하기 위해 고려에 대한 침략계획을 세우게 된다. 후진(後晉)에 유학 갔다가 거란에 포로가 된 최언위의 아들 최광윤이 이 사실을 몰래 조정에 알려 왔다.
정종과 왕식렴은 이 보고를 전달받고 외침에 대비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호족들의 무력을 끌어모아 호족연합군의 성격을 지닌 30만의 광군(光軍)을 조직하는 한편, 이 군대를 지휘하는 "광군사(光軍司)"라는 통수부를 설치하여 여러 호족들의 무력을 중앙에서 하나로 통제하려고 하였다.
이 광군이 표면적으로는 외침을 방어하기 위한 군대였지만, 실상은 북진을 위한 역할을 기대하며 꾸려진 군대로 보인다. 정종정권의 이러한 서경천도와 북진을 위한 광군사 설치는 안정을 희구하고, 자신들의 힘을 계속 유지, 보존하려는 호족들과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지점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왕식렴의 전횡에 거부감을 지닌 호족들은 수도까지 그의 근거지인 서경으로 옮길 경우, 왕식렴의 권력이 더욱 비대해 질 것을 크게 우려했을 것이다.
그래서 제(諸)세력들은 천도의 불가함을 간하며 중지시키려 했으나, 정종과 왕식렴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호족들은 자신들의 뜻이 관철되지 않자, 정종정권으로부터 하나둘 등을 돌리게 되었으니, 이러한 사정을 최승로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그러나〉 도참(圖讖)을 그릇되게 믿게 되어 천도(遷都)를 결정하셨습니다.
또한 천성이 굳세어 고집을 굽히지 아니하셨고, 급박하게 백성들을 징발하여 역사(役事)를 일으켜서 사람들을 수고롭게 하니, 비록 임금이 옳다고 생각해도 사람들은 진심으로 따르지 않았습니다. 원망과 비방이 이로 인해 일어났고, 재난이 그림자와 메아리처럼 재빨리 응하여 서경으로 천도하지도 못하고 〈임금의 자리를〉 영원히 떠나 남면(南面)하셨으니, 참으로 통탄할 만합니다.'<고려사 최승로열전>
많은 호족과 개경의 민인들이 찬동하지 않는 서경천도 계획은 정종정권이 몰락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호족(豪族)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거슬리는 정종 대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게 된다. 그들이 주목한 인물이 바로 정종의 동복아우 왕소(王昭)였다. 왕소도 야심을 지닌 인물이였던지라, 이러한 분위기를 내심 반기며, 자신의 세를 확장하는 기회로 삼았을 터이다.
왕소는 천도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암암리에 규합해 나갔다. 특히 평주의 박수경과 손을 잡고, 정종이 천덕전 벼락사건으로 병환을 얻은 것을 기회로 삼아, 일단 왕식렴을 제거하고자 움직였다. 사료의 인멸로 인해 그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아마도 제(諸)세력의 지원를 얻게 된 왕소측은 서경군을 제압하고 왕식렴을 제거한 다음, 정종을 강압하여 선위(禪位)의 형식을 빌려 물러나게 하였을 것이다.
<고려사>는 정종 4년(949) 정월에 왕식렴이 죽었고, 이에 기다렸다는 듯이, 2개월 후에 정종마져 병이 위독해져 동생에게 선위하고 제석원(帝釋院)으로 퇴거한 후, 이내 붕어했다고 한다. 소략한 기록만 남아있어 당시의 긴박한 정황을 파악하기 어렵지만, 말 못 할 행간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최승로는 이 말 못 할 사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또한 일찍이 혜종·정종·광종 세 왕께서 서로 계승하셨던 초기를 살펴보건대, 여러 가지 일들이 아직 안정되지 못한 때에 개경(開京)과 서경의 문·무 관리들의 절반 이상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라고 전한다.
평화적인 황위교체가 아니라 실상은 세력간의 무력충돌이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정종에게는 공식적으로 세명의 후비가 있었는데, 제1비 문공왕후 박씨와 제2비 경춘원부인(사후 문성왕후로 추존) 박씨가 있었고, 김긍률의 딸 제3비 청주남원부인 김씨가 있었다. 제2비 경춘원부인 박씨에게서 경춘원군과 공주 하나가 있었지만, 황자는 훗날 광종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
▲제3대 정종의 安陵(안릉)[좌]과 표지석터[우]. 1910년까지 고려황릉을 나타내는 표지석이 있었으나, 현재는 사라지고 없다(사진 출처=뉴시스).
만약 기록 그대로 왕소가 정종으로부터 평화적으로 선위를 받았다면, 광종 대에 정종의 황후가 선황의 비(妃)로써 “태후(太后)”의 위에 올라야 할 터이나, 사료인멸의 결과인지는 모르나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정변에 의한 교체였기에 이들 모두는 광종의 즉위와 동시에 사가로 폐출된 것으로 이해된다.
정종과 왕식렴은 비록 형황을 내쫓고 많은 사람의 피를 흘려가며 정권을 탈취했지만, 부국강병(富國强兵)과 고토 수복을 통한 온전한 “삼한(=남북국)통일”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만약 정종대에 수도를 북쪽으로 옮기고, 북진을 보다 적극적으로 도모했다면, 천하를 제패한 것이 거란이 아니라 고려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보육과 진의가 꿈에서 오줌을 누자 그 오줌이 천하와 삼한산천을 뒤덮었다고 한다. 이 꿈은 태조왕건을 거쳐 정종과 왕식렴에게도 계승되고 있었다. 비록 정종과 왕식렴의 꿈은 좌절되어 미완에 그쳤지만, 이들의 웅혼한 기상과 도전은 후대 제왕들이 그 꿈을 잊지 않고 계승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어졌다. 그래서 광종은 그들의 염원을 이어 받아, 요하 인근까지 북진(北進)하여 그곳에 성을 쌓고, 가주(嘉州 심양)와 척주(拓州)를 설치하게 된다.